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지수, 부조화의 조화 이루어야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조신권 (시인/문학평론가/연세대 명예교수)


공존지수, 부조화의 조화 이루어야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공존자수(共存指數)라는 말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공존지수란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얼마나 잘 운영할 수 있는가 하는 능력을 재는 지수다. 공존지수가 높을수록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쉽고, 소통으로 얻은 것을 자원으로 삼아 더 성공하기 쉽다는 개념이다. 물론 내가 속한 집단은 잘 되고 다른 집단은 소외시킨다는 ‘패거리’ 개념이 아니라 서로 잘 살도록 도와야 한다는 이타적 개념에 가깝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각기 하는 일은 다르고 가는 여정은 다르지만 다르면서도 모두 하나 되는 하모니를 연출해내는 관계지수를 일컫는다. 사람마다 제 각기 정체성은 다르다. 정체성이란 ‘나다움’으로 ‘남다름’을 표현하는 나만의 개성이자 독창성이다. 나를 나답게 표현되는 나만의 칼라이자 다른 사람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캐릭터다. ‘나다움’을 지키면서 다른 이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하모니다. 그것을 요즈음 와서는 ‘공존지수’라고 부른다. 개성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각자의 정체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하모니를 이룰 때 피차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싹 틔울 수 있다. 올라갔다고 너무 자만하지 말고, 내려갔다고 너무 좌절하지도 말고, 올라감과 내려감이 서로에게 지릿대가 되어 밸런스를 이룰 때, 아름다움이 생기고, 질서가 이루어지며, 서로 행복하게 된다. 논어에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나온다. ‘화이부동’은 ‘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한데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는 ‘조화를 이루되 부화뇌동, 즉 자기 주관 없이 남의 말에 무턱대고 따라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화이부동의 ‘화’(和)가 바로 하모니다.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면서 다른 사람의 주장과 의견에 보조를 맞추되 일방적으로 흡수되거나 동화되어 주관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하모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환경에 일방적으로 동화되어 버리면 자신의 주관과 개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 ‘화이부동’의 개념을 다른 말로 나는 ‘씁쓸 달콤함’(bitter-sweetness)이라는 모순어법적인 역설로 말로 바꾸어 말해보고 싶다. 이 말은 먼저 쓴 사람은 수전 케인(Susan Cain)이다. 내향인의 감정을 파고드는 애니메이션, 변호사 출신의 작가 수전 케인이 슬픔과 멜랑콜리의 힘을 연구주제로 삼은 『비터스위트』(bitter-sweet)를 내놓았다.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은 ‘씁쓸 달콤한’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슬픈 음악을 들을 때 치밀어 오르는 시리면서도 아스라하게 행복한 감정 같은 것을 이른다. 이는 고통이 더 아름답다는 모순어법적인 역설인데, 이런 감정은 무엇인가에 대한 갈망에서 기인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가 대장정에 나서도록 견인한 노스탤지어 같은 것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모순되는 성질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 때에 따라서는 모순되는 말이 오히려 그 실체를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거나 정확하게 표현할 때가 있는데, 이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보다 폭넓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인식의 폭을 확대시켜 간다고 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상황적 역설은 현실 상황과는 괴리가 생기도록 의도적으로 반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특정 상황이 표현과 다르다는 것에 주목하게 하여 강조의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씁쓸함’과 ‘달콤함’은 도저히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자리에 놓을 수도 없고 조화와 하머니를 이룰 수도 없는 그런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속에서 또는 시 속에서 씁쓸 달콤함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창출하기도 하고 아픈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기도 한다.

사회에는 언제나 다양한 경험과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하모니를 이루면서 그 사회가 추구하는 비전과 목표를 향해 한 방향으로 매진하게 된다.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곡선적인 체험을 통해 아름다운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여정 속에서 하모니의 꽃은 핀다. 하모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날카로운 자갈이 파도의 힘으로 서로 부딪히고 깎이면서 둥글둥글해진다. 처음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모가 난 돌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둥그런 돌이 된 것이다. 질서가 아름다운 이유는 극심한 혼돈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한 번 잡힌 질서가 영원히 그대로 유지된다면 그런 질서는 바람직한 하모니라고 볼 수 없다. 하모니는 용광로처럼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하나로 획일화시켜 각자의 개성을 말살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하모니는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만 통합되기 이전의 각각의 개성들이 그대로 살아 있는 모자이크다. 모자이크 속에는 각자의 다양한 개성과 정체성이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도 놀라운 하모니를 이룬다. 우리 사회가 작금 균형을 잃고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북한의 핵도 문제지만 국민들의 의식이 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