한국 최초 선교사와 원로들의 만남

2022-09-24



한국 기독교140주년을 맞기까지 한국교회 선교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뗄 레야 뗄 수 없는 두 분을 들 수 있다.

1884년 동방의 작고 미개한 나라 한국에 복음을 안고 첫발을 내 딛었던 이들과 이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소식은 황무지와도 같은 이 땅을 변화 시켰으며 근대화를 이끌며 나라의 발전에 공헌 하였다.

민경배 교수에 의하면 1884년 알렌(allen)의사가 한국에 들어왔고 그 다음해부터 선교사들 이 연이어 들어오면서 그들은 주로 의료사업과 교육 사업에 종사하면서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그 중에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한 언더우드 목사는 한국어를 좀 말할 수 있게 되자 서서히 전도하기를 시작 하였다, 또한 민 교수는 연세 대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이 된 광혜원을 설립 하고 암울했던 조선말기 시대적 상황에서 서양 의술의 우월성이 입증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인식도 호의적으로 변화 할 수 있었다고 한다.

1885년 5월 3일 미 감리교회의 목사이며 의사인 스크랜턴이 입국 하였고 일본요코하마에서 언더우드와 같이 이수정으로 부터 한국어를 배웠던 미 북 장로교 의사인 헤론도 이들과 함 께 한국에 도착 하였다.

1885년 이른 여름에 주일 예배가 시작 되었고 10월에는 알렌의 집에서 처음으로 개신교 성 찬 의식이 거행 되었다고 전해진다.

아펜젤러는 서울 정동의 조선인집을 사들여 첫 예배 처로 삼았는데 그곳이 정동 감리교회 가 되었고 감리교의 효시가 되었다고 한다.

언더우드는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에 임시 정박 하였고 선교 사업에 필요한 훈련을 받는 한편 이수정에게서 2개월간 조선말을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한국으로 부임 하였다.

언더우드가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로 부활 주일이었다고 한다.

그래 서 100주년 기념탑에는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표현 하였다고 한다.

그는 4월 7일 위험을 무릎 쓰고 상륙하여 아펜젤러와 함께 마가복음을 재번역하고 영한 사전과 한영사전을 편찬 하였고 1886년 3월 29일 설립 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 하였다.

언더우드는 각처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함과 동시에 각종 교육 기관을 세우고 관여하였으며 고등교육 실시를 위하여 대학의 설립을 구상하여 연희 전문학교를 설립 하였으며 1915년 3월 5일 언더우드를 중심하여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시작한 것이 연희 전문 학교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이상은 간략하나마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선교 일대기를 소개 하였 다.

그들이 뿌린 복음의 정신을 본받고 실천을 다짐하는 목적으로 한국 기독교장로회 원로목사 회가 인천에 세워진 기독교100주년 기념탑을 방문 하였다.

기념탑은 1885년 4월 입국을 기념하여 인천 기독교연합회 (회장 전주석) 목사 주선 하에 기념탑이 건립 되었다고 한다.

도착과 동시 해설사 집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복음의 순수성은 갈수록 흐려지고 복음의 진가가 훼손되어 가는 현실에 원로들이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를 다짐하는 순간 이었다. 이어 중국 마을을 관광하며 인천의 이민역사와 흔적을 돌아보고 인천 노회장 김진환 목사와 부회장 이진목사 등이 나와 식사를 대접했고 모노레일을 타고 인천항의 경관을 둘러 본 후 바다 열차를 타고 월미도에서 바다 바람을 맞으며 예배를 드린 후 친목을 도모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귀가하며 선교사들의 지녔던 마음을 되새기며 실천을 다짐하는 유익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선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