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훈목사
한문성경연구소장/논설위원
시시부부(是是否否.마5:37)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마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전제하고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라고 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이 한문성경에서는 “유이지언 당시시부부(惟爾之言 當是是否否.마5:37)”라는 말로 되어 있다. 같은 뜻으로 야고보도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전제하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약5:12)”라고 했다. 한문성경에서는 야고보서에서도 “유이지언 당시시부부(惟爾之言 當是是否否.마5:37.약5:12)”라고 되어 있다. “오직 너는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라고만 말하라”라는 뜻이다. 네 글자로 성어(成語)를 만들면 ‘시시부부(是是否否.마5:37.약5:12)’라는 말이 된다. 시시부부(是是否否)라는 말은 맹세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창22:16)”라고 자신이 자신을 가리켜 직접 맹세했다.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맹세한 것은 하나님 보다 더 큰 자가 없기 때문(히6:13)이라고 해석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다(히6:17)라고, 하나님의 맹세에 대한 보충 설명을 첨부하여 해석했다. 히브리서에서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히6:16)”라고, 맹세하는 방법과 맹세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히브리서의 설명처럼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출33:1)”라고 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13:5) 곧 가나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출6:8)이라고 모세는 생각했다. 신명기에서도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신1:8)”라고 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주신 ‘확정된 땅’으로 여겼다.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로 인도하여 내신 것은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자신들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는 것(신6:23)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민14:23)이며 온전히 따르지 아니한 사람(민32:11)이라고 했다. 척박한 가나안 땅이 과연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이 맞는가? 이들은 하나님의 맹세에 대한 회의주의자(懷疑主義者)들이었다.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신1:35)”라는 말도 회의주의자들이 그만큼 많았었다는 뜻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신4:21)”라고 말 할 정도로 하나님의 맹세에 대한 회의(懷疑)가 심각했었다.
그러나 마침내 회의(懷疑)를 극복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4:31)”라고 했다. 비록 사람들은 하나님의 맹세에 대해서 회의(懷疑)를 품고 의심했지만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그들을 버리거나 멸하지 않으시고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신8:1)”라고, 준법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성민(聖民)으로서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신28:9)”라고 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였으니(수21:43)”라고 했다. 이렇게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의 맹세가 얼마나 신실한가를 보여 주고 있는 역사이다. 예언자 느혜미아도 조상들이 교만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거역하였으나(느9:16)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느9:17) “열조에게 들어가서 차지하라고 말씀 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이르게 하셨다(느9:23)”라고, 교만하고 패역한 인간과 대비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맹세하여 주신 땅이니 만큼 “너희는 공평하게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겔47:14)”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구약 성경에서는 불성실한 인간과는 달리 하나님의 맹세는 신실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맹세를 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창21:24)”라고 말한 것처럼 아브라함은 여러 곳에서 맹세했다(창14:22.21:23.21:31). 사사기에서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삿8:19)”라고 했고 한나도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삼상1:26)”라고 했으며 욥도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욥27:2)”라고 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라는 말이 사무엘상하에서 16회, 열왕기상하에서 9회, 역대하에서 1회, 총 26회나 된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라는 말은 열왕기하에서 3회가 나오고 있고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는 말은 에스겔에서 13회가 나온다. 이렇게 사람들은 맹세를 통해서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거짓맹세로 인하여 맹세의 진위가 불분명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레위기에서는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레19:12)”라고 당부했다. 예언자 스바냐는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에게도 맹세하는 것은 이중적으로 맹세하는 짓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질타했다(습1:5). 예레미야도 백성들 중에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들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을 개탄하면서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5:2)”라고 했다.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는 것은 가증한 일(렘7:9,10)”이라고, 거짓맹세와 이중맹세를 ‘가증한 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질타했다. 그래서 예언자 스가랴는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슥8:17)”라고 단호하게 권고했고 예언자 호세아는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호4:15)”라고, 맹세 자체에 대해서 아예 금지하는 예언을 했다. 진실하고 신성하게 해야할 맹세가 거짓되고 우상에게까지 맹세하는 가증한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라기에서는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말3:5)”라고 했다. 맹세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고 까지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시편에서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시24:3)”라고 전제하고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24:4)”라고 했다. 이중적이고 거짓된 맹세가 횡행했기 때문에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금지했으며 오히려 맹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고 까지 강력하게 맹세를 금지했다. 그럼도 불구하고 복음서에서 마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맹세를 종교적으로 권장하면서 또 맹세한 것을 지키라고 강요하기까지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3-37)”라고 했다. 이렇게 마태는 맹세에 대한 예수의 가르치심을 기록했다. 여기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는 구약에서 맹세에 관하여 말한 바를 의미하고 “헛 맹세를 하지 말고”라는 뜻은 예언자들이 말했던 ‘거짓 맹세’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라는 말은 ‘맹세’의 계율을 고수하려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말이다. 이러한 옛 질서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은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 이들은 당시에 사회적인 기득권자들로써 옛 질서에 의해서 누리고 있던 특혜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불합리한 옛 질서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사라져 가는 과거의 계율에 얽매어 살게 하면서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마5:34)”라고 단언하여 선언했다. 한문성경에서는 “개물서(槪勿誓.마5:34)”라고 했다. 여기에서 ‘개(槪)’라는 글자는 곡식의 양을 헤아리는 말이나 되에 곡식을 담고 그 위를 평평하게 밀어 고르게 하는데 쓰는 방망이를 ‘평미래’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개(槪)’가 바로 ‘평미래 개(槪)’ 자이다. ‘옛 사람이 말한 바’ 구약에서 말하는 맹세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에 대해서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고 딱 잘라서(평미래해서) “맹세하지 말라(勿誓물서)”라고 말한다는 뜻이다. 복음과 진실의 공통점은 단순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순하게 딱 잘라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이나 자기 머리를 가리켜서도 맹세는 도무지 하지 말라고 했다. 맹세를 구실 삼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하는, 거짓 맹세나 이중적인 가증한 맹세가 횡행했을 뿐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기득권자들은 특혜를 누리고 백성들에게는 고스란이 피해가 되고 있는 폐습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맹세 자체를 부정하고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다. 맹세가 참과 거짓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회를 어지럽게 할 뿐만이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폐습에 불과했다. 사람의 일생처럼 종교적인 역사에도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다면 ‘옛 사람에게 말한 바’의 맹세는 종교적 가치를 상실한 생노병사의 마지막 단계에서 병들어 사라져가는 또 사라져야하는 역사의 배설물에 불과한 폐습이었다. 구약에서는 ‘맹세’라는 말이 무려 268회나 되고 신약에서는 겨우 32회에 불과하다. 구약은 맹세에 대해서 예언자들의 맹세에 대한 관점을 제외하면 대부분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라면 신약에서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맹세가 진실을 위장하는 속임수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맹세가 진실을 위장한 거짓된 처세술에 불과했다. 그래서 맹세하지 말고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로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시시부부(是是否否.마5:37)”라는 말의 뜻이다.
“시시부부(是是否否..마5:37.약5:12)”라는 말에서 ‘시(是)’라는 글자는 자전에 의하면 ‘직(直)’이라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직(直)은 ‘바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바르다 시(是)’ 자이다. 시(是) 자는 日(해 일)과 正(바를 정)을 따랐다. 일(日)은 편벽되이 비춤이 없어 천하의 지극히 공정한 것이다. 일(日)로 정(正.바름)을 삼음이 시(是)이다. 덧붙혀서 ‘直(곧을 직)’은 설문해자에 의하면 ‘바로 봄(正見정견)’이라고 풀이 했다. 옛날에는 말하기를 열 개의 눈이 숨은 곳을 비춤을 ‘직(直)’이라고 했다. 따라서 “시시(是是.마5:37)”라는 말은 ‘옳은 것은 옳다’라는 뜻이다. 태양과 같이 공정하고 바르게 보는 것이 시(是)이고 정견(正見)이다. 사사로운 사견(私見)이거나 편견(偏見)이거나 자기 신념이나 고집은 ‘시(是)’가 될 수 없다. 이어서 “부부(否否.마5:37)”라는 말에서 ‘부(否)’ 라는 글자는 ‘不(아닐 부)’와 ‘口(입 구)’를 따랐다. ‘부(不)’ 자는 자전에 의하면 ‘새가 하늘에 날아올라 빙빙 돌며 내려오지 않다(아니) 부(不)’ 자이다. 부(不)라는 글자 위 처음 가로로 쓴 것은 하늘을 가리키고 그 아래로 그은 것은 새 머리와 날개와 꽁지의 모양을 나타내는데, 그 형상이 일직선으로 상승하는 모양이므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부(否)는 ‘아니라고 말한다’라는 뜻이다. “부부(否否.마5:37)”라는 말을 풀이해 보면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회의 시간에 회장이 회중을 향하여 ‘가부(可否)’를 물을 때가 있다. 찬성(可)과 반대(否)를 묻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시 부부(是是否否.마5:37)”라는 말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뜻이 된다.
마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옳다고 판단이 될 때에는 ‘옳다(是)’ 하고 옳지 않다고 판단이 될 때에는 ‘아니다(否)’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라고 했다. 한문성경에서는 “과차즉유악이출야過此則由惡而出也.마5:37”라고 했다. 여기에서 ‘차(此)’는 “시시부부是是否否”라는 뜻이고 ‘악(惡)’은 ‘악한 사람(惡者)’이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된다. 따라서 “시시부부是是否否”라는 입장에서 벗어난 것은 ‘악한 자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다’라는 뜻이다. 옳고 그름이 분명한 때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은 모두 악한 자로 말미암아 나왔다는 것이다. 기득권을 고수하는 정치적인 지도자를 말한다. 따라서 ‘회색지대’는 악에서 나온 것이다. 분명하게 ‘옳다’라고 해야할 때에 반대로 ‘아니다’라고 하고 분명하게 ‘아니다’라고 말해야할 때에 반대로 ‘옳다’라고 하는 것도 ‘악(惡)’에서 나온 것이다. 악(惡)의 반대를 ‘선(善)’이라고 할 때 ‘선(善)’은 ‘옳고 그름’이 분명한 것이고 ‘악(惡)’은 ‘옳고 그름’이 뒤짚여 있거나 불분명한 회색지대를 말한다. 그래서 마태나 야고보는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말해야할 때에는 “시시부부(是是否否.마5:37.약5:12)”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선(善)이며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은 악(惡)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이익을 초월하여 옳고 그름이 분명해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화폐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진실을 외면하는 타락한 자본주의를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 교회의 신앙이다. 교회가 진실해야만 나라에 도(道)가 있을때에는 교회가 ‘옳다’라고 말할 수 있고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에는 교회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시시부부(是是否否)가 분명한 시대에는 시시부부(是是否否)가 아닌, 사사로운 이론이나 다른 주장은 교회와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논어에서도 “교언 난덕(巧言 亂德.위령공편5-26)”이라는 말을 했다. 즉 ‘교묘한 말은 덕을 어지럽힌다’라는 뜻이다. 덕(德)이란 선을 행하는 태도라기 보다는 선행이 나오는 근본적인 힘이다. 이러한 힘을 어지럽히는 것이 교언(巧言)이다. 자기도 다른 사람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교언(巧言)이다. 그러나 덕은 내가 나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덕(德)이 있는 사람이라야 “시시부부(是是否否.마5:37.약5:12)”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덕을 길러야 한다. 교묘한 말장난은 덕을 어지럽히므로 도덕경에서는 차라리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하겠다(行不言之敎행불언지교.도덕경2장)”라고 했다. 장황한 말보다는 행동으로 말하겠다는 뜻이다. 말보다 행동이 더 진실하기 때문이다. 논어에서는 “인자 기언야인(仁者 其言也訒.안연편12-3)”이라고도 했다. ‘어진 사람은 말을 조심한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조심한다’라는 인(訒)이라는 글자는 말을 더듬듯이 어렵게 말한다는 의미이다. 인(訒)은 言(말씀 언)과 刃(칼날 인) 자를 썼다. 덕(德)이 되지 않는 말들을 예리한 칼 날로 싹뚝 싹뚝 잘라내는 것이 인(訒)이다. 어진 사람은 덕을 어지럽히는 교묘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태가 ‘시시부부(是是否否)’가 아닌 다른 교묘한 말들(巧言)은 모두 악(惡)한 자들에게서 나오는 말이라고 단정한 것은 옳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시시부부(是是否否)라는 말은 복음적인 진실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을 회복하려면 시시부부(是是否否)라고 말 할 수 있는 덕을 길려야 한다. 진실의 덕을 잃으면 꿀먹은 벙어리 처럼 말해야할 때 침묵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상훈목사
한문성경연구소장/논설위원
시시부부(是是否否.마5:37)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마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전제하고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라고 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이 한문성경에서는 “유이지언 당시시부부(惟爾之言 當是是否否.마5:37)”라는 말로 되어 있다. 같은 뜻으로 야고보도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전제하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약5:12)”라고 했다. 한문성경에서는 야고보서에서도 “유이지언 당시시부부(惟爾之言 當是是否否.마5:37.약5:12)”라고 되어 있다. “오직 너는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라고만 말하라”라는 뜻이다. 네 글자로 성어(成語)를 만들면 ‘시시부부(是是否否.마5:37.약5:12)’라는 말이 된다. 시시부부(是是否否)라는 말은 맹세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창22:16)”라고 자신이 자신을 가리켜 직접 맹세했다.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맹세한 것은 하나님 보다 더 큰 자가 없기 때문(히6:13)이라고 해석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다(히6:17)라고, 하나님의 맹세에 대한 보충 설명을 첨부하여 해석했다. 히브리서에서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히6:16)”라고, 맹세하는 방법과 맹세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히브리서의 설명처럼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출33:1)”라고 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13:5) 곧 가나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출6:8)이라고 모세는 생각했다. 신명기에서도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신1:8)”라고 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주신 ‘확정된 땅’으로 여겼다.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로 인도하여 내신 것은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자신들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는 것(신6:23)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민14:23)이며 온전히 따르지 아니한 사람(민32:11)이라고 했다. 척박한 가나안 땅이 과연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이 맞는가? 이들은 하나님의 맹세에 대한 회의주의자(懷疑主義者)들이었다.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신1:35)”라는 말도 회의주의자들이 그만큼 많았었다는 뜻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신4:21)”라고 말 할 정도로 하나님의 맹세에 대한 회의(懷疑)가 심각했었다.
그러나 마침내 회의(懷疑)를 극복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4:31)”라고 했다. 비록 사람들은 하나님의 맹세에 대해서 회의(懷疑)를 품고 의심했지만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그들을 버리거나 멸하지 않으시고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신8:1)”라고, 준법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성민(聖民)으로서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신28:9)”라고 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였으니(수21:43)”라고 했다. 이렇게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의 맹세가 얼마나 신실한가를 보여 주고 있는 역사이다. 예언자 느혜미아도 조상들이 교만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거역하였으나(느9:16)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느9:17) “열조에게 들어가서 차지하라고 말씀 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이르게 하셨다(느9:23)”라고, 교만하고 패역한 인간과 대비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맹세하여 주신 땅이니 만큼 “너희는 공평하게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겔47:14)”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구약 성경에서는 불성실한 인간과는 달리 하나님의 맹세는 신실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맹세를 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창21:24)”라고 말한 것처럼 아브라함은 여러 곳에서 맹세했다(창14:22.21:23.21:31). 사사기에서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삿8:19)”라고 했고 한나도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삼상1:26)”라고 했으며 욥도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욥27:2)”라고 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라는 말이 사무엘상하에서 16회, 열왕기상하에서 9회, 역대하에서 1회, 총 26회나 된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라는 말은 열왕기하에서 3회가 나오고 있고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는 말은 에스겔에서 13회가 나온다. 이렇게 사람들은 맹세를 통해서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거짓맹세로 인하여 맹세의 진위가 불분명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레위기에서는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레19:12)”라고 당부했다. 예언자 스바냐는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에게도 맹세하는 것은 이중적으로 맹세하는 짓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질타했다(습1:5). 예레미야도 백성들 중에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들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을 개탄하면서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5:2)”라고 했다.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는 것은 가증한 일(렘7:9,10)”이라고, 거짓맹세와 이중맹세를 ‘가증한 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질타했다. 그래서 예언자 스가랴는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슥8:17)”라고 단호하게 권고했고 예언자 호세아는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호4:15)”라고, 맹세 자체에 대해서 아예 금지하는 예언을 했다. 진실하고 신성하게 해야할 맹세가 거짓되고 우상에게까지 맹세하는 가증한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라기에서는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말3:5)”라고 했다. 맹세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고 까지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시편에서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시24:3)”라고 전제하고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24:4)”라고 했다. 이중적이고 거짓된 맹세가 횡행했기 때문에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금지했으며 오히려 맹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고 까지 강력하게 맹세를 금지했다. 그럼도 불구하고 복음서에서 마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맹세를 종교적으로 권장하면서 또 맹세한 것을 지키라고 강요하기까지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3-37)”라고 했다. 이렇게 마태는 맹세에 대한 예수의 가르치심을 기록했다. 여기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는 구약에서 맹세에 관하여 말한 바를 의미하고 “헛 맹세를 하지 말고”라는 뜻은 예언자들이 말했던 ‘거짓 맹세’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라는 말은 ‘맹세’의 계율을 고수하려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말이다. 이러한 옛 질서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은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 이들은 당시에 사회적인 기득권자들로써 옛 질서에 의해서 누리고 있던 특혜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불합리한 옛 질서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사라져 가는 과거의 계율에 얽매어 살게 하면서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마5:34)”라고 단언하여 선언했다. 한문성경에서는 “개물서(槪勿誓.마5:34)”라고 했다. 여기에서 ‘개(槪)’라는 글자는 곡식의 양을 헤아리는 말이나 되에 곡식을 담고 그 위를 평평하게 밀어 고르게 하는데 쓰는 방망이를 ‘평미래’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개(槪)’가 바로 ‘평미래 개(槪)’ 자이다. ‘옛 사람이 말한 바’ 구약에서 말하는 맹세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에 대해서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고 딱 잘라서(평미래해서) “맹세하지 말라(勿誓물서)”라고 말한다는 뜻이다. 복음과 진실의 공통점은 단순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순하게 딱 잘라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이나 자기 머리를 가리켜서도 맹세는 도무지 하지 말라고 했다. 맹세를 구실 삼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하는, 거짓 맹세나 이중적인 가증한 맹세가 횡행했을 뿐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기득권자들은 특혜를 누리고 백성들에게는 고스란이 피해가 되고 있는 폐습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맹세 자체를 부정하고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다. 맹세가 참과 거짓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회를 어지럽게 할 뿐만이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폐습에 불과했다. 사람의 일생처럼 종교적인 역사에도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다면 ‘옛 사람에게 말한 바’의 맹세는 종교적 가치를 상실한 생노병사의 마지막 단계에서 병들어 사라져가는 또 사라져야하는 역사의 배설물에 불과한 폐습이었다. 구약에서는 ‘맹세’라는 말이 무려 268회나 되고 신약에서는 겨우 32회에 불과하다. 구약은 맹세에 대해서 예언자들의 맹세에 대한 관점을 제외하면 대부분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라면 신약에서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맹세가 진실을 위장하는 속임수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맹세가 진실을 위장한 거짓된 처세술에 불과했다. 그래서 맹세하지 말고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로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시시부부(是是否否.마5:37)”라는 말의 뜻이다.
“시시부부(是是否否..마5:37.약5:12)”라는 말에서 ‘시(是)’라는 글자는 자전에 의하면 ‘직(直)’이라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직(直)은 ‘바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바르다 시(是)’ 자이다. 시(是) 자는 日(해 일)과 正(바를 정)을 따랐다. 일(日)은 편벽되이 비춤이 없어 천하의 지극히 공정한 것이다. 일(日)로 정(正.바름)을 삼음이 시(是)이다. 덧붙혀서 ‘直(곧을 직)’은 설문해자에 의하면 ‘바로 봄(正見정견)’이라고 풀이 했다. 옛날에는 말하기를 열 개의 눈이 숨은 곳을 비춤을 ‘직(直)’이라고 했다. 따라서 “시시(是是.마5:37)”라는 말은 ‘옳은 것은 옳다’라는 뜻이다. 태양과 같이 공정하고 바르게 보는 것이 시(是)이고 정견(正見)이다. 사사로운 사견(私見)이거나 편견(偏見)이거나 자기 신념이나 고집은 ‘시(是)’가 될 수 없다. 이어서 “부부(否否.마5:37)”라는 말에서 ‘부(否)’ 라는 글자는 ‘不(아닐 부)’와 ‘口(입 구)’를 따랐다. ‘부(不)’ 자는 자전에 의하면 ‘새가 하늘에 날아올라 빙빙 돌며 내려오지 않다(아니) 부(不)’ 자이다. 부(不)라는 글자 위 처음 가로로 쓴 것은 하늘을 가리키고 그 아래로 그은 것은 새 머리와 날개와 꽁지의 모양을 나타내는데, 그 형상이 일직선으로 상승하는 모양이므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부(否)는 ‘아니라고 말한다’라는 뜻이다. “부부(否否.마5:37)”라는 말을 풀이해 보면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회의 시간에 회장이 회중을 향하여 ‘가부(可否)’를 물을 때가 있다. 찬성(可)과 반대(否)를 묻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시 부부(是是否否.마5:37)”라는 말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뜻이 된다.
마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옳다고 판단이 될 때에는 ‘옳다(是)’ 하고 옳지 않다고 판단이 될 때에는 ‘아니다(否)’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라고 했다. 한문성경에서는 “과차즉유악이출야過此則由惡而出也.마5:37”라고 했다. 여기에서 ‘차(此)’는 “시시부부是是否否”라는 뜻이고 ‘악(惡)’은 ‘악한 사람(惡者)’이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된다. 따라서 “시시부부是是否否”라는 입장에서 벗어난 것은 ‘악한 자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다’라는 뜻이다. 옳고 그름이 분명한 때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은 모두 악한 자로 말미암아 나왔다는 것이다. 기득권을 고수하는 정치적인 지도자를 말한다. 따라서 ‘회색지대’는 악에서 나온 것이다. 분명하게 ‘옳다’라고 해야할 때에 반대로 ‘아니다’라고 하고 분명하게 ‘아니다’라고 말해야할 때에 반대로 ‘옳다’라고 하는 것도 ‘악(惡)’에서 나온 것이다. 악(惡)의 반대를 ‘선(善)’이라고 할 때 ‘선(善)’은 ‘옳고 그름’이 분명한 것이고 ‘악(惡)’은 ‘옳고 그름’이 뒤짚여 있거나 불분명한 회색지대를 말한다. 그래서 마태나 야고보는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말해야할 때에는 “시시부부(是是否否.마5:37.약5:12)”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선(善)이며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은 악(惡)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이익을 초월하여 옳고 그름이 분명해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화폐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진실을 외면하는 타락한 자본주의를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 교회의 신앙이다. 교회가 진실해야만 나라에 도(道)가 있을때에는 교회가 ‘옳다’라고 말할 수 있고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에는 교회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시시부부(是是否否)가 분명한 시대에는 시시부부(是是否否)가 아닌, 사사로운 이론이나 다른 주장은 교회와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논어에서도 “교언 난덕(巧言 亂德.위령공편5-26)”이라는 말을 했다. 즉 ‘교묘한 말은 덕을 어지럽힌다’라는 뜻이다. 덕(德)이란 선을 행하는 태도라기 보다는 선행이 나오는 근본적인 힘이다. 이러한 힘을 어지럽히는 것이 교언(巧言)이다. 자기도 다른 사람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교언(巧言)이다. 그러나 덕은 내가 나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덕(德)이 있는 사람이라야 “시시부부(是是否否.마5:37.약5:12)”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덕을 길러야 한다. 교묘한 말장난은 덕을 어지럽히므로 도덕경에서는 차라리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하겠다(行不言之敎행불언지교.도덕경2장)”라고 했다. 장황한 말보다는 행동으로 말하겠다는 뜻이다. 말보다 행동이 더 진실하기 때문이다. 논어에서는 “인자 기언야인(仁者 其言也訒.안연편12-3)”이라고도 했다. ‘어진 사람은 말을 조심한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조심한다’라는 인(訒)이라는 글자는 말을 더듬듯이 어렵게 말한다는 의미이다. 인(訒)은 言(말씀 언)과 刃(칼날 인) 자를 썼다. 덕(德)이 되지 않는 말들을 예리한 칼 날로 싹뚝 싹뚝 잘라내는 것이 인(訒)이다. 어진 사람은 덕을 어지럽히는 교묘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태가 ‘시시부부(是是否否)’가 아닌 다른 교묘한 말들(巧言)은 모두 악(惡)한 자들에게서 나오는 말이라고 단정한 것은 옳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시시부부(是是否否)라는 말은 복음적인 진실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을 회복하려면 시시부부(是是否否)라고 말 할 수 있는 덕을 길려야 한다. 진실의 덕을 잃으면 꿀먹은 벙어리 처럼 말해야할 때 침묵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