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사람인가?

2021-09-10

유승우(시인. 문학박사)


무엇이 사람인가?

 

무엇이 사람인가.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이 사람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닮은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보이지는 않으나 반드시 있는 신비(神秘)”이다. 이를 가리켜 신성(神性)이라고 한다. 무엇이 사람인가. 보이지는 않으나 반드시 있는 신성이 사람이다. 이 신성이 인두겁 속에 있으면 마음이고, 말문을 열고 나오면 말 곧 언어이다. 인두겁 곧 육신 속에 있는 ‘살다’는 마음이고, 말문을 열고 나온 ‘살다’는 말이다. 생명(生命)의 명(命)자는 입이 있음으로 하여금 소리를 낸다는 것과 먹이를 찾아 움직인다는 동물적 생명의 이미지이다. 입을 가진 모든 동물의 새끼들이 살아있다는 신호로 내는 소리가 엄(M)이라고 한다. 이 생명의 신호를 소리로 발성하면 ‘엄’이나 ‘맘’이 된다고 한다. 동물 중에선 송아지가 ‘엄매’라고 발성한다고 상상한다. 사람의 첫 발성은 아무래도 ‘맘’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맘은 엄마와 맘마의 원형이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맘’은 마음의 준말이기도 하다. 우리말 자모의 ‘미음(ㅁ)’이나 한자의 입 구(口)자는 생명의 가둠을 상형한 기호이다. 그래서 우리말 자모의 ‘미음(ㅁ)’은 동사의 움직임을 정지시키는 명사형 어미이고, 입 구(口)자는 둘러싸다 위(圍)자의 고자(古字)이다. 그렇다면 ‘맘’은 갇혀있는 생명이나 피어나기 이전의 생명을 상징하는 이미지이다. 이 ‘맘’이 흐름소리 ‘ㄹ’을 만나 흘러나오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속의 신성(神性), 곧 하나님의 형상이 피어나는 것이 말이며, 요한복음 1장 1절의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의 확증이라 하겠다.

신의 유전자 1.3%가 곧 신(神)이고, 영(靈)이고, 얼이며, 마음이다. 이 마음이 말로 나오면 귀로 들을 수 있지만 눈으로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이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금을 긋고, 그 속에 마음을 숨겨놓은 것이 글이다. 글 속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숨겨져 있다. 말은 소리에 담긴 ‘살다’이고, 글은 글자에 담긴 ‘살다’이다. 그런데 입은 기도(氣道)로 가슴과 이어져 있고, 손은 아예 가슴에 붙어 있는 살과 뼈이다. 가슴이 곧 심장이며, 마음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살다’와 ‘죽다’는 쉬지 않고 작동하는 동사이다. 태초부터 영원까지 지속되는 현상이다. ‘살다’는 생명의 흐름이고, ‘죽다’는 생명의 멈춤이다. 말과 글은 사람의 ‘살다’를 위해 끊임없이 흘러야 한다. 그래서 ‘살다’를 상징하는 흐름소리 ‘ㄹ’이 말과 글의 받침이 된 것이다. 훈민정음에서도 ‘ㄹ’을 유음(流音) 곧 ‘흐름소리’라고 했다. 말과 글의 흐름이 멈추면 생명이 갇힌다. 그래서 ‘마음→맘’의 ‘ㅁ’이 ‘ㄹ’로 바뀐 것이며, ‘금’의 받침 ‘ㅁ’도 ‘ㄹ’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글’은 말보다 한 단계를 더 거쳐서 ‘글’이 된 것이다. 말은 <마음→맘→말>에서 보듯, 마음이 직접 말로 나오지만, 글은 <마음→맘→말>과 <그음→금→글>에서 보듯, 시각적 표현인 ‘금’의 단계를 하나 더 거쳐서 글이 된다.

글은 마음이 숨겨진 시각적 기호이다. 이 ‘글’은 ‘긋다’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이다. “긋다→그음→금→글”의 과정을 거쳐 ‘글’이 된 것이다. 여기서 “긋다→그음→금”까지는 동물들의 영역 표시의 단계이다. 금은 사람의 손에 해당하는 짐승의 앞발로 그은 영역표시이다. 짐승들은 후각이 발달해서 배설물로 영역을 표시하기도 한다. 짐승은 먹고 싸는 동물적 삶이 전부이므로 눈에 보이는 금이나 배설물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한다. 그러나 인간은 정신적 영역표시까지 해야 한다. 그래서 글이 된 것이다. 말하자면 글은 영혼이나 마음의 흘러나옴이다. 동물의 삶은 먹고 싸는 일이 기본이다. 육체나 영혼이나 그 배설물로써 건강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

무엇이 사람인가. 앞발 대신 손을 쓰는 동물이 사람이다. 먹이를 움키고, 영역표시를 위해 금을 긋던 앞발이 손이 되었다. 앞발이 손이 됨으로써, ‘기어가다’의 주어인 짐승이 아니라, ‘걸어가다’의 주어인 사람이 된 것이다. ‘기어가다’의 주어인 짐승이나 벌레는 ‘기어가다’가 ‘살아 있다’는 신호이고, 사람은 ‘걸어가다’가 ‘살아 있다’의 신호이다.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걸어가다’이며, 그것을 형상화한 글자가 길 도(道) 자이다. 그리고 쉬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다’를 의미하는 단어가 진보(進步)이며, 정신적으로 형상화한 단어가 수도(修道)이다. 수도(修道)란 ‘길을 닦다’의 뜻이다. 그렇다. 쉬지 않고 길을 닦아야 한다. ‘없음’의 자리에 던져진 사람이기 때문에 쉬지 않고 길을 닦아야 한다.

앞발의 동작은 ‘긋다’로 시작해서 ‘금’으로 끝나지만, 그 ‘금’이 손의 동작에 의해 ‘글’로 바뀐 것이다. 이것이 형식적으로는 ‘ㅁ’이 ‘ㄹ’로 바뀐 것뿐이다. 그러나 ‘ㄹ’에는 흐름소리의 상징인 ‘살다’와 ‘흐르다’의 신비가 숨어 있다. 앞발의 동작인 ‘긋다’는 동물적 삶의 표현이지만, 손의 동작인 ‘그리다’는 인간적 삶의 표현이다. 다시 말해 ‘긋다’는 ‘있음’의 확인이지만, ‘그리다’는 ‘없음’의 확인이다. 인간존재의 ‘없음’이 확인될 때 시작되는 손의 동작이 ‘그리다’이다. 이 ‘그리다’가 시각적인 선과 색채로 형상화되면 ‘그림’이 되고, 언어로 형상화되면 글이 된다. 마음의 ‘그리다’를 손이 형상화한 것이다. 마음의 ‘그리다’는 심상(心象-image)이며, 그리움이며, 사랑이다. 그림과 글은 마음의 ‘그리다’인 심상(心象)의 형상화(形象化)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형상인 신성(神性)은 곧 사랑이며, 이 사랑이 곧 창조성(創造性)이다. 이 창조성의 우주적 실현이 천지창조(天地創造)이며, 인간적 실현이 글 곧 인문(人文)이다. 그래서 사람이 곧 글이며, 사람과 글 곧 인문(人文)은 따로 생각할 수 없는 한 몸이다. 그러니까 동물적인 ‘긋다’를 넘어 인간적인 ‘그리다’에 이른 것이 인문(人文)이며, 그 피어남이 문화(文化)와 문명(文明)이다.

 

 


 

 

 

 

유승우(본명-유윤식 호-한숲). ‘현대문학’지로 등단(1966년, 박목월 추천). 1939년 강원도 춘성산. 가평 초, 중, 고 졸업. 경희대학교국문과 졸. 한양대학교 대학원 졸-문학박사. 인천대학교 교수 역임. 인천시민대학 학장 역임. 인천대학교 명예교수(현). 사)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역임. 사)한국기독교문인협회 이사장 역임. 사)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현). 사)국제펜한국본부 고문(현). 수상-경희문학상(1988). 후광문학상(1994). 한국기독교문화예술대상(2003). 창조문예문학상(2011). 심연수문학상(2011). 상록수문예대상(2019). 시집-바람변주곡(1975). 나비야 나비야(1979). 그리움 반짝이는 등불 하나 켜 들고(1983). 달빛연구((1993). 물에는 뼈가 없습니다(2010). 숲의나라, 노래와 춤(2019) 등 11권. 저서-한글시론(1983). 몸의 시학(2005) 등 5권. 자서전 『시인 유승우』 출간(2014). 계좌번호 시티은행 437-30003-27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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