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궁극적 관심

권명수박사(햇살영성심리 상담연구소장)


 신앙인의 궁극적 관심 

대한민국 사회는 후기 정보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곧 무선통신과 인터넷의 발달로 5G 시대는 말할 것도 없이 6G 시대의 진입을 말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자율 주행과 메타버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블록체인을 이용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비대면 국면이 일상화되어 대한민국을 정보화 사회로 옮겨가고 있다.

이런 사회적, 문화적 상황이 종교에 미치는 영향은 심각하다. 필자는 출석하는 교회에 예약 후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많은 교회가 거리두기로 인해 햇수로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회의 공적 예배가 위축되어 있고, 비대면 화상 예배로 대치하고 있다. 작은 교회나 지방 교회는 이마저도 못하고 전화로 안부를 묻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이제 교회는 코로나19 상황이 완화된다 해도, 교인들의 교회 출석이 긴 공백 시간의 영향으로 성도들에게 어둔 영향을 줄 것이라며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도 어느 정도 동의하며, 이를 성찰하게 되었다.

교회는 장기간의 코로나 대유행과 정보 기술 문명의 홍수 앞에서 교인의 영혼과 신앙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가늚이 되지 않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신앙인들이 지켜온 전통적인 가치가 흔들려 풍전등화와 같은 위치에 있는지, 아니면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어렵겠지만 소망을 제공할 수 있는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런 사회적 위기에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심각한 성찰이 필요하다. 요즈음 나의 궁극적 관심(the ulimate concern)은 무엇인가? 재물, 지위, 명예, 하나님, 영원한 진리,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엄청난 힘으로 경험되며 다가올 것이다. 예전에 신앙이 뜨거웠고 하나님 체험을 강하게 했다 할 지라도 이에 만족하지 말고, 이에 대해 신학적 고찰이 필요하다. 그것이 아직도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따져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악마적인 것을 체험하고서도 하나님 체험이라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개인의 주관과 개성이 강조되는 이 시대 풍조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냐는 우리 속담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하는 데 위험 요소가 있다고 해서 이것을 회피하려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이는 세상 일에 너무 소극적으로 임하며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부족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태도는 조만간 태어날 아기에 대해 걱정이 많은 엄마와 비슷하다. 엄마는 요즘같이 험한 세상에 태어나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고 입시 지옥에 시달릴 것을 염려하다가 종국에는 출산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대는 삶을 의미있게 해주시는 그 분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 했는가? 이에 대한 긍정적 대답이 망설여진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 가까이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의 영적 시력에 적절한 안경을 바꿔 쓰고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된다. 신앙인의 밑바닥에 가장 중요하게 버티고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 분에 대한 생생한 체험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하다. 교리와 지식이 강조된 신앙생활에서, 인간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분을 볼 수 있는 안경이 필요하다. 이제까지 주로 사용해온 머리 중심의 분석적 논리의 안경으로는 삶 속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계셔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에는 미흡한 면이 많다. 우리의 시력이 교리 위주의 사고에서 하나님 체험 위주로 삶이 바뀌어야 한다. 윤리 위주의 관심에서 체험을 중시하는 신앙적 사고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교회사를 보면 교리나 윤리 중심의 신앙 생활로 교회가 외적인 교회 의식을 중시할 때 마다 이에 대한 반동이 일어났다. 곧, 개인의 감정과 체험을 강조하는 낭만주의 신앙이 일어났다. 진첸도르프의 재세례파운동, 감리교의 요한 웨슬레, 퀘이커 등이다.

필자의 요점은 성스러움의 체험, 하나님 체험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고도의 세속의 과학 기술 문명의 영향으로 신앙인의 궁극적 관심의 초점이 흐릿해질 때에는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스러움의 하나님 체험이 우리 삶 속에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삶에서 하나님 체험을 풍부히 하며, 이런 신학의 일차 자료에 대한 고찰로 신학화 작업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신자의 윤리적 행위를 추동시킬 충분한 원동력을 끌어 올 수 있게 된다.

하나님 임재와 궁극적 관심에 몰입되어 충만한 상태, 곧 존재의 심층적 차원에 연결되어 살아가는 삶, 이성의 영역을 넘어 평온의 미래를 가져오는 삶이 요구된다. 이것이 급변하는 디지털 기술 문명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귀한 신앙 여정의 도상에서 함께 도는 닦는 벗들의 건투와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