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성경으로 본 말씀묵상>

<한문성경으로 본 말씀묵상>

묵상주제/ 깨끗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을 주옵소서.

    장상훈 목사

한문성경제주연구소장


한글성경

마태복음 23:23-25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한문성경

23:23-25

23 24 25

輸(수): 실어 나르다. 遺(유): 빠뜨리다. 蚋(예): 모기. 濾(려): 거르다. 呑(탄): 삼키다. 劫奪(겁탈): 위협과 폭력을 써서 빼앗다. 非義(비의): 그릇된 의.


통문장이해

23 화(禍)로다(乎)! 너희(爾) 선을 위장(僞善)하는(之) 서기관들(經士)과(與) 바리새인들아(法利賽人)! 그러므로써(因) 너희가(爾) 박하와(薄荷) 회향과(茴香) 근채(芹菜)로써(以) 십에서(十) 그(其) 하나를(一) 실어 나른다(輸). 다만(但) 율법(律法)이(之) 더욱(尤) 귀중하게 여기는(重) 것(者)은 곧(卽) 의와(義) 인과(仁) 신인데(信) 너희는(爾) 곧(則) 그것들을(之) 빠뜨렸다(遺). 이것은(此) 너희가(爾) 당연히(當) 실행해야할(行) 바의(所) 것들(者)이다. 그리고(而) 저것들도(彼) 또한(亦) 빠뜨릴(遺) 수(可) 없다(不). 24소경(瞽)이면서(而) 남을(人) 인도하는(導) 자들아(者)! 모기(蚋)라면(則) 그것을(之) 걸러내고(濾) 낙타(駝)라면(則) 그것을(之) 삼킨다(呑). 25화(禍)로다(哉)! 너희(爾) 선을 위장(僞善)하는(之) 서기관들(經士)과(與) 바리새인들아(法利賽人)! 그럼으로써(因) 너희는(爾) 잔(杯)과 쟁반(盤)의(之) 밖은(外) 깨끗하게 하면서(潔) 안은(內) 곧(則) 겁탈(劫奪)과(及) 그릇된 의가(非義) 가득차 있다(充滿).


한글성경과 한문성경의 대조

23절 한글성경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한문성경에서는 ‘경사(經士)’와 ‘법리새인(法利賽人)’으로 되어 있다. 23절 한글성경에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한문성경에서는 “의(義) 인(仁) 신(信)”으로 되어 있다. 25절에 한글성경 ‘잔과 대접’이 한문성경은 ‘잔(杯)과 쟁반(盤)’으로, 25절에 한글성경 ‘탐욕과 방탕’이 한문성경에서는 ‘겁탈(劫奪)과 비의(非義)’로 되어 있다. 겁탈(劫奪)은 위협과 폭력을 써서 억지로 빼앗는 것이다. 위협과 폭력을 써서 성관계를 맺는 것도 겁탈이라고 한다. 비의(非義)는 ‘잘 못된 의’ 또는 ‘그릇된 의’를 말한다. 전체적으로 한글성경보다 한문성경이 더 원색적으로 표현이 강열하다.


말씀 묵상(默想)

오일 시장에 가면 먹거리와 인심이 풍성해서 좋다. 채소 가게를 지나가다가 빨간 홍당근이 눈에 들어 왔다. 크기도 괘 컸다. 빨간 색깔도 그렇고 무엇보다 싱싱해서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몇 개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큰 것으로 하나 골라서 깨끗하게 씻어서 주방의 큰 칼로 싹-뚝 잘랐다. 그리고 잘라진 홍당근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참 동안이나 유심히 쳐다 보고 있었다. 이 홍당근은 겉도 빨갛고 속도 빨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 그러나 이 홍당근은 겉과 속이 똑 같았다!

순간 나는 주방에서 무릎을 끊었다. 미물에 불과한 홍당근도 겉과 속이 똑 같은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인 내가 겉과 속이 다를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양의 탈을 쓴 이리같이 겉과 속이 다르고, 회칠한 무덤같이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순간! 겉과 속이 진실하게 하여 주시고 깨끗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고 증오한 사람들이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사람들’이었다. 겉으로만 꾸미고 속으로는 진실성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속 사람보다는 겉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겉으로 자신을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자랑을 좋아하고 잘난체 하고 오만하고 교만하다. 본질보다는 형식을 중요하게 여긴다. 신약성서는 그런 바리새적인 율법주의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무슨 말인가? 십일조도 하고 율법의 정신이 되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십일조가 율법의 한 형식이라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율법의 정신이며 본질이다. 율법의 정신과 본질은 율법적인 형식이라는 그릇에 담겨져야 한다. 본질이 형식에 담겨지지 않으면 본질 그대로 있을 뿐이다. 형식화 작업을 통해서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가 되는 것이다. 진리의 대중화의 작업이 바로 진리를 형식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의 형식을 통해서 진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의 조문이다. 십일조가 율법의 한 형식이지만 우리는 십일조를 통해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지켜야한다는 것이다. 십일조는 물질적 축복을 경험하는 방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대로 율법의 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체험하는 방편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도 지키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마23:23)고 하신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 놓아야만 여러 사람들이 함께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릇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음식이라는 본질을 먹고 체험하는 것이다. 형식적인 율법 조목을 통해서 음식이라는 율법의 본질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음식을 먹으면 그릇을 깨끗이 씻듯이 율법의 조목도 새롭게하여야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을 수 있는 것이다. 형식이 굳어지고 형식이 도그마가 되고 형식논리에 빠져버리면 형식주의가 되고 바리새주의가 되고 그래서 본래의 정신과 본질을 훼손하고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본래 예(禮)를 통해서 화(和)를 중요시 여겼다. 논어 학이편에서 “예지용(禮之用) 화위귀(和爲貴)” 라는 말을 했다. 즉 ‘예를 사용함에 있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귀중하다’라는 뜻이다. 화(和)가 본질이며 예(禮)는 그 본질을 실현하는 방편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화(和)가 귀중하다고 한 것이다. 화(和)은 음악의 조화를 의미한다. 이토록 동양의 현자들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화(和)! 즉 화목이라고 보았다. 화목을 통해서 좋은 관계를 맺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좋은 관계를 증진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화목한 가정, 화목한 사회, 화목한 국가질서를 통해서 인간사회의 가장 이상사회인 대동사회가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화목의 보편화를 위해서 예의범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예의범절이란 인간관계를 화목하게 하는 보편적인 질서이다. 이러한 질서가 질서의 본질인 화목을 상실하고 예의범절만 강조되고 확대되고 강요될 때에는 예의범절이란 허례허식과 같은 형식주의에 빠져 빈 껍질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을 살리는 법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모순을 극복하고 본질과 형식이 공존하도록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율법의 정신과 본질은 무엇인가? 한문성경에서는 율법적인 정신과 본질을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먼저 정의를 의미하는 ‘옳을 의(義)’ 라는 글자는 ‘양 양(羊)’ 자를 따르고 ‘나 아(我)’ 자를 따랐다. 양은 상서로운 좋은 동물이다. 내가 양과 같이 상서로운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義)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정의라는 실체는 따로 없다. 논어에서도 “무가(無可) 무불가(無不可)”라고 미자편에서 말했다. ‘옳은 것도 없고 그릇 것도 없다’라는 뜻이다. 정의야말로 상대적이고 정의야말로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그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정의도 단계가 있고 수준이 있다. 이기적 정의는 언제나 투쟁을 통해서 쟁취하게 된다. 그러나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진 정의는 또다른 이기적 정의에 의하여 악순환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래서 보다 높은 단계인 완전한 정의에 도달할 수 있는 정의는 자신이 양과 같이 되는 것이다. 양과 같이 자기희생을 통한 정의는 보다 높은 단계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의이다. 십자가는 자기 희생을 통한 정의의 실현이다. 십자가의 정의는 보다 높은 단계에서 정의를 실현시키는, 보다 완전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율법의 본질과 정신은 ‘어질 인(仁)’이다. 인(仁)이라는 글자는 사람 인(人)과 두 이(二) 자를 따랐다. 사람 인(人)이 글자의 소리이기도 하다. 혼자는 인(仁)이 될 수 없다. 반드시 두 사람이 짝이되어야 비로소 거기서 어짊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가까이하고 서로 사랑한다는 뜻이다. 시인여기지의(視人如己之意), 즉 ‘남 보기를 자기 같이 본다는 뜻이다’. 이것을 성경은 애인여기(愛人如己)라고 했다. 즉 ‘다른 사람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다. 누가복음은 애린여기(愛鄰如己)라고 했다. 즉 ‘이웃사랑하기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본질이며 정신이다.

그 다음으로 율법의 정신과 본질은 ‘신(信)’, ‘믿을 신(信)’이다.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 자를 따랐다. 언(言)은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사람들이 대화할 때 독실하여 자신과 상대방을 속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성실하다는 뜻이다. 신실함이다. 진실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율법의 본질적인 정신은 정의와 사랑과 신실함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조목 중에 하나인 십일조가 물질적 축복의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성서적인 논리라기 보다는 자본주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셨던 외식하는 자들의 논리이다. 자본은 돈이다. 우리는 돈 때문에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가 외식하는 자들이다. 외식하는 자들은 잔과 쟁반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안에는 탐욕과 방탕, 그릇된 정의와 겁탈로 가득차 있다고 예수님은 지적하셨다. 성서는 모든 율법의 형식, 십일조를 비롯한 모든 율법의 조목들은 율법의 정신인 정의와 사랑과 신실함을 위한 방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도(십일조을) 행하고 저것도(의,애,신을) 버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논어 학이편에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이라는 말이 있다. 즉 ‘나는 하루에 세 가지로 나 자신을 반성한다’는 뜻이다. 지금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성서적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 곁에는 항상 성서가 있다. 이 성서 속에는 언제나 자신을 향하여 질문해야할 세 가지가 있다. 의(義), 애(愛), 신(信)이다. 나는 정의로운 사람인가? 나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 나는 신실한 사람인가? 우리가 하루에 세 가지로 자신을 돌아 본다면 첫째는 정의 둘째는 사랑 셋째는 신실함이다. 나는 오늘 하루를 정의롭게 살았는가? 나는 오늘 하루, 사랑을 누구에게 어떻게 실천하였는가? 나는 오늘 하루, 신실했던 것과 신실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의(義), 애(愛), 신(信), 이 세 가지는 나에게 항상 있을 것인데 지금! 나에게 그 중에 제일은 무엇일까?

날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겉과 속이 다르지 않는 깨끗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으로 후회없이 살고 싶다. 왜냐하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때가 지금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텐데! 라는 후회가 크기 때문이다.

비재천식(菲才淺識)한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