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기도의 불편한 진실

              오세준목사


축복기도의 불편한 진실

 

축복하면 싫어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복을 비는 것이니 누군들 거부하겠는가? 이 때문인지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용어 중 하나가 축복이다. 많은 설교자가 강단에서 말끝마다 축복을 남발하다시피 한다. 강단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헌금하면 축복기도를 얼마나 간절히 하는지 모른다. 심지어 식당에서 음식 대접받을 때도 축복하는 기도를 푸짐하게 한다.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다.

이게 무엇이 문제냐고 이의를 제기할 목회자나 교인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냉철하게 곰곰이 성경적으로 성찰하면, 문제점이 보인다.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바로 이게 문제이다. 축복기도가 왜 문제가 되느냐고 할지 모르나, 축복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관행적으로 하는 축복기도에 불편한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성도에게 복을 비는 것을 누가 나쁘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축복기도의 내용을 보면 비 복음적이라는 것이다. 성도라는 신분은 이미 가장 큰 복인 구원의 복, 영생의 복을 받은 증거이다. 그런데 축복하는 내용을 보면 거의 다 땅에 속한 것이다. 헌금하면 바친 것의 백배 천배의 복을 달라고 간청한다. 식사 대접받으면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기도를 한다. 이런 기도는 헌금을 잘해야 백배, 천 배의 복을 받는다는 논리로 들린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그렇다면 백배, 천 배로 갚아달라는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져야 맞다. 하지만 이렇게 기도한 결과로 재산이 백배, 천 배로 증식된 사람이 과연 있을까?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할지 모르나, 똑같은 조건에서 응답받은 사람이 있고 응답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차별하신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나 차별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다 백 배, 천 배의 복을 받지 못했다면, 잘 못 구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왜 이런 기도를 멈추지 않을까? 복음에 무지하여 그럴 수 있다. 헌금을 복 받는 수단으로 한다면 복음을 모르는 것이다. 헌금은 받은 은혜, 받은 복에 감사하는 표현일 뿐이다. 헌금해서 몇백 배, 몇천 배의 물질이 생긴다면, 이보다 남는 장사가 없고 수익을 내는 투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헌금 잘하는 교인 중에 왜 가난하게 사는 이들이 있을까? 평생 십일조 헌금을 비롯하여 각종 헌금이라는 헌금은 다 했던 교인이 가난하게 사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이런 축복기도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교인의 마음을 사기 위함일 수 있다. 백 배, 천 배 축복하니 얼마나 흐뭇할까? 당장이라도 부자 될 것 같고, 뭔가 잘 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 순간의 느낌일 뿐, 현실은 그게 아니다. 복음에 무지하여 이런 기도를 한다면, 그나마 이해할 측면이 있으나. 알면서 이런 기도를 한다면 고도의 속임수라고 할 수밖에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기도에 익숙한 교인은 복음을 깨닫기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은 뭘 잘해야 복을 받는다는 율법주의, 기복주의 신앙으로 뿌리를 내릴 것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구하지 말라고 했다(마6:31~32). 사도 바울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하게 여기라고 했다(딤전6:8). 이러한 가르침에 비추어봐도 몇백 배, 몇천 배, 갚아달라고 목청을 높이는 기도가 과연 바른 기도인지 분별할 수 있다. 진정한 축복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받은 신령한 복을 누리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구원받도록 기도하는 것이 진정한 축복기도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 안에 만연한 축복기도는 불편한 진실이다. 이제는 축복기도가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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