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인내성공(使忍耐成功.약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장상훈 논설위원

    한문성경연구소장

 

제목/ 사인내성공(使忍耐成功.약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코로나 팬데믹 현상이 장기화 되는 가운데에서 새해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때에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사도 야고보에게 묻는다면 “사인내성공(使忍耐成功.약1:4)”이라고 할 것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뜻이다. 야고보는 인내 자체를 인생의 본질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한 것이다.

인내는 성공과 출세의 수단이 아니다. 인생이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것이고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다. 인생은 인내로써 드디어 완성되고 인생은 인내로써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승리하는 것이다. 인생은 인내로써 자신과 환경을 극복하여 승리하고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사도 야고보는 그렇다! 보통 사람들은 인내를 수단으로 하고 성공과 출세를 목표로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반대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하여금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라고 했다. 사람은 인내를 통해서 “전비무결(全備無缺.약1:4)!” 즉 온전히 구비되어 결함이 없는 인생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인내로써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이것이 야고보의 인생철학이다.

지금까지 인내로써 성공했는가? 그렇다면 이제 인내를 버려도 될 것인가? 아니다! 인내란 잠깐만 참는 것이 아니고 한번만 참는 것도 아니다. 성공하기까지 출세하기까지 부자가 되기까지 그 기간만 참는 것도 아니다. 오늘도 참고 내일도 참고 또 참아서 인내가 실패하지 않고 인생의 마지막까지 성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코로나의 장기화는 앞으로도 지속 될 듯 싶다. 이러한 고난이 연속되는 상황에서 흠이 없는 인격으로 구비되고 완성될 수 있는 것은 인내 밖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환난 날에는 인내로써 영혼(생명)을 구원해야한다(눅21:19). 예수께서도 인내로써 흠과 티가 없는 인격을 온전히 이루셨다(요19:30). 예수의 삶은 인내 그 자체였다. 십자가의 승리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낸 결과였다. 인내가 인생의 본질이며 바탕이다. 한문성경 “무결(無缺.약1:4)”에서 ‘이그러지다’라는 뜻의 ‘缺(결)’ 자는 그릇(缶:장군 부)이 이리저리 부딪쳐서 흠집(夬:터질 쾌)이 생겼다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부딪치고 상처를 받는다. 이때 인내를 온전히 이루지 못하면 인격에 흠이 생긴다. 이리저리 귀 빠진 그릇처럼 마음에 상처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인내하지 못하고 너무 조급했기 때문이다.

운주에 장공예라는 사람의 집안은 아홉 세대가 한 집안에 살면서도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너무도 신기해서 당고종이 그의 집을 찾아가서 그 비결을 물었다. 그는 광(창고)에 있는 여러 개의 독(항아리) 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어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참을 인(忍)’ 자가 쓰여 있었다. 아홉 세대가 한 집안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끊어 오르는 분노가 있었지만 그럴때마다 하얀 종이 위에 ‘참을 인(忍)’ 자를 써서 광에 있는 독 속에 넣고 꾹꾹 참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 번 참는 집 안에는 큰 화목이 있다는 뜻에서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라는 글을 당고종이 장공예의 집안에 하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참을 인(忍)’ 자를 보면 ‘칼날 인(刃)’ 자에 ‘마음 심(心)’ 자를 섰다. 마음 속에서 끊어 오르는 분노의 잡초을 예리한 칼날로 싹뚝싹뚝 잘라내는 아픔을 참는 것이 인내이다. 인내는 풀베기와 같다. 자신의 마음의 밭에서 잡초를 베어내고 알곡을 가꾸는 것이 인내이다. 들판에 제멋대로 피어난 들 꽃들을 전정가위로 싹뚝싹뚝 잘라서 소반에 가지런히 꽂아 놓으면 꽃꽂지로 아름다움이 재(再) 창조된다. 이와 같이 인내는 인생을 아름다운 단계로 한 단계 높혀준다. 인내(忍耐)에서 ‘견딜 내(耐)’ 자는 ‘구레나룻을 깎는 형벌 내(耐)’ 자로도 쓰인다. 옛날에 수염은 남자의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런 권위의 상징인 수염을 형벌로 깎을 때의 자존심을 참아내는 것이 ‘견딜 내(耐)’ 자이다. 동전 한 잎만도 못한 자존심 때문에 인생을 실패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내와 노력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못할 일이 있겠는가? 그런 수모를 참아내신 분이 주님이셨고 기독교 초기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자취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야고보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使忍耐成功)! 그리하면 온전하고 구비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리라!고 했던 것이다.

스스로 자기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 환자가 38년 동안이나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 있었다. 고난 속에 있는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이다. 천사가 가끔씩 연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이때 먼저 들어가는 환자의 병은 고쳐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연못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짚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38년 동안이나 삶을 포기하지 않은 중풍병 환자에게 찾아가셨다. 그리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라고 하셨다. 이것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참고 또 참아낸 인내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 속에서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한다. 이 날이 안식일이었다. 하나님은 인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안식일에 인생의 도약의 때를 준비하고 계신다.

고난은 반드시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입구가 있고 출구가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서머나교회에 대해서도 ‘열흘 동안’ 고난을 받으리니 죽도록 “지사충성(至死忠誠.계2:10)” 하라고 했다. 고난은 기간이 있고 한계가 있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이 인내이다. “인일능지 기백지(人一能之 己百之) 인십능지 기천지(人十能之 己天之.중용21장)라는 말이 중용에 있다.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내란 쉬어 가더라도 중도에서 포기하지는 않는 다. 인내하는 사람에게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하지 않았던가. 쓰고 괴로운 날들을 참아내지 못하고 어떻게 달고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결과에만 신경쓰면 아무일도 하지 못한다. 인내는 과정에 충실하는 것이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참아내지 못하고 어떻게 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내내 비바람 천둥번개를 참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가을의 열매를 거둘 수가 있겠는가? 인생의 열매도 결국 인내의 결과물이다. 인생의 자랑이 무엇인가? 건강, 돈, 권력, 명예인가?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면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약1:11). 모든 것은 지나간다. 이생의 자랑과 영광의 꽃잎이 떨어졌는가? 인생을 너무 서러워하거나 서글퍼하지 말자! 그 때 비로소 사람은 철이 들고 그 인격에 열매를 맺게 된다. 열매는 인내의 결과물이 아니던가. 백발이 영화의 면류관이 되는 것도 인내의 결과물이다(皓首如華冕호수여화면.잠16:31). 결국 인생이란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자기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성실하고 진실해야한다.

중용에서 “행원자이 등고자비(行遠自邇 登高自卑.중용15장)”라는 말을 했다. ‘먼 곳을 가려면 가까운 데로부터 하고 높은 곳을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한다’라는 뜻이다. 새들이 깃드릴 만큼 큰 나무도 작은 씨로부터 생겨나고 9층의 높은 탑도 한 줌의 흙벽돌로부터 시작된다. 어찌하여 가까운 데, 낮은 데를 버리고 먼 곳과 높은 곳만을 바라본단 말인가? 기독 군자라면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높으신 하나님을 보며 가까이에 있는 형제을 통해서 천국백성을 보아야한다. 중용에서 인내하는 사람의 덕성을 “상불원천 하불우인(上不怨天 下不尤人.중용14장)”이라고 했다. ‘위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내하는 사람의 삶의 태도이다. 군자의 덕성은 활쏘기와 같아서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를 자가 몸에서 찾는다. 과오는 스스로 고치면 된다. 성인군자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인간의 이상이다. 왜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가? 인내로써 자신의 삶을 완성해가는 사람은 모든 문제를 자기 안에서 찾는다. 다산은 이것을 극기복기(克己復己)라고 했다. 자기를 극복해서 자기에게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현재의 자기를 극복하고 미래의 자기를 완성해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본 것이다. 여기에 야고보와 다산이 통하는 인내의 철학이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애내인愛乃忍.고전13:4) 모든 것을 참으며(범사포용凡事包容.고전13:7) 모든 것을 견딘다(범사인내凡事忍耐.고전13:7)라고 했다. 사랑 자체가 참는 것이고 사랑의 과정에서 모든 것을 포용하여 참는 것이고 사랑의 유종의 미(美)도 역시 모든 것을 참는데 있다. 한마디로 사랑은 처음도 과정도 마지막도 참고 인내하는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지만 인내의 사랑일 때 가장 위대한 제일의 사랑이 된다. 믿음이 좋지만 인내의 믿음이 더 좋은 믿음이다. 소망이 좋지만 인내의 소망만이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忍耐生練達 練達生希望인내생연달 연달생희망.롬5:4.)”라고 했다. 인내 없이는 연단도 희망도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이라도 역시 인내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 돌아 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13:1)고 했다. 한문성경에서는 “지종잉애(至終仍愛.요13:1)”라고 했는데 지종(至終)은 ‘끝까지, 죽을 때까지’라는 뜻이고 잉애(仍愛)는 ‘종전 그대로 사랑을 한다’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종전처럼 변함없이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한결같은 사랑, 변함없는 사랑, 인내의 사랑을 ‘탁족(濯足)’을 통해서 본 보여 주셨다. 이것을 보통 ‘세족식(洗足式)’이라고 하는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것은 ‘세례식(洗禮式)’을 연상하게 되므로 한문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씻을 탁(濯)’ 자를 써서 ‘탁족식(濯足式)’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탁족식’은 사랑의 지조(志操)와 섬김의 사랑과 인내의 사랑을 본 보여주신 사랑의 영원한 표본이다. 이러한 예수의 삶을 지켜보았던 야고보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이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