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와 너'

' 나 와 너'

     최광순 목사


'나 와 너'의 거리를 좁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이 작업은 인간으로서 의 내적의무이기도 한 것이다.그러나 '나'의 중심에서 '너'에게로 나가는길은 멀고 먼 길이기도 하다. 반대로 '너'에게서 '나'로 향하는 逆行은 어찌 할 것인가?

인간에 대한 共感은 상호 유기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선결과제로 해봄직한것이다. 과연 '나'의 牙城에 갖혀서 평생을 산다면 얼마나 옹졸한것이 될것인가? '너'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이 이루어진다면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한 것에 다를바가 없다.인간이 절망과 疎外에 대한 인식으로 고뇌하는 것은 自我의 무제한적 욕망과 驕慢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아진다.인간의 自我實現은 무엇인가? 自慢과 성공의 陶醉에 머무는 것이라면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것인가?

나와 너의 관계속에서 하나되는 일체감이 가능하도록 하려면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自由와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자기성찰을 이뤄야 할것이다.다시말해 나 와 너의 관계를 나 와 '그것'의 관계로 格下시키는 잘못된 관점을 깨뜨리는 일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마틴부버의 <나 와 너>라는 저서는 인간의 관점을 새롭게 보여준 名著이다.

현대인의 고뇌와 人間喪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플로티너스는 '하나에서 여럿에의 移行이 어떻게 될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가 여럿에게 到達할 수 있는가? 하나를 위한 他者가 존재하는가?라고 회의적 질문을 한다.자아의 獨立性과 他者와의 一致는 좁힐수 없는 평행선일까? 19세기의 러시아철학자 베르자예프는 '利己性'은 인간의 原罪이며 자아와 他者,하나님,세계및 사람들의 인격과 宇宙와의 진정한 관계의 沈滯이다.利己性은 환상적인 歪曲된 普遍主義이며 그것은 세계와 세계에 있어서의 일체의 현실을 虛僞의 전망대 가운데에 두는 것으로서 그것은 현실을 올바로 받아들이데 대한 能力을 상실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이와같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은 나와 너의 공감대를 절실히 요청한다.

기독교의 핵심진리는 인간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啓示적 사건에 근거한다.

絶對他者이신 초월적神이 成肉身하신 놀라운經綸의 성취이다. 요한복음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기록되어 있는것이다.결국 자신을 犧牲羊으로 삼아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을 살리는 일이 얼마나 절실하기에 독생자를 보내셨을까? 실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로 自己형상대로 만드셨기에 그대로 傍觀 할수가 없었던 것이다.'나 와 너'의 관계성은 진정 위대한 생명의 疏通이며 영원한 사랑의 향기가 아닌가? 기독교는 이러한 영적 관계성을 度外視 해서는 아니된다.실존주의 철학자 키엘케골은 "이 魔性的인 자기폐쇄의 반대가 사랑이다.사랑은 사람을 開放시키고,자기폐쇄로 부터 밖으로 이끌어내고 그렇게 함으로서 마성적인 것을 극복한다."고 말한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 가는가? 

각양각색의 삶의 행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있다. 인간의 多樣性속에서 調和를 指向하고 있는가? 그러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와 사랑이 되어야 할 것이다.인간은 自由意志 속에서만 창조의 길을 갈수가 있는 존재이다.부자유와 억압속에서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가능할수 있을까? 에덴동산에 善惡果와 生命果가 있기에 선택의 자유를 결행 한 것이다.허나 그 선택의 자유는 비극의 씨앗으로 화하고 만다.생각컨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드시고 그 선악과를 따먹게 두셨는가? 이상하지 아니한가? 그럼 하나님이 불완전하여 실패한 것이라고 단정해도 되는가? 이 문제는 간단한게 결코 아닐것이다.쉘링은 '超越的 墮落' 으로 보았는데 의미있는 관점이다.여기에 하나님의 救贖史의 사랑의 신비가 감춰져 있다는 秘意이다. 헤겔의 역사철학의 공식처럼 正反合의 진행이다.극적인 反轉의 드라마가 가능하게 된다.하나님이 인간을 '自己형상'대로 만드셨기에 선악과라는 '禁斷의 열매'를 허용 할 수 있었다고 본다.자유의 댓가는 영원한 사랑의 완성을 가져온 것이다.'나 와 너'의 관계의 완성은 억압이 아닌 자유와 사랑의 결과로서 주어진다.자유와 사랑의 숨결속에서 '나 와 너'의 인격적 관계가 정립되는 것이다.베르쟈예프는 인격을 神格으로 동일시하여 인간사회의 억압과 폭력을 치열하게 排擊한다.그는 전체주의와 국가사회주의,공산사회의 非人間的 통제를 비판한다.

마틴부버는 '나 와 너'의 저서에서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 나와 '너'의 관계를 지향한다.인간이 타인을 '그것'으로 본다면,과연 인격적인 관계,소통,창조가 가능 할 것인가? 利用價値가 아닌 '神格'으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이 사회가 理想的인 사회가 될 것인가? 에릭프럼의 말처럼 소유가 아닌 存在의 차원에서 살아간다면 '건전한 사회'가 열려질 것이다.

지구촌은 무서운 災殃의 豫告속에 향후 30년후에는 다른행성으로 移住할지도모른다고 하고있다.아마도 화성이나 달나라로 행차 할 날도 멀지 않을수도 있다.왜? 이지경까지 왔는가?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의 결과물이 아닌가? 공해,기후변화,산업쓰레기,오존층파괴와 인간성 파괴로 인한 쾌락과 가치관 상실등으로 지구촌은 병들어서 지상의 낙원은 虛像이 된 것이다.누구의 책임인가? 정치다운 정치,경제의 인간화가 실현 되었다면 전혀 다른 세계로 나갈수도 있었을것이다.인간과 인간,인간과 자연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를 기대하여본다.

인간은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자연을 제대로 알아야만 한다.인간은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다."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다시말해 신적 부르심에 응답해야 할 존재이다.너는 누구인가? 나와 同格의 실존이다.신의 형상이기에 인격적 관계로 승화되어야 한다.이제 나와 너의 거리감이 사라지고 사랑과 자유를 향유하는 삶을 기대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