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근 목사의 묵상 일침] 교회가 회복해야 할 권세

[송태근 목사의 묵상 일침] 교회가 회복해야 할 권세

신약성경 마태복음 9장에는 한 중풍병자의 치유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이 질병은 ‘중풍병’으로 번역됐지만, 정확하게는 다리가 마비되어 걷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예수님께서 동일한 질병을 앓는 사람들을 치유하신 기록이 성경에 여럿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병은 기적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는 난치병이었던 것 같다.

이 환자가 사람들의 도움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예수님은 그 환자를 치유하시는 대신 ‘죄 용서’를 선언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였다. 이를 지켜보던 서기관들은 ‘신성 모독’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성 모독은 죽어 마땅한 죄였다. 실제로 예수님은 신성 모독 혐의로 십자가를 지셔야 했다.

예수님은 이 환자에게 그저 “일어나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기적을 베푸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굳이 오해와 위협을 받으시면서까지 ‘죄 용서’를 선언하신 것은 예수님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죄 용서의 결과로 평생 마비되고 묶였던 환자가 완전한 활기와 자유를 얻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마태의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리가 이 일을 보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이런 권세를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마 9:8, 새번역) 여기서 ‘이런 권세’란 예수님이 갖고 계신 죄 용서의 권세를 가리킨다. 그런데 마태는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사람들’에게 주셨다고 기록한다. 죄를 용서하고 세상을 치유하는 권세는 인자(人子)이신 예수님을 통해 교회에도 주어진다는 사실을 마태는 암시한 것이었다.

하늘의 권능을 땅에 베푸시는 예수님은 그 권세를 예수님의 교회에도 주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교회에 죄 사함의 권세가 임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의 용서와 긍휼과 빚진 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권세를 죄 사함이 필요한 이 황폐한 땅에 그것을 흘려보내야 한다. 하나님의 덮으심과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용서가 하수같이, 강물같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흘러가야 한다.

이것은 지금 교회가 추구하고 사모해야 할 권세다. 그런데 과연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할수록 우린 무슨 권세를 구하고 있는가. 우리의 기도 언어 속에는 어떤 권능을 사모하고 있다. 내가 예수 믿은 지 지금 20년, 30년인데 아직도 나는 이 땅에서 왜 이 모양으로 살아야 합니까. 이런 것 아닌가. 그것이 소위 ‘능력 종교’다. 이것은 십자가의 가치와 의미와 전혀 맞지 않는 우리의 욕망이다. 성경은 그런 가르침을 우리에게 소개하지 않는다.

우리를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집을 떠나 십자가 대속의 제물로 죽으셔야 했다. 그것이 주님이 마지막까지 놓지 않고 흐트러뜨리지 않고 붙잡으셨던 영광이다. 기독교의 영광은 모든 것을 거머쥐고 권세와 권능으로 세력을 만들어 세상을 휘어잡는 것이 아니다. 이런 권세가 우리 기독교가 추구하는 영광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예수님이 추구했던 영광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로 걸어가신 영광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빛바랜 길이다.

교회가 이 땅에서 행사해야 할 진정한 권세는 용서하고 회복하는 일이다. 여전히 우리는 지루하고 답답하고 어려운 시간을 감당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권세를 기억하자.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던 예수님의 그 길 동반자로서 걸어가자.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 속에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답게, 탄탄히 무너지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길 소망한다.

(삼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