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훈논설위원
한문성경연구소장
향산거목관망(向山擧目觀望.시121:1)
산을 향하여 눈을 들어 바라 보니
한글성경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어호와에게서로다. 시12:1-2.
한문성경
我向山擧目觀望曰 我之救濟 自何而來 我之救濟 自創造天地之主而來(아향산거목관망왈 아지구제 자하이래 아지구제 자창조천지지주이래). 시121:1-2.
해설(解說)
시편 시인은 산을 바라보면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라고 생각했다. 논어 옹야편에서는 산과 함께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서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동(知者動) 인자정(仁者靜) 지자락(知者樂) 인자수(仁者壽)”라는 말을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 여기에서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이 유래하였다. 산을 바라보며 순자는 권학편서 “적토성산 풍우흥언(積土成山 風雨興焉.순자권학편1-23)” 즉 ‘흙을 쌓아 높은 산을 이루면 비바람이 일어 난다’라고 했다. 그렇듯 사람도 학문과 덕을 쌓고 쌓고 쌓아야만 덕인(德人)이 될 수 있고 덕인이 되면 교화(敎化)가 자연히 일어나게 된다. 사람이 공을 세울 수 있는 것은 매일 매일 멈추지 않는데 있다. 작은 시내를 모으지 않으면 강과 바다를 이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한걸음 한 걸음씩 쌓아 가지 않으면 천 리까지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흙을 쌓아 높은 산을 이루듯이 사람은 선행을 쌓아 덕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덕(德)과 관련하여 사도바울은 “지자대 애건덕(知自大 愛建德.고전8:1)” 즉 “지식은 스스로를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우느니라(고전8:1)”라고 말했다. 사랑은 선행이다. 덕(德)은 집의 기둥과 같아서 덕이 무너지면 개인도 교회도 무너진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법치(法治) 보다 예치(禮治)로 다스려야 하는데 예치가 바로 덕치(德治)이다. 하는 것이 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덕인의 덕치는 말 없이 잘 다스려진다. 이것을 장자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했다.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이다. 꾸밈없이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것이 최상의 선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자연은 노자는 “유무상생(有無相生.도덕경2장)”한다고 했다. 유(有)와 무(無)가 서로 살게 해 준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자연의 존재 방식이다. 산이 높으면 큰 바람이 일어나고 물이 깊으면 도룡이 생성한다. 믿음이 높은 덕산(德山)은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고 믿음의 깊은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이 된다. 그래서 요한은 복음서에서 성덕광휘(盛德光輝)하신 예수께서 주시는 물은 “영불갈(永不渴.요4:14)” 즉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4:14)”라고 했다.
자전(字典)에 따르면 원래 시(詩)란 言(말씀 언)을 따르고 寺(모실 시)가 소리인 글자이다. 시경(詩經) 서(序)에서 주자는 “시자지소지야(詩者志所之也) 재심위지(在心爲志) 발언위시(發言爲詩)” 즉 ‘시(詩)란 뜻이 가는 것인데 마음이 있으면 뜻이 되고 말을 하면 시(詩)가 된다’라고 했다. 인성(人性)은 바뀌기가 쉬워서 “가악가선(可惡可善)” 즉 악해 질 수도 선해 질 수도 있기 때문에 묵자는 실이 물드는 것을 슬펴했다. 사도바울도 “너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롬12:2)”고 로마서에서 말했다. 시경(詩經)에서는 시인의 절검정직(節儉正直)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것을 주흥사라는 사람은 천자문에서 “묵비사염(墨悲絲染) 시찬고양(詩讚羔羊)”이라고 사자성어로 줄여 말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한 묵자는 근검하고 간소한 생활을 권장했고 시경(詩經)에서도 고양편(羔羊篇)에서 절검정직(節儉正直)을 강조했다. 지나친 치장을 경계한 말이다. 논어 옹야편에서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말을 했다. 여기에서 문(文)은 문장, 형식, 꾸밈의 뜻이고 질(質)은 내용. 바탕. 본질이다. 빈빈(彬彬)은 잘 어우러진 모습이다. 바탕이 꾸밈을 이기면 야(野)해져서 촌스럽고 꾸밈이 바탕을 이기면 꾸밈이 넘쳐서 호화스럽게 된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자신이 쓴 논어고금주에서 문질(文質)의 관계는 조화와 균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마23:23)”고 하셨다. 여기에서 ‘이것’은 형식적인 율법의 조문인 ‘십일조’를 의미하고 ‘저것’은 율법의 형식 보다 더 중요한 “의여인여신(義與仁與信.마23:23)” 즉 ‘정의와 인애와 믿음’이다. 이것이 율법의 본질이다. 십일조는 축복의 방편이 아니라 율법의 본질인 “의인신(義仁信)”을 실천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조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마23:23)”라고, 율법의 형식과 본질의 조화와 균형을 말씀하셨다. 복음서에서는 형식 보다 더 중요한 율법의 본질인 “의인신(義仁信)”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의 상황이 본질을 상실하고 형식에만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복음의 정신은 형식 보다 언제나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문질(文質)의 관계에서 사도바울도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여화여락(義與和與樂.롬14:17)” 즉 ‘정의와 화목과 즐거움’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겉으로 나타나는 형식은 ‘먹고 마시는 것’이지만 그 본질은 ‘의화락(義和樂)’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성령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를 피상적인 은사에서 찾지 않고 성령의 은사의 본질인 ‘의화락(義和樂)’에서 찾았던 것이다.
율법의 본질이 ‘의인신(義仁信)’에 있으며 성령의 은사의 본질이 ‘의화락(義和樂)’에 있듯이 마찬가지로 시(詩)에도 형식 보다 더 중요한 시(詩) 본래의 정신이 있다. 동양에 주희는 그가 지은 시전(詩傳) 서문(序文)에서 “시(詩)는 왜 지어졌는가”라고 질문하고 그것은 “만물에 느끼어 감동하는 인성의 욕구(感於物而動 性之欲也.시전서문)”가 있어서 만물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묻고 탄식하고 읊고 기뻐하는 말을 인간은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소리가 울려 펴지고 가락에 절도가 있기 때문인데 이것을 주희는 “음향절주(音響節族.族:가락 주.시전서)”라고 말했다. 사람은 이에 능히 그만 두지 못하여 이것을 시(詩)로 쓴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논어 계씨편과 양화편에서는 사람이 시(詩)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다고 전제하고 시(詩)를 배우지 않으면 사람이 담장을 마주 보고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주희는 사람의 마음이 만물에 느껴서 말로 형용하는 것에는 “사정(邪正:사악함과 바름)”이 있고 “시비(是非.옳고 그름)”이 있기 때문에 시(詩)를 배우는 사람은 “선자사지 악자개언(善者師之 惡者改焉.시전 서)” 즉 ‘선한 것을 스승 삼고 악한 것을 고치는 것이다’라고 했다. 시경(詩經) 전체의 뜻을 논어에서는 “사무사(思無邪)”라고 했는데 주희는 시전(詩傳) 서(序)에서 “진선폐사지의(陳善閉邪之意.시전 서)” 즉 “선을 베풀어 주고 간사함을 막아내는 뜻” 이것이 “시(詩)의 벼리”가 된다고 했다. 시(詩)의 큰 뜻을 배워서 얻는 것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道)를 얻는 것이라고도 했다.
다산 당시 조선에서는 주로 외래시만 외워 쓰던 시기에 “나는 조선인의 시를 쓰겠다”고 했던 민중시인 다산 정약용은 시(詩)로 사회정의를 포호했는데 지금도 그 시(詩)를 읽는 독자들에게 심금(心琴)을 울려 주고 있다. 다산은 시(詩)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시(詩) 3천여편을 305편으로 정리한 공자는 시경(詩經)을 한 마디로 총괄하면 “사무사(思無邪)”라고 했다.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논어 위정편에서 “시삼백(詩三百)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왈사무사(曰思無邪)” 즉 ‘시경(詩經) 삼백편을 한 마디로 총괄하여 말하면 생각에 간사함이 없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시삼백(詩三百)은 시(詩)의 대략적인 숫자만 말한 것이다. 시경의 시(詩)는 실제로는 모두 311편이다. 시경에 있는 모든 시(詩)의 본질은 한 마디로 “사무사(思無邪)”인데 그것은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는 뜻이다. 생각에 간사함이 없는 것! 이것이 모든 시(詩)의 본질이며 바탕이다. 사무사(思無邪)를 성경(聖經) 시편에서는 “정직과 진실한 마음(正直 誠心.시15:2)”이라고 했다. 그래서 다윗은 성실과 정직으로 살아가겠으니 성실과 정직이 자신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誠實 正直.시25:21). 시경이나 시편은 간사함이 없는 정직과 진실을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다. 사람이 지적인 수준을 향상 시켜서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시인(詩人)’이 된다. 시인(詩人)은 최고로 높은 지적 수준을 가진 사람이다. 지적으로 매우 높은 생각을 사유(思惟)라고 한다. 사유(思惟)는 잡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이다. 시인(詩人)은 ‘사유(思惟)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으로 사는 사람이다. 인간은 왜 지적인 높은 단계에서 사유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렇게 해야만 사람은 천지 자연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속에서 사실과 진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성경의 시편과 동양의 시경을 함께 읽는 까닭이기도 하다.
장상훈논설위원
한문성경연구소장
향산거목관망(向山擧目觀望.시121:1)
산을 향하여 눈을 들어 바라 보니
한글성경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어호와에게서로다. 시12:1-2.
한문성경
我向山擧目觀望曰 我之救濟 自何而來 我之救濟 自創造天地之主而來(아향산거목관망왈 아지구제 자하이래 아지구제 자창조천지지주이래). 시121:1-2.
해설(解說)
시편 시인은 산을 바라보면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라고 생각했다. 논어 옹야편에서는 산과 함께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서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동(知者動) 인자정(仁者靜) 지자락(知者樂) 인자수(仁者壽)”라는 말을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 여기에서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이 유래하였다. 산을 바라보며 순자는 권학편서 “적토성산 풍우흥언(積土成山 風雨興焉.순자권학편1-23)” 즉 ‘흙을 쌓아 높은 산을 이루면 비바람이 일어 난다’라고 했다. 그렇듯 사람도 학문과 덕을 쌓고 쌓고 쌓아야만 덕인(德人)이 될 수 있고 덕인이 되면 교화(敎化)가 자연히 일어나게 된다. 사람이 공을 세울 수 있는 것은 매일 매일 멈추지 않는데 있다. 작은 시내를 모으지 않으면 강과 바다를 이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한걸음 한 걸음씩 쌓아 가지 않으면 천 리까지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흙을 쌓아 높은 산을 이루듯이 사람은 선행을 쌓아 덕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덕(德)과 관련하여 사도바울은 “지자대 애건덕(知自大 愛建德.고전8:1)” 즉 “지식은 스스로를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우느니라(고전8:1)”라고 말했다. 사랑은 선행이다. 덕(德)은 집의 기둥과 같아서 덕이 무너지면 개인도 교회도 무너진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법치(法治) 보다 예치(禮治)로 다스려야 하는데 예치가 바로 덕치(德治)이다. 하는 것이 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덕인의 덕치는 말 없이 잘 다스려진다. 이것을 장자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했다.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이다. 꾸밈없이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것이 최상의 선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자연은 노자는 “유무상생(有無相生.도덕경2장)”한다고 했다. 유(有)와 무(無)가 서로 살게 해 준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자연의 존재 방식이다. 산이 높으면 큰 바람이 일어나고 물이 깊으면 도룡이 생성한다. 믿음이 높은 덕산(德山)은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고 믿음의 깊은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이 된다. 그래서 요한은 복음서에서 성덕광휘(盛德光輝)하신 예수께서 주시는 물은 “영불갈(永不渴.요4:14)” 즉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4:14)”라고 했다.
자전(字典)에 따르면 원래 시(詩)란 言(말씀 언)을 따르고 寺(모실 시)가 소리인 글자이다. 시경(詩經) 서(序)에서 주자는 “시자지소지야(詩者志所之也) 재심위지(在心爲志) 발언위시(發言爲詩)” 즉 ‘시(詩)란 뜻이 가는 것인데 마음이 있으면 뜻이 되고 말을 하면 시(詩)가 된다’라고 했다. 인성(人性)은 바뀌기가 쉬워서 “가악가선(可惡可善)” 즉 악해 질 수도 선해 질 수도 있기 때문에 묵자는 실이 물드는 것을 슬펴했다. 사도바울도 “너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롬12:2)”고 로마서에서 말했다. 시경(詩經)에서는 시인의 절검정직(節儉正直)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것을 주흥사라는 사람은 천자문에서 “묵비사염(墨悲絲染) 시찬고양(詩讚羔羊)”이라고 사자성어로 줄여 말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한 묵자는 근검하고 간소한 생활을 권장했고 시경(詩經)에서도 고양편(羔羊篇)에서 절검정직(節儉正直)을 강조했다. 지나친 치장을 경계한 말이다. 논어 옹야편에서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말을 했다. 여기에서 문(文)은 문장, 형식, 꾸밈의 뜻이고 질(質)은 내용. 바탕. 본질이다. 빈빈(彬彬)은 잘 어우러진 모습이다. 바탕이 꾸밈을 이기면 야(野)해져서 촌스럽고 꾸밈이 바탕을 이기면 꾸밈이 넘쳐서 호화스럽게 된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자신이 쓴 논어고금주에서 문질(文質)의 관계는 조화와 균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마23:23)”고 하셨다. 여기에서 ‘이것’은 형식적인 율법의 조문인 ‘십일조’를 의미하고 ‘저것’은 율법의 형식 보다 더 중요한 “의여인여신(義與仁與信.마23:23)” 즉 ‘정의와 인애와 믿음’이다. 이것이 율법의 본질이다. 십일조는 축복의 방편이 아니라 율법의 본질인 “의인신(義仁信)”을 실천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조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마23:23)”라고, 율법의 형식과 본질의 조화와 균형을 말씀하셨다. 복음서에서는 형식 보다 더 중요한 율법의 본질인 “의인신(義仁信)”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의 상황이 본질을 상실하고 형식에만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복음의 정신은 형식 보다 언제나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문질(文質)의 관계에서 사도바울도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여화여락(義與和與樂.롬14:17)” 즉 ‘정의와 화목과 즐거움’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겉으로 나타나는 형식은 ‘먹고 마시는 것’이지만 그 본질은 ‘의화락(義和樂)’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성령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를 피상적인 은사에서 찾지 않고 성령의 은사의 본질인 ‘의화락(義和樂)’에서 찾았던 것이다.
율법의 본질이 ‘의인신(義仁信)’에 있으며 성령의 은사의 본질이 ‘의화락(義和樂)’에 있듯이 마찬가지로 시(詩)에도 형식 보다 더 중요한 시(詩) 본래의 정신이 있다. 동양에 주희는 그가 지은 시전(詩傳) 서문(序文)에서 “시(詩)는 왜 지어졌는가”라고 질문하고 그것은 “만물에 느끼어 감동하는 인성의 욕구(感於物而動 性之欲也.시전서문)”가 있어서 만물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묻고 탄식하고 읊고 기뻐하는 말을 인간은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소리가 울려 펴지고 가락에 절도가 있기 때문인데 이것을 주희는 “음향절주(音響節族.族:가락 주.시전서)”라고 말했다. 사람은 이에 능히 그만 두지 못하여 이것을 시(詩)로 쓴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논어 계씨편과 양화편에서는 사람이 시(詩)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다고 전제하고 시(詩)를 배우지 않으면 사람이 담장을 마주 보고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주희는 사람의 마음이 만물에 느껴서 말로 형용하는 것에는 “사정(邪正:사악함과 바름)”이 있고 “시비(是非.옳고 그름)”이 있기 때문에 시(詩)를 배우는 사람은 “선자사지 악자개언(善者師之 惡者改焉.시전 서)” 즉 ‘선한 것을 스승 삼고 악한 것을 고치는 것이다’라고 했다. 시경(詩經) 전체의 뜻을 논어에서는 “사무사(思無邪)”라고 했는데 주희는 시전(詩傳) 서(序)에서 “진선폐사지의(陳善閉邪之意.시전 서)” 즉 “선을 베풀어 주고 간사함을 막아내는 뜻” 이것이 “시(詩)의 벼리”가 된다고 했다. 시(詩)의 큰 뜻을 배워서 얻는 것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道)를 얻는 것이라고도 했다.
다산 당시 조선에서는 주로 외래시만 외워 쓰던 시기에 “나는 조선인의 시를 쓰겠다”고 했던 민중시인 다산 정약용은 시(詩)로 사회정의를 포호했는데 지금도 그 시(詩)를 읽는 독자들에게 심금(心琴)을 울려 주고 있다. 다산은 시(詩)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시(詩) 3천여편을 305편으로 정리한 공자는 시경(詩經)을 한 마디로 총괄하면 “사무사(思無邪)”라고 했다.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논어 위정편에서 “시삼백(詩三百)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왈사무사(曰思無邪)” 즉 ‘시경(詩經) 삼백편을 한 마디로 총괄하여 말하면 생각에 간사함이 없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시삼백(詩三百)은 시(詩)의 대략적인 숫자만 말한 것이다. 시경의 시(詩)는 실제로는 모두 311편이다. 시경에 있는 모든 시(詩)의 본질은 한 마디로 “사무사(思無邪)”인데 그것은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는 뜻이다. 생각에 간사함이 없는 것! 이것이 모든 시(詩)의 본질이며 바탕이다. 사무사(思無邪)를 성경(聖經) 시편에서는 “정직과 진실한 마음(正直 誠心.시15:2)”이라고 했다. 그래서 다윗은 성실과 정직으로 살아가겠으니 성실과 정직이 자신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誠實 正直.시25:21). 시경이나 시편은 간사함이 없는 정직과 진실을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다. 사람이 지적인 수준을 향상 시켜서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시인(詩人)’이 된다. 시인(詩人)은 최고로 높은 지적 수준을 가진 사람이다. 지적으로 매우 높은 생각을 사유(思惟)라고 한다. 사유(思惟)는 잡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이다. 시인(詩人)은 ‘사유(思惟)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으로 사는 사람이다. 인간은 왜 지적인 높은 단계에서 사유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렇게 해야만 사람은 천지 자연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속에서 사실과 진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성경의 시편과 동양의 시경을 함께 읽는 까닭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