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누가 사람인가

     유 승 우(문학박사)

 6. 누가 사람인가


사람의 마음에는 왜 때가 묻는 것일까. 그것은 욕심 때문이다. 욕심 욕(慾)자는 하고자 할 욕(欲)자에 마음 심(心)자가 더해진 글자이다. 하고자 할 욕(欲)자는 하나님이 모든 생물에게 주신 본능을 의미한다. 식물(植物)이 빛을 향하는 것도 욕(欲)이며, 동물이 먹이를 찾아다니는 것도 욕(欲)이다. 이 욕(欲)자의 동작과 작용은 죄가 되지 않는다. 나무의 잎들이 모두 햇빛 쪽을 향해도 죄가 되지 않으며, 사자나 치타가 가젤을 잡아먹어도 살생(殺生)의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하고자 할 욕(欲)자에 내 마음이 더해지면 욕심 욕(慾)자가 된다. 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지만, 내 마음은 내 뜻이며, 인위(人爲)이다. 내 뜻은 반드시 허물로 굳어진다. 허물 죄(罪), 허물 과(過) 자의 죄과(罪過)가 된다는 말이다. 이를 가리켜 성경에서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했다. 허물이 굳어버리면 그 허물에 갇혀 ‘흐르다’가 ‘멈춤’이 되고, ‘살다’가 ‘죽다’가 되어 마침내 주검이 되는 것이다.

누가 사람인가. 살아서 움직이는 게 사람이다. 눈에 보이는 움직임은 겉 사람이고, 보이지 않는 움직임은 속사람이다. 겉 사람의 움직임은 눈에 보이는 ‘살다’이고, 속사람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살다’이다. 겉 사람의 ‘살다’는 눈에 보이는 <물의 흐름>에 비유되고, 속사람의 ‘살다’는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에 비유된다. 물의 흐름은 눈에 보이니까 누가 사람인지, 누가 주검인지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시간(時間)의 흐름은 보이지 않으므로 누가 사람인지 누가 귀신(鬼神)인지 알 수가 없다. 속사람의 움직임이 멈추지 않고, 시간과 함께 흐르면 사람이지만, 시간과 함께 흐르지 않고 멈추거나 뒤로 돌아 달려가면 어둠에 갇힌 귀(鬼)가 된다. 과거의 어두운 함정에 빠진다. 그래서 지날 과(過)자는 허물 과(過)자이기도 하다.

귀(鬼)의 뜻은 어둠이고, 신(神)의 뜻은 빛이다. 천지창조 이전에는 빛과 어둠의 구분도 없었다. 이 말은 아예 시간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뜻이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도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늘과 땅이란 큰 집을 짓고, 그 안에 살게 하려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중략---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에서 보듯, 때의 흐름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것은, 어둠과 밝음의 사귐이며, 어둠과 밝음의 사귐이 곧 시간의 흐름이다. 이 세상은 <어둠과 밝음>이 사는 집이다. 살기 위해 지은 것은 집이고, 쓰기 위해 만든 것은 물건이다. 집은 살기 위해 지은 것이지 쓰기 위해 만든 물건이 아니다. 이 말은 ‘살다’는 ‘살다’ 이외의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살기 위해 지은 것이 집이므로, 집에서는 그냥 살기만 하면 된다. 이런 생각을 주거개념이라고 한다.

어둠과 밝음은 모습이 없다. 그냥 <캄캄하다, 환하다>일 뿐이다. 물리적인 시간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연속이다. 결코 그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의 시간은 멈추기도 하고, 거꾸로 흐르기도 한다. 멈추거나 거꾸로 흐르는 것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자연의 법(法)을 어기는 것이다. 법(法)은 물의 흐름이다. 물의 흐름에는 과거와 미래는 없고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21세기이다. 그런데 마음은 18세기나 19세기에, 아니 중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어둠 속에 잠이 들어 아침을 맞지 않고, 계속 꿈속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時間)을 우리말로 하면 ‘때 사이’이다.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은 ‘때 사이’에 있다는 말이다. 때 사이에 있으면 때가 묻는 게 당연하다. 육체에 묻은 때는 눈에 보이므로 금방 씻는다. 그러나 시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때는 보이지 않는 마음에 묻는 때다. 이 보이지 않는 때는 지나가버려야 한다. 과거(過去)가 되어야 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지 못했을 때, 지날 과(過)자는 허물 과자가 된다. 마음의 허물은 어둠이다. 귀(鬼)의 탈이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예를 들면, 양반이란 귀(鬼)의 탈을 쓰고 조선시대에 살고 있기도 하고, 친일의 탈을 쓰고 일제(日帝)때에 살기도 하며, 군(軍)의 탈을 쓰고 유신시대에 살기도 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아침이 아니라고 하며, 밝음을 거부하고, 어둠속에서 꿈꾸고 있다. 귀(鬼)라고 하는 탈은 흐름을 거부한다. 너는 네 멋대로 흘러가라. 나는 나대로 어둠 속에서 도깨비춤이나 추리라. 도깨비는 어둠의 때가 굳어진 탈이다. 어둠의 탈을 쓰고는 앞을 볼 수가 없다. 앞이 보이지 않으므로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흐르지 않는 것은 점점 뒤로 거슬러 가는 것이다. 물리적 시간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는 자연이며, 하늘의 법이다. 어둠과 밝음의 사귐을 부인하는 것은 하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늘의 법을 어기면 사람의 규율로는 다스릴 수 없지만 하늘의 심판은 피할 길이 없다. 어둠과 밝음의 사귐은 우주의 사랑이며, 음양의 조화이며, 생명의 흐름이다.

어둠의 탈을 쓴 도깨비들이 모여 사는 집을 복마전(伏魔殿)이라고 한다. 이런 집들을 성경에서는 바벨탑이라 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이 물건들을 헐어서 흩을 것이다. 복마전은 살기 위한 집이 아니라 나쁜 일에 쓰기 위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복마전은 하늘만이 헐어서 흩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존재의 집인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라고 했다. 그래야만 어둠의 탈을 벗고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승우(본명-유윤식 호-한숲). ‘현대문학’지로 등단(1966년, 박목월 추천). 1939년 강원도 춘성산. 가평 초, 중, 고 졸업. 경희대학교국문과 졸. 한양대학교 대학원 졸-문학박사. 인천대학교 교수 역임. 인천시민대학 학장 역임. 인천대학교 명예교수(현). 사)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역임. 사)한국기독교문인협회 이사장 역임. 사)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현). 사)국제펜한국본부 고문(현). 수상-경희문학상(1988). 후광문학상(1994). 한국기독교문화예술대상(2003). 창조문예문학상(2011). 심연수문학상(2011). 상록수문예대상(2019). 시집-바람변주곡(1975). 나비야 나비야(1979). 그리움 반짝이는 등불 하나 켜 들고(1983). 달빛연구((1993). 물에는 뼈가 없습니다(2010). 숲의나라, 노래와 춤(2019) 등 11권. 저서-한글시론(1983). 몸의 시학(2005) 등 5권. 자서전 『시인 유승우』 출간(2014). 계좌번호 시티은행 437-30003-27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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