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야소지심 基督耶穌之心.빌2: 5

         장상훈/논설위원

         한문성경연구소장



제목/기독야소지심  (基督耶穌之心.빌2:5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전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차기 대통령을 선출해야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정치란 정권을 쟁취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본래 정(政)은 정(正)이다.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바르지 못함을 바르게하는 것이 정치이다. 사람을 바르게 하는데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덕(德)으로써 바르게 해야한다. 이것을 덕치(德治)라고 한다. 덕으로써 다스린다는 것은 정치인들이 먼저 모범적으로 솔선수범하는 것을 말한다. 먼저 정치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바르게 하고 그 다음에 백성들을 바르게 하면 나라는 따라서 바르게 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교회의 목회는 ‘덕목(德牧)’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덕으로써 목회하는 것을 ‘위목이덕(爲牧以德)’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목(牧)’은 ‘목회(牧會)’의 준말이다. 위목이덕(爲牧以德)을 줄이면 덕목(德牧)이라는 말이 된다. 이미 사도 바울은 목회자와 신자는 교회와 사회에서 덕으로써 행동하여 덕을 세워야한다고 강조했다(롬14:19,15:2,고전8:1,10:23,14:3,14:26.엡4:29.살전5:11). 바울은 덕을 모든 은사의 중심에 두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40)”라고 한 것도 모두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한 바울의 권면이다.

한문성경에서는 ‘建德(건덕)’ 또는 ‘健德(건덕)’으로 되어 있으나 그 뜻은 같다. 덕을 세우라는 뜻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교회는 성령의 덕으로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덕이 없으면 교회 자체가 세워질 수가 없다. 기둥이 세워져야 집을 지을 수 있고 기둥이 튼튼해야 집이 오래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기둥이 튼튼하지 않으면 집은 무너진다. 교회의 덕(德)은 집의 기둥과 같아서 바르고 튼튼하게 세우지 않으면 교회도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교회의 존폐가 덕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은사와 설교와 말과 지식과 모든 행동은 덕이 되게 해야만 유익하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절제해야하고 서로 서로 교회에 덕이 되도록 피차 권면해야한다. 교회는 끊임없이 덕을 두툼하게 쌓고 쌓아 가야한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높은 ‘덕산(德山)’이 될 때 세상사람들이 교회를 우러러 보는 것이다. 교회가 칭송대신 비난을 받는 것은 덕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한문자전에 의하면 덕(德)은 득(得)이다. 도(道.말씀)를 행하여 마음에 얻음이다. 덕이 되는 일을 하나 하나 실천해 가면서 마음에 얻어져서 쌓이는 것이 덕(德)이다. 덕은 ‘곧은 마음’이다. 몸소 앞장서서 실천하여 천하를 통솔하는 것이 덕이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러한 덕이 모여서 교회의 큰 덕을 이루는 것이다. 신자는 악을 없고 덕을 쌓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소악적덕(消惡積德)’이라고 한다. 악을 없애고 덕을 쌓으려면 죄와 악에 대해서는 성령의 불길처럼 민감하게 저항해야하고 덕을 쌓는 신앙생활은 불길처럼 치열해야한다. 교회가 덕을 회복하려면 교인들이 피차 서로 서로 성령의 덕(德)을 세워가야만 한다(살전5:11).

일반적으로 목회는 신앙의 본질에 관한 설교와 교회 행정에 관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의 본질과 교회행정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역시 목회자의 덕성(德性)이다. 비유하자면 돌아가고 있는 팽이의 중심점과 같다. 중심이 바로 서면 돌고 중심이 기울어지면 결국 팽이는 쓰러지고 만다. 교회가 교회 될 수 있게 하는 그 중심에는 바로 목회자의 덕(德)이 있다. 목회자의 덕성이 중심이 되어 바르게 서 있으면 목회자가 기적이나 이적 같은 별스런 일을 하지 않아도, 목회자가 교회에 있다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구심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회자의 덕성에 감동받는 교인들은 자연히 그 덕에 젖어들게 되어 있다. 지금은 교회가 물이 바다 덮음같이 성령의 덕으로 충만해야할 때가 되었다. 성령의 덕이란 선악에 대해서 불길 같이 예민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능력이 성숙되어 있을 때 그것을 충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 교회의 덕에 구심점이 되어야할 목회자의 덕성(德性)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사도 바울은 “기독야소지심(基督耶穌之心.빌2:5)”이라고 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 목회자의 마음이 되고 신자의 마음이 되어 교회의 모든 덕목들의 중심에 있어야한다. 오직 예수! 예수 중심! 이라는 말들이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너진 교회의 덕을 다시 세울 수가 있겠는가? 목회자는 야곱의 사다리와 같이 땅에서 하늘까지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이 땅에서 ‘야소지심(耶穌之心)’으로 하늘의 덕을 쌓아가야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아래로 배워서 위로 통달하는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며, 무너진 교회의 덕을 다시 재건하는 길이다. 교회는 세상을 위하여 세상과 함께 세상에 있는 존재이지만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선교의 최전방기지와 같아서 세상에서 악을 없애고 선으로 덕을 쌓아서 악을 선으로 이겨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덕이 있는 신자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에 신경을 많이 써야한다. 의로운 백성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폭군이 나라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리게 된다. 농자 천하지대본(農者 天下之大本)이라면 이 세상의 밭에서 악의 잡초를 뽑고 선의 알곡을 가꾸는 것이 선교이며 정치이다. 없애는 것과 쌓는 것, 즉 消(소)와 積(적), 이 두가지가 정치적인 선교의 단서(端緖)가 된다. 먼저 목회자가 자신을 닦는다(修)는 것은 녹슨 쇠붙이를 숫돌에 갈 듯이 오래된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쌓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소구적신(消舊積新)’이라고 한다. 직역하면 ‘옛 것을 없애고 새 것을 쌓는다’는 뜻이다. 구습을 쫒는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것이다. 성경을 비롯하여 모든 경전의 훈계(訓戒)는 모든 악을 없애고 덕을 쌓는 바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문성경과 동양고전을 함께 읽는 것이다.

논어 위정편의 첫 구절은 ‘위정이덕(爲政以德.논어.위정편)’이라는 말로 되어 있다. ‘덕으로써 정치한다’라는 뜻이다. 이제 우리 국민은 머지않아 나라를 새롭게 이끌어 갈 새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여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한다. 이미 어느 한 쪽에 확정된 편향적인 시각이 고정되어 있는 사람은 올바른 선택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정치인들이 물들이는 진영논리에 따르지 않고 경계선에 서서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위정이덕(爲政以德)’의 정치 지도자를 분별하여 선택해야한다. 마지막까지 신중하게 지켜보면서 최종적인 결정을 판단해야한다. 필자는 미래의 선진한국을 이끌어갈 지도자의 덕목을 세 가지로 판단기준을 삼았다. 첫째는 인간으로서의 근본이 서 있는 사람인가? 둘째는 백성들을 위한 정치적인 지향점이 맑아서 분명한 사람인가? 셋째는 절차를 따르는 과정이 뚜렷한 사람인가? 이런 사람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지나친 개인적 욕망을 가진 사람은 문제가 있다. 세상에 대해서 거만하게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위험하다. 한꺼번에 큰 일을 하겠다는 것도 국민들을 현혹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예나 지금이나 교만한 사람은 백성을 겸손히 섬길 수가 없다. 지금까지 정직과 성실로 백성들을 위해서 살아 온 사람이 누구겠는가? 그가 바로 덕(德)이 있는 사람이며 덕으로써 정치할 사람이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에서 “정직과 성실로 나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했다. 무조건 내편이 되어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아서 정직하고 성실하겠으니 성실과 정직이 자신의 정치적인 생명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게 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정직과 성실! 이러한 정치철학이 분명한 사람은 결국 정직하고 성실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위정이덕(爲政以德)이란 무엇인가? 밤 하늘의 별들을 한 번 보라! 북극성이 정위(正位)에 자리하여 하늘의 지도리를 돌리고 뭇 별이 따라 돌아가면서 북극성을 향하여 함께 운행하는, 밤 하늘의 별들의 장엄한 광경을 정치에 비유하여 위정이덕(爲政以德), 곧 덕치(德治)라고 한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권력자는 강제적인 힘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려고 해서는 안된다. 힘이 아니라 덕이다. 덕은 ‘무위(無爲)’하는 것인데 무위(無爲)는 ‘함이 없음’이라는 뜻이 아니다. 북극성과 같이 제자리를 지키면서 움직이지 않지만 그 주변의 모든 별들이 북극성을 구심점으로 해서 함께 돌아가게 만드는 어떤 힘의 응집력을 말하는 것이다. 덕으로써 응집력을 발휘하는 정치가 바로 덕치(德治)이다. 지도자는 사소한 덕목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함이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지금 이 시대는 덕으로써 응집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적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이 선진한국으로 가는 오늘의 시대 정신이며, 집단지성이 탄생시켜야할 우리들의 새로운 미래정부인 것이다. 나라가 부패로 인하여 오래동안 쌓이고 쌓인 낡은 적폐를 없애고 새롭게 덕을 쌓아갈 소구적덕(消舊積德)의 새 시대를, 덕이 있는 신자와 국민들이 힘을 모아 열어 가야한다. 태양은 저절로 떠오르지만 역사의 새 아침은 언제나 깨어 있는 백성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앞으로 교회는 위목이덕(爲牧以德)으로 목회하고 정부는 위정이덕(爲政以德)으로 정치하면서 정부와 교회는 서로 분리되지만 덕의 실현을 위하여 함께 협력하면서 새로운 선진 미래사회를 열어 가야한다. 경제도 덕을 상실하면 부패한 자본주의로 타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회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전반에 걸쳐서 덕을 세워가는 모범 주자가 될 수 있도록 먼저 자신과 교회부터 덕을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기독야소지심(基督耶穌之心.빌2:5)’을 회복하여 그 마음을 품고 살아야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