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성경으로 본 말씀묵상>
묵상제목/ 만약 묵시가 없으면
若無黙示(약무묵시)
장상훈목사
한문성경제주연구소장
한글성경
잠언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한문성경
箴言(잠언) 29:18
18若無默示(약무묵시) 民則妄爲(민즉망위) 謹守律法者(근수율법자) 則爲有福(즉위유복)
통문장 이해
18만약(若) 묵시가(默示) 없으면(無) 백성이(民) 곧(則) 제멋대로(妄) 행하거니와(爲) 율법을(律法) 삼가(謹) 지키는(守) 자는(者) 곧(則) 복이(福) 있는 자가(有) 된다(爲)
한글성경과 한문성경 대조
한글성경에서 ‘방자히’가 한문성경에서는 ‘망(妄)’ 자로 되어 있으나 뜻은 같다. 망(妄)은 ‘제멋대로, 함부로’의 뜻이다. 한글성경에서는 한문성경에서 부사로 쓰인 ‘즉(則). 근(謹). 즉(則)’이 없으며 문장 마지막에 ‘위유복(爲有福)’을 한글성경은 ‘복이 있느니라’라고 간략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한글성경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라고 잠언답게 새겼다.
말씀 묵상(默想)
캄캄한 밤 중에 활동하는 올빼미(梟.올빼미 효)라는 새가 있다.
남들이 보지 못할 때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진 새가 올빼미이다. 예나 지금이나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올빼미와 같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어둠 속에 깊이 잠들어 있을 때에 올빼미와 같이 두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잠잠히 알게 해 주신다. 이것을 성경은 묵시(默示)라고 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역사의 밤이 짙어 갈 때에 역사의 현실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묵시를 깨달아 백성들에게 예언을 선포했다. 오늘의 현실에서도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깊은 밤 중에 올빼미와 같은 통찰력을 가지고 혼자서 조용히 사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찾는 사람들이야 말로 오늘의 예언자들이다.
어두운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올빼미와 같은 통찰력을 가진 오늘의 예언자들의 예언이 바로 이 시대를 일깨우는 언론이며 목회자들의 설교이다. 하나님의 묵시를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혼자 있는 것이 결코 외로운 것이 아니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홀로 조용히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고 들은 바의 묵시를 기록한 책이 묵시록(요한계시록)이 아니던가?
묵시(默示)라는 말은 한문성경에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묵시(默示)의 묵(黙) 자는 ‘칠흑 같이 밤이 어두워(黑: 검을 흑) 개(犬: 개 견) 마져 자고 짖지 않으니 더욱 <고요하다>, <침묵하다>’의 뜻이다. 시(示) 자는 하늘(二: <-上)에서 해와 달과 별(小: <-日,月,星을 뜻함)이 비추어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미리 <보이다>의 뜻이다.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시신사야(示神事也)” 즉 ‘신(神)의 일을 보이는 것이다’ 라고 했다. 시(示)는 ‘보이다’라는 뜻이 있지만 ‘알려 주다, 지시하다, 가르치다’ 등의 뜻도 있어서 묵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려 주다, 지시하다, 가르치다’ 등의 뜻이기도 하다. 사전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계시를 내려 그의 뜻이나 진리를 알게 해주는 일이다.
그런면에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묵시는 100세에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와 언약을 세워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以爲永約이위영약-영원한 언약이 되리라)”라고 했던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바치므로써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은 민족이 되어(창22:17) 천하 만민이 너로 복을 받으리라(창22:18)고 한, 이 언약이 믿음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었던 것이다.
요셉에게 하나님의 묵시은 꿈이었다(창37:5 約瑟得夢요슬득몽-요슬(요셉)이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을 모든 형들에게 말하였다고 했다(창37:5 述於諸兄술어제형-모든 형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단을 묶을 때 내 단은 일어나서 서있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창37:7)”라고 했다. 요셉이 또 꿈을 꾸었다(창37:9 我又得一夢아우득일몽-내가 또 한 꿈을 꾸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는 꿈이라고 형들에게 또 말했다. 요셉의 어린 시절의 꿈은 장차 그에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묵시(默示)였다. 요셉은 스스로 소중하게 간직해야할 하나님의 묵시(꿈)를 형들에게 두 번이나 다 말하였고 그로 인해서 형들로부터 혹독한 시련을 당했다. 그러나 요셉은 묵시(默示)로 인하여 자신의 삶을 단속하였고 시련이나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거나 방자하게 굴지 않았다. 결국에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형들의 절을 받았다. 요셉에게 있어서 어린시절의 꿈은 성장 과정과 시련의 고비마다 자신을 단속할 수 있는 하나님의 묵시가 되었던 것이다.
신약성서 마태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은 꿈 속에서 하나님의 묵시를 깨닫고(마2:12 博士於夢中得默示박사어몽중득묵시. 득(得)은 깨닫다의 뜻이다. 꿈 속에서 박사들이 묵시를 깨닫고) 묵시대로 헤롯에게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고향에 돌아갔다. 하나님의 묵시를 따른 것이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꿈에 하나님의 묵시를 깨닫고(마2:22 夢中得黙示몽중득묵시-꿈 속에서 묵시를 깨닫고) 그 묵시를 따라 갈릴리 지방으로 가서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살았다. 하나님의 묵시를 따른 것이다. 한문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양치기 소년이었던 목동 다윗의 묵시는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비전이었다.
사무엘상 16:13절에서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다윗에게 부었는데 이날 이후로(삼상16:13 自此日後자차일후-이 날 이후부터) “주의 신이 다윗에게 감동하였다(삼상16:13 主之神感大衛주지신감대위. 대위는 다윗의 음역이다. 주의 신이 다윗에게 감동하였다)”라고 했다. 다윗에게 장차 왕이 되는 비전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하나님의 묵시였다. 이 날 이후로 다윗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묵시를 평생 간직했고 그 묵시로 자신을 단속하였고 고비마다 자신에게 감동을 준 하나님의 영을 의지했다. 다윗은 그 묵시가 이루어지기까지 수 많은 시련과 역경의 세월을 이겨내야만 했다. 그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자신을 단속하며 하나님의 영을 철저하게 의지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여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을때에도, 나단 선지자에게 먼저 그 밤에 주의 묵시가 있었고(삼하 7:4 是夜主黙示拿單曰시야주묵시나단왈-그 날 밤에 주의 묵시가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나단은 이 묵시를 쫓아서 다윗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영이 감동하는 묵시었기 때문에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질책을 거절할 수 없었다. 마침내 다윗은 눈물이 침상을 젖기까지 회개할 수 있었다. 다윗의 왕권을 보존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도 항상 하나님의 영의 묵시가 그와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모세가 평생 동안 간직했던 묵시라고 한다면 출애굽기 3:2절에서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타지 아니하는 불꽃 안에서 나타나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타지 아니하는 불꽃은(출3:2 荊棘爲火所焚而不燬형극위화소분이불훼-가시나무에 불이 타는 바가 되었으나 (가시나무가)타지 아니하는 불꽃)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보았던 단 한 번의 과거형 불꽃이 아니라 모세의 일생에 꺼지지 아니하고 작용하는 현재형 불꽃이 되었다. 악의 세력이 강할수록 모세의 열정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애굽의 바로 왕도 모세의 열정의 불꽃을 진화할 수는 없었다. 학대(虐待) 받는 백성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탈출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까지 광야 40년의 여정도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열정이 모세에게 현재형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그 엄청난 구원과 해방의 기나긴 여정을 감당할 수 있었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현재형 열정은 평생동안 모세로 하여금 모세가 되게 했던 것이다. 모세는 그런 현재형 열정의 불꽃을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물려 주고 자신은 불꽃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모세에게는 무덤도 없다.
한문성경에서 예언자들에게 묵시는 예언이었다.
이사야는 “묵시를 깨달아 유대와 예루살렘에 예언했다(사1:1 得默示 論猶大及耶路撒冷득묵시 론유대급야로살랭-야로살랭은 예루살렘의 음역이다. 묵시를 깨달아 유대와 예루살렘에 예언했다)”라고 되어 있다. 이사야는 주의 성전에서 주의 영의 감동을 받았으며 주의 묵시를 깨달아 유대와 예루살렘에 예언했다. 예레미야도 주의 묵시를 깨닫고 예언을 말하였는데(렘1;1 耶利米得主黙示述預言야리미득주묵시술예언-야리미는 예레미야의 음역이다. 예레미야가 주의 묵시를 깨달아 예언을 말하였는데) 유다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재위한지 13년에 “예레미야가 주의 묵시를 깨닫기 시작하여(렘1:2 耶利米始得主之黙示야리미시득주지묵시-예레미야가 주의 묵시를 깨닫기 시작하여)”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재위시 “또 묵시를 깨달았고(렘1:3 亦得黙示역득묵시-또 묵시를 깨달았고)” 요시아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역사의 현장을 통하여 계속해서 하나님의 “묵시를 깨달았다(렘1:3 得黙示득묵시-묵시를 깨달았다)”라고 했다. 예레미야는 단 한번의 묵시로 예언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서 계속적으로 그때 그때 하나님의 묵시를 깨달아 예언을 했다는 것이다. 에스겔은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주의 영의 감동을 받아(겔1:3 蒙感於主之靈몽감어주지영-주의 영에 감동을 받아) 주의 묵시를 깨달았다(겔1:3 得主之黙示득주지묵시-주의 묵시를 깨달았다)”라고 했다. 예언자들에게 있어서는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묵시의 깨달음이 있었고 이 묵시가 예언활동의 확실한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한문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구약 소예언서에서는 한결같이 “得主之默示(득주지묵시). 주의 묵시를 깨달아.호1:1.욜1:1.암1:1.옵1:1.미1:1.나1:1.합1:1.)”라고 하여 “주의 묵시를 깨달아” 예언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처럼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묵시가 있었기 때문에 그 묵시를 근거로 하여 예언하였으며 그리고 그들의 삶은 올곧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혀 방자하게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묵시가 예언자들의 예언과 그들의 삶을 단속하였고 삼가 근신하게 하였고 홀로 있을 때에도 하나님과 하나님이 깨닫게 하여 주시는 묵시만을 주시하였다. 예언자들이 수 많은 시련과 극심한 박해를 참아낼 수 있었던 것도 그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묵시가 늘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언자들은 시대를 구원할 하나님의 묵시를 자신들의 목숨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고 살았다. 철저한 역사의식이 있었고 시대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과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예언자들의 묵시었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묵시가 없이 방자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묵시를 예언함으로써 시대를 일깨워서 토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문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의 묵시는 예언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묵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묵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하는 자의 시험을 이기신 것도 하나님의 말씀 즉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신8:3)”라는 말씀의 묵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묵시는 개인적인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惟義者 以信得生유의자 이신득생)”라는 이 말씀은 하박국과 바울과 루터에게까지 전율하는 말씀의 묵시가 되었다. 그들을 전율시킨 이 말씀의 묵시가 하박국은 예언자로, 바울은 이방인의 빛으로, 루터는 종교개혁자로 나서게 하였던 것이다. 이 처럼 말씀의 묵시가 평범한 사람들을 변화시켜 위대하게 하고 역사와 낡은 시대를 개혁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일하게 하셨다. 이와 같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3:16)”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묵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 맨 마지막 성경인 <<요한계시록>>이 한문성경에는 <<묵시록(黙示錄)>>으로 되어 있다. 요한이 받은 묵시이기 때문이다. 계시(啓示)라는 말은 ‘열 계(啓)’ 자에 ‘보일 시(示)’ 자로 ‘열어 보인다’라는 뜻이다. 창문의 커튼을 열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준다는 의미이다. 계시나 묵시는 하나님께서 깨닫도록 알게 해 주신다는 데에는 그 뜻이 같다. 요한도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묵시를 깨달았던 것이다.
<<묵시록(黙示錄.요한계시록)>>은 무슨 책인가? 1장 1절에서 “야소기독지묵시(耶穌基督之黙示)”라고 한문성경은 밝히고 있다. “야소기독(耶穌基督)”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차한 음역이다. 묵시는 그냥 묵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라고 단정하여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묵시는 일반적인 묵시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라고는 할 수 없다. 묵시의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도 예수 그리스도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묵시하는 것이다.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해서 마지막 인사를 빼고 나면 22장 20절에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主耶穌歟(주야소여) 切願爾至(절원이지)-주 예수여 너희에게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나이다)”로 마치고 있다. ‘야소기독(耶穌基督)’이 묵시록의 핵심이며 묵시의 처음과 나중이며 묵시의 참 주제이다. 예수님를 떠난 묵시는 성경적인 참 묵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묵시를 함부로 말하고 들으면 안되는 것이다. 성경을 떠난 사사로운 묵시는 오히려 그런 묵시가 사람을 방자하게 하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사사로운 체험이나 묵시를 절대화하면 성경을 거스리는 오류에 빠지게 되는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묵시라고 해서 함부로 말하고 듣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논어에서도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불언(不言)”이라는 말을 했다.
논어 술이편에서 ‘불언괴력난신(不語怪力亂神)’ 즉 ‘괴이한 일과 엄청난 힘과 어지러움과 귀신을 말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일상적인 것을 말하고 괴이한 것을 말하지 않으며 덕을 말하고 폭력을 말하지 않으며 질서 있는 다스림을 말하고 어지러운 반란은 말하지 않으며 사람을 말하고 사람을 현혹시키는 귀신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 사람들은 과학적인 최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괴력난신(怪力亂神)의 현상에 호기심을 가지고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고 그것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도 알 수 없고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전혀 확인되지 않은 괴이하고 이상한 현상에 우리의 삶을 맡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 세계가 모두 하나님의 신비덩어리이기 때문에 논어에서도 괴력난신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분명하게 하나님의 영역이 있고 인간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논어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정답이 없는 미궁의 세계를 개인적인 체험을 내세워 사실인 것처럼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예레미아 23:16절에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날조된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을 듣지 말라고 전제하고 그들은 헛된 것을 가르치고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성경적인 객관성과 역사성이 없는, 사사로운 개인적인 묵시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한글성경은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렘23:16)”이라고 했다. 한문성경의 표현이 더 명확하다. “所言默示(소언묵시) 由己心所捏造(유기심소날조).렘23:16)” 즉 ‘그들이 말하는 바의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아 날조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성경적인 객관성과 역사성이 없이 개인적으로 날조된 묵시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날조(捏造)란 무엇인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런 날조된 묵시를 엄격하게 경계한 것이다. 에스겔 예언자도 거짓말로 예언하는 여자들을 경계했다. 에스겔은 거짓 선지자들의 종말을 확신하면서 에스겔 12:24절, 13:9절, 13:23절에서 무려 세 번이나 ‘허탄한 묵시’의 종말을 예언하였다. 한문성경에는 “허위지묵시(虛僞之默示.겔12:24)” 즉 ‘거짓으로 꾸며 낸 묵시’라고 했고 “망탄지묵시(妄誕之默示.겔13:9)” 즉 ‘거짓으로 남을 현혹시키는 묵시’라고 했으며 “망언지묵시(妄言之默示.겔13:23)” 즉 ‘거짓말로 된 묵시’라고 했다. 속에 진실이 없는 날조된 허탄한 묵시는 그 실체가 거짓으로 들어나서 자연적으로 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언자 에스겔은 역사의 진실의 힘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되고 날조된 허탄한 묵시는 역사의 진실 앞에서 소멸되고 말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예레미아애가 2:14절에서도 “헛된 말과 어리석은 말로 묵시를 삼는 것(虛言狂詞허언광사 以爲黙示이위묵시)”를 엄히 경계하고 있다.
에스겔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너희가 다시는 허탄한 묵시를 보지 못하고 점복도 못할지라 내가 내 백성을 너희 손에서 건져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겔13:23)”라고 했다.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될 때에는 허탄한 거짓 묵시와 길흉화복을 점치는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일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묵시를 제멋대로 함부로 말하지도 않고 점쟁이의 말이나 묵시를 함부로 듣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예언자 에스겔은 허탄한 묵시와 거짓된 점복의 종말을 확신하고 있었다.
예언이 묵시이고 묵시가 예언이다. 성경의 예언서는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서(卜筮)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묵시를 깨달은 선지자들의 역사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선지자나 예언자라는 말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역사의 미래를 먼저! 그리고 미리 보고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말은 역사의 미래를 열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득권자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고 예언자들은 숱한 고난과 핍박을 받았던 것이다. 결국 저들의 예언의 마지막 포인트는 메시아로써 예수 그리스도였다. 구약의 예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하나님의 묵시인 것이다.
잠언 29:18절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함부로, 제멋대로’ 행동하여 방자하게 되는 것은 묵시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방자(放恣)라는 말은 요지음은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한글성경에 “방자하게 행하거니와”라는 뜻이 한문 성경에서는 “망위(妄爲)”로 되어 있다. 즉 ‘망령되게 행동한다’라는 의미이다. 묵시가 없으면 사람들이 망령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한글성경의 “방자(放恣)”는 ‘어려워하거나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없이 무례하고 건방지다’라는 뜻이다. 제멋대로 거리낌이 없이 놀아나는 태도이다. 묵시가 없으면 사람들이 건방지게, 제멋대로, 함부로 행동하여 방자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탄없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중용(中庸)의 소인배(小人輩)와 같다. 중용(中庸)이라는 책의 제2장에 보면 “군자는 중용을 지키고(君子中庸군자중용) 소인은 중용에서 어긋난다(小人反中庸소인반중용)”라고 전제하고 군자는 때와 상황에 알맞게 말하고 행동하는 ‘시중(時中.때에 알맞게 하다)’인 반면에 소인배(小人輩)는 때와 상황에 관계없이, 기탄없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한다(無忌憚무기탄)는 것이다. 염치(廉恥)를 모르고 부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수치감을 모른다. 묵시가 없는 백성은 중용의 소인배(小人輩)와 같은 것이다.
나에게는 묵시가 있는가? 오늘도 나 자신을 깊이 살펴 본다.
아브라함과 같은 하나님의 언약이, 구약의 요셉과 신약의 동방박사와 요셉과 같은 하나님의 묵시라고 할 수 있는 꿈이 있는가? 구원과 해방에 대해서 모세와 같은 불타는 열정이 있는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내 안에 하나님의 열정이 항상 현재형으로 타오르고 있는가? 어두운 이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예언이 있는가? 인생의 좌우명과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자신을 언제나 삼가 단속하고 자신의 삶을 삼가 근신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있는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묵시가 있는가? 나는 항상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고 있는가?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셔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을 단속하고 있는가? 이런 사람을 성경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란 한글성경에서는 성령의 권능을 받은 사람이다(행1:8). 자기 판단이 부족한 미숙아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장성한 사람으로써 선악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성령의 권능은 한문성경에서는 성령의 능력(能力.행1:8)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진실한 믿음을 말한다. 진실성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행5:1-8)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거짓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것이다. 자신과 교회와 사도들을 속이지 않는 진실한 믿음! 그것이 바로 성령이 충만한 상태의 믿음인 것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란 성숙한 사람으로써 믿음의 군자(君子)나 덕이 있는 성인(成人.어른)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잠언서 본문(잠29:18)은 하나님의 묵시가 있고 삼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여기에서 율법은 성경을 총괄적으로 보아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묵시를 간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키는 자는 유복(有福)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잠29:18 爲有福위유복). 시편 제1편 1절의 “복있는 사람”란 한문성경으로 “위유복(시1:1 爲有福위유복)”으로 잠언서의 본문과 똑 같은 말로 되어 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유복(有福)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유복(有福)의 복(福)은 행복의 뜻이다. 유복(有福)은 복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有) 자는 타동사 일때는 ‘가지다’라는 뜻이 된다. 여기에서도 ‘행복을 소유하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위유복(爲有福)은 행복을 소유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 된다. 유복(有福)은 유복자(有福者)의 준말이다. 묵시를 간직하고 말씀을 삼가 지키는 자는 ‘행복을 소유한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의 행복이야말로 지극한 축복 곧 지복(至福)이다. 지복(至福)은 그 위에 더 없는 행복을 말하는 것이다. 에덴의 행복, 에덴의 기쁨이다.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행복을 포함하고 또한 초월하는 온전한 행복이다. 그래서 지극한 축복-지극한 행복-지복(至福)인 것이다. 이런 지복(至福)한 자들을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비재천식(菲才賤識)한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한문성경으로 본 말씀묵상>
묵상제목/ 만약 묵시가 없으면
若無黙示(약무묵시)
장상훈목사
한문성경제주연구소장
한글성경
잠언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한문성경
箴言(잠언) 29:18
18若無默示(약무묵시) 民則妄爲(민즉망위) 謹守律法者(근수율법자) 則爲有福(즉위유복)
통문장 이해
18만약(若) 묵시가(默示) 없으면(無) 백성이(民) 곧(則) 제멋대로(妄) 행하거니와(爲) 율법을(律法) 삼가(謹) 지키는(守) 자는(者) 곧(則) 복이(福) 있는 자가(有) 된다(爲)
한글성경과 한문성경 대조
한글성경에서 ‘방자히’가 한문성경에서는 ‘망(妄)’ 자로 되어 있으나 뜻은 같다. 망(妄)은 ‘제멋대로, 함부로’의 뜻이다. 한글성경에서는 한문성경에서 부사로 쓰인 ‘즉(則). 근(謹). 즉(則)’이 없으며 문장 마지막에 ‘위유복(爲有福)’을 한글성경은 ‘복이 있느니라’라고 간략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한글성경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라고 잠언답게 새겼다.
말씀 묵상(默想)
캄캄한 밤 중에 활동하는 올빼미(梟.올빼미 효)라는 새가 있다.
남들이 보지 못할 때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진 새가 올빼미이다. 예나 지금이나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올빼미와 같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어둠 속에 깊이 잠들어 있을 때에 올빼미와 같이 두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잠잠히 알게 해 주신다. 이것을 성경은 묵시(默示)라고 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역사의 밤이 짙어 갈 때에 역사의 현실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묵시를 깨달아 백성들에게 예언을 선포했다. 오늘의 현실에서도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깊은 밤 중에 올빼미와 같은 통찰력을 가지고 혼자서 조용히 사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찾는 사람들이야 말로 오늘의 예언자들이다.
어두운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올빼미와 같은 통찰력을 가진 오늘의 예언자들의 예언이 바로 이 시대를 일깨우는 언론이며 목회자들의 설교이다. 하나님의 묵시를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혼자 있는 것이 결코 외로운 것이 아니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홀로 조용히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고 들은 바의 묵시를 기록한 책이 묵시록(요한계시록)이 아니던가?
묵시(默示)라는 말은 한문성경에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묵시(默示)의 묵(黙) 자는 ‘칠흑 같이 밤이 어두워(黑: 검을 흑) 개(犬: 개 견) 마져 자고 짖지 않으니 더욱 <고요하다>, <침묵하다>’의 뜻이다. 시(示) 자는 하늘(二: <-上)에서 해와 달과 별(小: <-日,月,星을 뜻함)이 비추어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미리 <보이다>의 뜻이다.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시신사야(示神事也)” 즉 ‘신(神)의 일을 보이는 것이다’ 라고 했다. 시(示)는 ‘보이다’라는 뜻이 있지만 ‘알려 주다, 지시하다, 가르치다’ 등의 뜻도 있어서 묵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려 주다, 지시하다, 가르치다’ 등의 뜻이기도 하다. 사전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계시를 내려 그의 뜻이나 진리를 알게 해주는 일이다.
그런면에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묵시는 100세에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와 언약을 세워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以爲永約이위영약-영원한 언약이 되리라)”라고 했던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바치므로써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은 민족이 되어(창22:17) 천하 만민이 너로 복을 받으리라(창22:18)고 한, 이 언약이 믿음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었던 것이다.
요셉에게 하나님의 묵시은 꿈이었다(창37:5 約瑟得夢요슬득몽-요슬(요셉)이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을 모든 형들에게 말하였다고 했다(창37:5 述於諸兄술어제형-모든 형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단을 묶을 때 내 단은 일어나서 서있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창37:7)”라고 했다. 요셉이 또 꿈을 꾸었다(창37:9 我又得一夢아우득일몽-내가 또 한 꿈을 꾸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는 꿈이라고 형들에게 또 말했다. 요셉의 어린 시절의 꿈은 장차 그에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묵시(默示)였다. 요셉은 스스로 소중하게 간직해야할 하나님의 묵시(꿈)를 형들에게 두 번이나 다 말하였고 그로 인해서 형들로부터 혹독한 시련을 당했다. 그러나 요셉은 묵시(默示)로 인하여 자신의 삶을 단속하였고 시련이나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거나 방자하게 굴지 않았다. 결국에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형들의 절을 받았다. 요셉에게 있어서 어린시절의 꿈은 성장 과정과 시련의 고비마다 자신을 단속할 수 있는 하나님의 묵시가 되었던 것이다.
신약성서 마태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은 꿈 속에서 하나님의 묵시를 깨닫고(마2:12 博士於夢中得默示박사어몽중득묵시. 득(得)은 깨닫다의 뜻이다. 꿈 속에서 박사들이 묵시를 깨닫고) 묵시대로 헤롯에게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고향에 돌아갔다. 하나님의 묵시를 따른 것이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꿈에 하나님의 묵시를 깨닫고(마2:22 夢中得黙示몽중득묵시-꿈 속에서 묵시를 깨닫고) 그 묵시를 따라 갈릴리 지방으로 가서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살았다. 하나님의 묵시를 따른 것이다. 한문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양치기 소년이었던 목동 다윗의 묵시는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비전이었다.
사무엘상 16:13절에서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다윗에게 부었는데 이날 이후로(삼상16:13 自此日後자차일후-이 날 이후부터) “주의 신이 다윗에게 감동하였다(삼상16:13 主之神感大衛주지신감대위. 대위는 다윗의 음역이다. 주의 신이 다윗에게 감동하였다)”라고 했다. 다윗에게 장차 왕이 되는 비전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하나님의 묵시였다. 이 날 이후로 다윗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묵시를 평생 간직했고 그 묵시로 자신을 단속하였고 고비마다 자신에게 감동을 준 하나님의 영을 의지했다. 다윗은 그 묵시가 이루어지기까지 수 많은 시련과 역경의 세월을 이겨내야만 했다. 그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자신을 단속하며 하나님의 영을 철저하게 의지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여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을때에도, 나단 선지자에게 먼저 그 밤에 주의 묵시가 있었고(삼하 7:4 是夜主黙示拿單曰시야주묵시나단왈-그 날 밤에 주의 묵시가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나단은 이 묵시를 쫓아서 다윗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영이 감동하는 묵시었기 때문에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질책을 거절할 수 없었다. 마침내 다윗은 눈물이 침상을 젖기까지 회개할 수 있었다. 다윗의 왕권을 보존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도 항상 하나님의 영의 묵시가 그와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모세가 평생 동안 간직했던 묵시라고 한다면 출애굽기 3:2절에서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타지 아니하는 불꽃 안에서 나타나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타지 아니하는 불꽃은(출3:2 荊棘爲火所焚而不燬형극위화소분이불훼-가시나무에 불이 타는 바가 되었으나 (가시나무가)타지 아니하는 불꽃)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보았던 단 한 번의 과거형 불꽃이 아니라 모세의 일생에 꺼지지 아니하고 작용하는 현재형 불꽃이 되었다. 악의 세력이 강할수록 모세의 열정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애굽의 바로 왕도 모세의 열정의 불꽃을 진화할 수는 없었다. 학대(虐待) 받는 백성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탈출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까지 광야 40년의 여정도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열정이 모세에게 현재형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그 엄청난 구원과 해방의 기나긴 여정을 감당할 수 있었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현재형 열정은 평생동안 모세로 하여금 모세가 되게 했던 것이다. 모세는 그런 현재형 열정의 불꽃을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물려 주고 자신은 불꽃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모세에게는 무덤도 없다.
한문성경에서 예언자들에게 묵시는 예언이었다.
이사야는 “묵시를 깨달아 유대와 예루살렘에 예언했다(사1:1 得默示 論猶大及耶路撒冷득묵시 론유대급야로살랭-야로살랭은 예루살렘의 음역이다. 묵시를 깨달아 유대와 예루살렘에 예언했다)”라고 되어 있다. 이사야는 주의 성전에서 주의 영의 감동을 받았으며 주의 묵시를 깨달아 유대와 예루살렘에 예언했다. 예레미야도 주의 묵시를 깨닫고 예언을 말하였는데(렘1;1 耶利米得主黙示述預言야리미득주묵시술예언-야리미는 예레미야의 음역이다. 예레미야가 주의 묵시를 깨달아 예언을 말하였는데) 유다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재위한지 13년에 “예레미야가 주의 묵시를 깨닫기 시작하여(렘1:2 耶利米始得主之黙示야리미시득주지묵시-예레미야가 주의 묵시를 깨닫기 시작하여)”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재위시 “또 묵시를 깨달았고(렘1:3 亦得黙示역득묵시-또 묵시를 깨달았고)” 요시아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역사의 현장을 통하여 계속해서 하나님의 “묵시를 깨달았다(렘1:3 得黙示득묵시-묵시를 깨달았다)”라고 했다. 예레미야는 단 한번의 묵시로 예언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서 계속적으로 그때 그때 하나님의 묵시를 깨달아 예언을 했다는 것이다. 에스겔은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주의 영의 감동을 받아(겔1:3 蒙感於主之靈몽감어주지영-주의 영에 감동을 받아) 주의 묵시를 깨달았다(겔1:3 得主之黙示득주지묵시-주의 묵시를 깨달았다)”라고 했다. 예언자들에게 있어서는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묵시의 깨달음이 있었고 이 묵시가 예언활동의 확실한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한문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구약 소예언서에서는 한결같이 “得主之默示(득주지묵시). 주의 묵시를 깨달아.호1:1.욜1:1.암1:1.옵1:1.미1:1.나1:1.합1:1.)”라고 하여 “주의 묵시를 깨달아” 예언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처럼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묵시가 있었기 때문에 그 묵시를 근거로 하여 예언하였으며 그리고 그들의 삶은 올곧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혀 방자하게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묵시가 예언자들의 예언과 그들의 삶을 단속하였고 삼가 근신하게 하였고 홀로 있을 때에도 하나님과 하나님이 깨닫게 하여 주시는 묵시만을 주시하였다. 예언자들이 수 많은 시련과 극심한 박해를 참아낼 수 있었던 것도 그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묵시가 늘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언자들은 시대를 구원할 하나님의 묵시를 자신들의 목숨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고 살았다. 철저한 역사의식이 있었고 시대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과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예언자들의 묵시었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묵시가 없이 방자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묵시를 예언함으로써 시대를 일깨워서 토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문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의 묵시는 예언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묵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묵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하는 자의 시험을 이기신 것도 하나님의 말씀 즉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신8:3)”라는 말씀의 묵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묵시는 개인적인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惟義者 以信得生유의자 이신득생)”라는 이 말씀은 하박국과 바울과 루터에게까지 전율하는 말씀의 묵시가 되었다. 그들을 전율시킨 이 말씀의 묵시가 하박국은 예언자로, 바울은 이방인의 빛으로, 루터는 종교개혁자로 나서게 하였던 것이다. 이 처럼 말씀의 묵시가 평범한 사람들을 변화시켜 위대하게 하고 역사와 낡은 시대를 개혁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일하게 하셨다. 이와 같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3:16)”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묵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 맨 마지막 성경인 <<요한계시록>>이 한문성경에는 <<묵시록(黙示錄)>>으로 되어 있다. 요한이 받은 묵시이기 때문이다. 계시(啓示)라는 말은 ‘열 계(啓)’ 자에 ‘보일 시(示)’ 자로 ‘열어 보인다’라는 뜻이다. 창문의 커튼을 열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준다는 의미이다. 계시나 묵시는 하나님께서 깨닫도록 알게 해 주신다는 데에는 그 뜻이 같다. 요한도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묵시를 깨달았던 것이다.
<<묵시록(黙示錄.요한계시록)>>은 무슨 책인가? 1장 1절에서 “야소기독지묵시(耶穌基督之黙示)”라고 한문성경은 밝히고 있다. “야소기독(耶穌基督)”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차한 음역이다. 묵시는 그냥 묵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라고 단정하여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묵시는 일반적인 묵시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라고는 할 수 없다. 묵시의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도 예수 그리스도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묵시하는 것이다.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해서 마지막 인사를 빼고 나면 22장 20절에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主耶穌歟(주야소여) 切願爾至(절원이지)-주 예수여 너희에게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나이다)”로 마치고 있다. ‘야소기독(耶穌基督)’이 묵시록의 핵심이며 묵시의 처음과 나중이며 묵시의 참 주제이다. 예수님를 떠난 묵시는 성경적인 참 묵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묵시를 함부로 말하고 들으면 안되는 것이다. 성경을 떠난 사사로운 묵시는 오히려 그런 묵시가 사람을 방자하게 하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사사로운 체험이나 묵시를 절대화하면 성경을 거스리는 오류에 빠지게 되는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묵시라고 해서 함부로 말하고 듣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논어에서도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불언(不言)”이라는 말을 했다.
논어 술이편에서 ‘불언괴력난신(不語怪力亂神)’ 즉 ‘괴이한 일과 엄청난 힘과 어지러움과 귀신을 말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일상적인 것을 말하고 괴이한 것을 말하지 않으며 덕을 말하고 폭력을 말하지 않으며 질서 있는 다스림을 말하고 어지러운 반란은 말하지 않으며 사람을 말하고 사람을 현혹시키는 귀신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 사람들은 과학적인 최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괴력난신(怪力亂神)의 현상에 호기심을 가지고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고 그것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도 알 수 없고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전혀 확인되지 않은 괴이하고 이상한 현상에 우리의 삶을 맡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 세계가 모두 하나님의 신비덩어리이기 때문에 논어에서도 괴력난신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분명하게 하나님의 영역이 있고 인간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논어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정답이 없는 미궁의 세계를 개인적인 체험을 내세워 사실인 것처럼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예레미아 23:16절에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날조된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을 듣지 말라고 전제하고 그들은 헛된 것을 가르치고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성경적인 객관성과 역사성이 없는, 사사로운 개인적인 묵시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한글성경은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렘23:16)”이라고 했다. 한문성경의 표현이 더 명확하다. “所言默示(소언묵시) 由己心所捏造(유기심소날조).렘23:16)” 즉 ‘그들이 말하는 바의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아 날조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성경적인 객관성과 역사성이 없이 개인적으로 날조된 묵시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날조(捏造)란 무엇인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런 날조된 묵시를 엄격하게 경계한 것이다. 에스겔 예언자도 거짓말로 예언하는 여자들을 경계했다. 에스겔은 거짓 선지자들의 종말을 확신하면서 에스겔 12:24절, 13:9절, 13:23절에서 무려 세 번이나 ‘허탄한 묵시’의 종말을 예언하였다. 한문성경에는 “허위지묵시(虛僞之默示.겔12:24)” 즉 ‘거짓으로 꾸며 낸 묵시’라고 했고 “망탄지묵시(妄誕之默示.겔13:9)” 즉 ‘거짓으로 남을 현혹시키는 묵시’라고 했으며 “망언지묵시(妄言之默示.겔13:23)” 즉 ‘거짓말로 된 묵시’라고 했다. 속에 진실이 없는 날조된 허탄한 묵시는 그 실체가 거짓으로 들어나서 자연적으로 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언자 에스겔은 역사의 진실의 힘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되고 날조된 허탄한 묵시는 역사의 진실 앞에서 소멸되고 말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예레미아애가 2:14절에서도 “헛된 말과 어리석은 말로 묵시를 삼는 것(虛言狂詞허언광사 以爲黙示이위묵시)”를 엄히 경계하고 있다.
에스겔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너희가 다시는 허탄한 묵시를 보지 못하고 점복도 못할지라 내가 내 백성을 너희 손에서 건져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겔13:23)”라고 했다.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될 때에는 허탄한 거짓 묵시와 길흉화복을 점치는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일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묵시를 제멋대로 함부로 말하지도 않고 점쟁이의 말이나 묵시를 함부로 듣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예언자 에스겔은 허탄한 묵시와 거짓된 점복의 종말을 확신하고 있었다.
예언이 묵시이고 묵시가 예언이다. 성경의 예언서는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서(卜筮)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묵시를 깨달은 선지자들의 역사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선지자나 예언자라는 말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역사의 미래를 먼저! 그리고 미리 보고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말은 역사의 미래를 열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득권자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고 예언자들은 숱한 고난과 핍박을 받았던 것이다. 결국 저들의 예언의 마지막 포인트는 메시아로써 예수 그리스도였다. 구약의 예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하나님의 묵시인 것이다.
잠언 29:18절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함부로, 제멋대로’ 행동하여 방자하게 되는 것은 묵시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방자(放恣)라는 말은 요지음은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한글성경에 “방자하게 행하거니와”라는 뜻이 한문 성경에서는 “망위(妄爲)”로 되어 있다. 즉 ‘망령되게 행동한다’라는 의미이다. 묵시가 없으면 사람들이 망령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한글성경의 “방자(放恣)”는 ‘어려워하거나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없이 무례하고 건방지다’라는 뜻이다. 제멋대로 거리낌이 없이 놀아나는 태도이다. 묵시가 없으면 사람들이 건방지게, 제멋대로, 함부로 행동하여 방자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탄없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중용(中庸)의 소인배(小人輩)와 같다. 중용(中庸)이라는 책의 제2장에 보면 “군자는 중용을 지키고(君子中庸군자중용) 소인은 중용에서 어긋난다(小人反中庸소인반중용)”라고 전제하고 군자는 때와 상황에 알맞게 말하고 행동하는 ‘시중(時中.때에 알맞게 하다)’인 반면에 소인배(小人輩)는 때와 상황에 관계없이, 기탄없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한다(無忌憚무기탄)는 것이다. 염치(廉恥)를 모르고 부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수치감을 모른다. 묵시가 없는 백성은 중용의 소인배(小人輩)와 같은 것이다.
나에게는 묵시가 있는가? 오늘도 나 자신을 깊이 살펴 본다.
아브라함과 같은 하나님의 언약이, 구약의 요셉과 신약의 동방박사와 요셉과 같은 하나님의 묵시라고 할 수 있는 꿈이 있는가? 구원과 해방에 대해서 모세와 같은 불타는 열정이 있는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내 안에 하나님의 열정이 항상 현재형으로 타오르고 있는가? 어두운 이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예언이 있는가? 인생의 좌우명과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자신을 언제나 삼가 단속하고 자신의 삶을 삼가 근신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있는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묵시가 있는가? 나는 항상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고 있는가?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셔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을 단속하고 있는가? 이런 사람을 성경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란 한글성경에서는 성령의 권능을 받은 사람이다(행1:8). 자기 판단이 부족한 미숙아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장성한 사람으로써 선악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성령의 권능은 한문성경에서는 성령의 능력(能力.행1:8)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진실한 믿음을 말한다. 진실성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행5:1-8)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거짓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것이다. 자신과 교회와 사도들을 속이지 않는 진실한 믿음! 그것이 바로 성령이 충만한 상태의 믿음인 것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란 성숙한 사람으로써 믿음의 군자(君子)나 덕이 있는 성인(成人.어른)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잠언서 본문(잠29:18)은 하나님의 묵시가 있고 삼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여기에서 율법은 성경을 총괄적으로 보아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묵시를 간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키는 자는 유복(有福)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잠29:18 爲有福위유복). 시편 제1편 1절의 “복있는 사람”란 한문성경으로 “위유복(시1:1 爲有福위유복)”으로 잠언서의 본문과 똑 같은 말로 되어 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유복(有福)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유복(有福)의 복(福)은 행복의 뜻이다. 유복(有福)은 복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有) 자는 타동사 일때는 ‘가지다’라는 뜻이 된다. 여기에서도 ‘행복을 소유하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위유복(爲有福)은 행복을 소유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 된다. 유복(有福)은 유복자(有福者)의 준말이다. 묵시를 간직하고 말씀을 삼가 지키는 자는 ‘행복을 소유한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의 행복이야말로 지극한 축복 곧 지복(至福)이다. 지복(至福)은 그 위에 더 없는 행복을 말하는 것이다. 에덴의 행복, 에덴의 기쁨이다.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행복을 포함하고 또한 초월하는 온전한 행복이다. 그래서 지극한 축복-지극한 행복-지복(至福)인 것이다. 이런 지복(至福)한 자들을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비재천식(菲才賤識)한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