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신학의 필요성④: 신학과 심층신학 소고

권명수박사 (햇살영성심리 상담연구소장)


심층 신학의 필요성④: 신학과 심층신학 소고

 

인간의 경험, 사건, 질문에 대한 이론적 성찰을 수행하는 신학은 신앙인에게 필수불가결하다. 신앙의 대상인 신비이신 하나님이 오늘의 현실에 계시하심을 인식해감이 신학의 도움이 없이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앙과 신학의 발생 순서가 신앙과 믿음의 행위에 따라오는 사후적인 면이 강하다. 다시 말해 심층신학이 중심적으로 다루는 경외, 놀라움의 경험과 역동성이 먼저 일어나고 신학적 성찰은 후에 오는 작업이어야 한다.

오늘의 신학교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경험과 성찰의 순서가 뒤바뀌고, 이러한 관계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의 미흡으로 오는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면, 신학교에서 2000여 년의 교회 전통, 교리, 교회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공부를 충실히 하게 되면 신학도가 교회가 희망하는 존재가 되는 가에는 필자의 현재까지의 경험으로는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신학교육을 맡은 이들의 고민이 깊다. 이는 단지 한국만이 아니라 서구에서도 신학교육의 갱신에 대한 고민과 함께 새로운 시도들을 해가고 있다.

그렇기에 필자는 심층신학이 다루는 주제인 신앙의 탄생과 목적, 신앙의 심층탐구, 신앙의 외적인 흐름, 믿음의 행위 등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심층신학이 교회의 신앙 생활에서 경시되었음을 반성하고 회복시키고져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의례와 교리가 실제 삶에서 나타날 때의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이런 신앙 경험의 생동성을 논의하는 이론이나 신학을 접해본 적이 있는가?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매우 적었다고 회고한다. 아마도 영성학과 영성지도에서 이러한 주제에 접근하며 연구하고 있는 듯하다.

요즘의 세계는 코로나19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활동에 큰 제약을 주었다.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모이길 자제하고 반강제적으로 홀로 지내는 시간에 익숙하게 되었다. 상당히 고독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한국의 발달된 통신 기기와 세계1위의 인터넷 보급률을 통해서 한국인은 SNS와 영상을 통해 영적 욕구를 일부라도 해소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피할 수 없이 점점 다가오고 있어, 이런 기기문명이 종교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는 가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심도있는 연구와 대응이 필요해진다.

이런 위기 대응에는 정보 유통의 내부 기간망의 구축과 이를 통해 비대면 교육과 화상 예배, 기업 영업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런 정보 통신 기기를 통한 비대면 화상 예배나 활동이 인간의 근본적 영적 욕구를 얼마나 충족할 수 있을까? 답은 당연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던 인류는 자연과의 접촉을 떠나서 영상과 같은 비대면으로 자연과 직접 접촉해서 얻는 느낌과 감성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어찌하랴! 인류의 삶에서 자연과 인간의 대면 접촉의 시대는 점점 줄어들고, 비대면 활동이 점점 많아지는 시대에 살면서 현대인의 삶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머리의 차거움과 가슴의 뜨거움이 공존할 수 있을까? 현재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는 둘 중 어느 것이 더 요구된다고 생각하는가? 어쩌면 이러한 질문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질문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무엇이 먼저든 닭도 알도 모두 필요하다. 인간이 둘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주객 분리적 사고 방식이 문제가 아닐까? 현실은 둘이 다 함께 어울려 존재하고 있는데, 머리 위주의 인간이 머리로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라는 공리 공론적 사고가 인간의 사고 속에 들어와 굳건히 자리잡게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해서 보게 하여, 우리를 더욱 헷갈리게 한다고 말이다. 어느 정도 일리있는 지적이기도 하다.

아니면 사람들이 두 영역 중 자기에게 절박하게 부딪혀오는 주제에 대해 올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기가 경험하고 몰두했던 영역을 현실(reality)의 전부라고 느끼며 이를 다른 이들에게 선전하고 주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국에는 자기처럼 따르라고 다른 이들을 선전, 설득, 강요를 하면서 이에 협조적이지 않으면 힘으로 위협해서라도 억지로 따라오게 하는 것이지 않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 아직 분명치는 않다. 그러나 두 영역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공론보다는 자신이 딛고 있는 자리에 관심을 두면서도 반대편의 가능성도 또한 경시하지 않는 포괄적 사고 경향의 유지가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할 것이다.

사람들은 심층신학에게 거리를 두려고 한다. 왜냐하면 심층신학의 주제가 인간의 언어로 쉽게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막연한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내면의 삶이나 내면성은 어떤 원칙적인 사례와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것에 분류 코드 번호를 매기며 분류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명시화된 삶이나 효능적으로 조직된 영혼은 이들에게서 나올 풍요로운 자원을 메마르게 할 것이다. 내면의 삶이나 영혼은 외부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미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주로 받아온 신학 교육은 신학성찰 위주의 교육이었다. 그래서 늦게사 발견한 부분이 심층신학이라는 분야에 관심 갖고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했음을 반성한다. 그럼 이제까지 공부해온 신학인 예전과 교리 사이에 새롭게 비집고 들어온 심층신학과는 어떤 관계일까? 상보적 관계일까? 아니면 적대적 관계일까?

이를 위해서는 긴 논의가 요구되지만 결론만 간결하게 말하면, 신학과 심층신학은 각자의 발전을 위해 상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심층신학은 신학의 샘물이 되며, 신학은 심층신학의 결실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틈틈이 심층신학의 영역인 예배, 신앙수련회, 기도회 등을 통해서 이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체계적이지 못해서 깊이도 부족했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큰 그림이 없이 그때마다의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이 많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오늘날의 세대는 완연한 탈근대화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개인의 경험을 강조하여 개인의 영성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명상이 종교인, 비종교인을 막론하고 높은 관심을 끌고 있고 지속되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부분이 바로 필자가 다루고 있는 심층신학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아브라함 헤셀은 이미 1960년대에“신학의 근저(bottom)를 통해 심층신학으로 돌파해 들어가는 시대가 도달했다”고 예언했다. 그는 현대의 상황이 심층신학의 존재가 점점 두각을 드러내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1970년대 후반에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당시에 ‘성풍회’라는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와 목회자 집단이 존재하였다. 특히 호남지방의 성풍회는 두 영역에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두 영역이란 기도 운동과 함께 사회의 영역까지 관심을 두는 것이다. 필자도 그렇지만 ‘성풍회의 성령운동’이 많은 신학도의 관심을 끌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성령의 은총을 감지하고 감사 찬양하면서도 이웃과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와 싸우며 헌신하려는 이들이 많았으며, 성풍회의 성숙된 모습이 어린 신학도에게 주었던 인상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