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지교회 이야기- 1

2021-02-04


종지교회(이학준목사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


들어가며

종지교회는 한산면 북부지역으로서 지형이 종지처럼 생겼으므로 종지울 또는 종지동(種芝洞) 종동(種洞)이라 불려 초기교회 이름 또한 종동교회 혹은 종지동교회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종지를 아시나요? 씨앗을 담는 작은 그릇을 종지라고 하지요. 이곳에 세워진 종지교회는 반드시 기쁨으로 곡식단을 거둘 것을 소망하며 울며 씨를 뿌리는 교회였다. 이같은 교회의 역사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과 더 미션 타임즈의 이산규 목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종지교회의 태동

종지교회의 태동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에 기록되어있다. 동년(1904년) 10월 10일에 한산면 종지리에 종지교회를 세웠으니 이는 의회주의를 제창하다 투옥된 월남 이상재 선생이 옥고를 겪고 나와서 선생의 이남 이승인에게 명하여 세운 교회이다. 서천군 종지동 교회가 설립하다. 선시(先是)에 이승인이 남감리교 선교사에게서 복음을 들은 후 감리교회 예배당에 내왕하더니 그후 본리에 전도하여 신자가 증가하니 예배당을 신건하고 교회를 설립하니라고 되어 있다.


월남 이상재 선쟁이 직접적으로 종지교회 설립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들이 월남과 함께 회심하고 고향 한산면 종지리에 교회를 세운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부여 홍성군 남면에서 현감을 지냈을 뿐만아니라 출감이후 작고할 때 까지 부여 군수로 지낸 승인이 월남의 뜻을 받들어 제 2 , 제 3의 월남을 기독교 정신속에서 키워 나가기 위한 바램으로 고향을 찾아 월남의 회심을 전했다. 월남의 회심은 이곳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도대체 월남을 야수교로 회심케 한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호기심과 월남의 큰 뜻을 지원하기 위한 고향 유지들의 노력으로 본 종지리에 교회가 설립되기에 이른다. 특히 한산면 종지리에 거주했던 김영성씨가 260번지 집을 구입하여 교회가 시작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의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충남지역의 선교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군산에 스테이션을 설치하여 의료선교사인 드루(유대모, A. D. Drew)와 전킨을 상주하게 했다. 드루 선교사는 금강과 만경강을 오르내리면서 충청도의 남부지역과 전북 북서부 지역의 환자를 진료하였다. 이같은 의료활동이 주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금강유역의 주민들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서양병원(구암병원)을 죽을 사람도 살리는 곳으로 알았다. 이곳에서 치료받은 주민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난 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1903년 선교사 불이 서천과 한산을 방문할 때에는 이미 그곳에는 예배처소가 마련되어있었을 뿐만아니라 회중이 50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충남 지역의 교회들은 선교사들에 의해 개척되어지고 교회가 세워지기 보다는 순수한 열정을 지닌 성도들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특히 종지교회는 민족주의자 월남 선생의 영향력으로 세워진 교회이니만큼 서양인들의 신앙과 모습을 빼 닮은 서양의 교회가 아니라 토착화된 교회와 토착화 신앙을 중심으로 세워진 한국적인 교회라 할 수 있다.


기독진신학교

기독진신학교는 종지교회을 중심으로 설립된 부설 교육기관이었다. 배워라(知識) 믿으라(信仰) 낙심하지 말라(希望)는 월남의 유지를 받들어 제2 제3의 월남을 양성하기 위해 교회를 중심으로 한 마을 유지들이 힘을 다해 교육기관을 설립하게 되었다. 구한말 융희 3년(1909년 8월 6일) 인가를 받아 운영하다가 일제강점기인 1917년 3월 2일까지 운영하고 폐교되었다. 초대교장은 월남 이상재 손자인 이선직으로 학감은 김정복 김영성(독립운동가 김갑수씨의 부친)이었고 교사3인에 학생 수 18명이었으며 인근 부여에서도 학생들이 다닐 정도로 나라가 어지러웠던 현실속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종지교회 제1대 장로 유성열

유성열 장로는 1914년 장로로 임직하여 다방면에서 활발한 사역을 감당했다. 교회 사역 뿐만아니라 초기노회 활동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1915년 8월 25일 처음으로 제6회 전라노회에 참여하였으며 전북노회 제3회(1918년 8월 26일) 정기회에서 총회 총대로 피선되어 총회에도 참석하는 등 다방면에서 지도력을 발휘했다.

1919년 3월 29일 마산 새 장터에서 일어난 3ㆍ1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밤새 만든 태극기를 장터서 군중들에게 나누어주며 송기면(화양 화촌)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유성열 장로가 만세 삼창을 하였다.

유성열 장로의 주도적인 3ㆍ1운동의 참여를 볼 때 당시 종지교회 또한 상당한 역할을 감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 해 주는 사건이 3ㆍ1운동의 주동자 유성열 장로의 투옥과 동시에 교회가 폐쇄당한 것이다.


충남 최초의 조직교회로서의 종지교회

1900년 초부터 충남지역에 교회가 설립된 이래 1915년까지 수많은 교회가 탄생되었지만 당회를 구성하고 노회에 정식으로 보고를 한 조직교회는 종지교회가 처음이었다. 1914년에 장로로 임직한 유성열 장로는 이듬해 전라노회 제5회(1915년)때부터 교회현황을 보고하기에 이른다.

특히 1917년 당시 노회에 보고된 종지교회의 통계 현황은 다음과 같다.

선교사 1명, 장로1명, 장립집사 1명, 주일학교 전무교사 2명, 조직교회 1명, 유년 40명, 사경회 학교 1명, 세례인 합 40명, 유세 11명, 학습 19명, 원입 27명, 집회 60명, 성경학당 1명, 소학교 1명, 소학교 평균 11명

재정합 157원, 교화용비 19원 15전, 조사월급19원 50전, 외지선교비 2원, 내지전도비 6원 95전, 건축수리비 4원 90전, 학교용비 100원, 구제비 20전, 노회비 3원 60전, 잡비 70전


제9회 노회에 보고된 종지교회 현황은 다음과 같다.

주일학생 80명, 세례인 40, 교인 합 90,

조사월급 28,00 노회비 9원10전.


3ㆍ1운동 이후 1920년대

3ㆍ1운동 이후 교회는 많은 피해를 입고 사회가 침체했으나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교회는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장로회 총회에서는 총회 조직 안에 진흥부를 설치하고 전국에 전도지를 배포하는 등 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전북노회에서도 진흥부를 설치하고 부위렴 선교사의 주관 아래 이를 활발히 진행시켰다.

이 시기에 선교사 부위렴과 함께 동사목사로서 본 교회에서 활동한 최상섭 목사님이 계신다. 최상섭 목사가 임시목사로서 종지 구동 금당 청포교회 등을 관할하며 또한 전북노회 서북지방 시찰장으로서 교회 개척과 교회 부흥에 심혈을 기울였다.(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