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인(勿議人.마7:1) 남을 책잡지 말라

     장상훈 논설위원

    한문성경연구소장


물의인(勿議人.마7:1)

남을 책잡지 말라

 

한글성경에서 예수께서는 기본적으로 남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 라고 가르치셨다. 여기에서 비판이란 건전한 학문적인 비판이나 정치적인 발전적 비판이 아니라 ‘따지고 문제 삼는다’ 라는 부정적인 뜻이다. 한문성경에서 보면 “물의인(勿議人.마7:1)” 이라고 되어 있고 한글성경에서는 ‘비판하지 말라’ 라고 되어 있다. “물의인(勿議人.마7:1)” 에서 ‘의(議)’ 이라는 말은 ‘의논하다’ 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남의 잘못을 꼬집어 ‘책잡다’ 라는 뜻으로 쓰였다. 별것도 아닌 작은 실수을 끄집어 내어 꾸짖고 크게 책망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자기 눈의 들보가 있는 자가 남의 눈의 티끌을 빼내겠다는 식으로 남의 작은 허물을 끄집어 내어 따지고 크게 책망하는 것을 말한다. 한문성경에서 “물의인 즉불견론(勿議人 則不見議.마7:1)” 이라는 구절을 직역하면 ‘남을 책잡지 않는다면 책잡힘을 당하지 않는다’ 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견(見)’은 ‘보다’ 라는 뜻이 아니라 ‘~를 당하다’ 라는 뜻으로 쓰인 사역동사이다. 한글성경에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 라고 되어 있다. 한문성경에서는 ‘책잡힘을 당하지 아니하려거든 남을 책잡지 말라’ 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사도 바울도 ‘남을 책잡지 말라’고 로마교회에 당부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다(롬14:2)” 라고 전제하고 “어떤 음식을 먹는 자는 안 먹는 자를, 안 먹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롬14:3)” 라고 했다. 여기에서도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남을 책잡지 말라’ 라는 뜻이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롬14:15)” 라고 전제하고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롬14:15)” 라고, 격한 어조로 남을 책잡지 말라고 당부했다. 음식으로 믿는 자를 실족시키지 않도록 남을 책잡지 말라는 뜻이다. 음식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 사업이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다(롬14:20).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롬14:20)” 라고 했다. 여기에서 ‘악(惡)’이란 한문성경에서 보면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은 그 음식을 더러운 것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더러울 악(惡)’ 자로 쓰였다. 즐거움으로 먹는 자는 음식이 다 깨끗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먹는 자나 안 먹는 자가 서로 배타적으로 자기 입장과 자기 생각만 주장하고 상대방을 책잡고 갈등을 조장해서는 안된다. 사도 바울이 쓴 “비판하지 말라(롬14:3)” 라는 말은 마태복음에 있는 ‘책잡지 말라(마7:1)’ 라는 의미와 똑 같은 뜻으로 쓰였다. 바울은 결국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3)” 라고 했다.

복음서에 보면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해서는 안된다((마18:6.막9:42.눅17:2)고 했는데 바울도 자신이 양보하고 희생해서라도 남을 실족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항상 배려하고 ‘남을 위한 존재’로 사는 사람이다. 어떻게 자기 좋은 대로만 하는 사람의 행위가 복음적이겠는가? 내가 즐겨 먹을 수 있는 기호식품이라도 형제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면 절식하는 것이 믿음 있는 지식인의 윤리라고 바울은 생각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 라고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한 자유가 내게 있더라도 그 자유를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한다면 모든 것이 다 내게 유익한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1-33)” 라고 했다. 다른 사람을 구원받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삶을 위해서는 자신의 기호식품도 절식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도 존중해야한다. 음식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생각이나 행동들도 마찬가지이다. 남의 자유를 위해서는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절제하는 것이 복음적인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율법주의 자들은 율법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책잡고 비난했다. 그래서 마태는 “물의인(勿議人.마7:1)” 곧 ‘남을 책잡아 비난하지 말라’고 했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의 차별성이다. 복음은 온유와 관용으로 용서하고 포용한다. 율법주의 자들은 사람들을 구분하고 배제하고 사람들을 억압하고 탄압한다. 율법적인 지나친 편견을 가진 사람들 곧 자기 눈에 들보를 가진 자들이다. 율법이 완고한 쇠막대가 된 것은 율법이 정치화 되고 권력화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이 정치화 되고 권력화 될 때 교회법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해서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도 살벌하게 비판하고 정죄한다. 교권에 눈이 어두워지면 신앙이 정치와 권력의 수단이 되어서 사람들을 갈라치고 배제하고 억압하고 폭언폭설과 폭력까지도 정당한 것으로 착각한다. 교권에 눈이 어두워지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기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 순수해야할 신앙양심에는 눈이 어두워지고 신앙이라는 것이 정치와 권력의 수단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먼저 네 눈 속에 들보를 빼라고 했던 것이다. 율법과 신앙을 수단으로 삼는 정치화와 폭력화를 포기하라는 뜻이다. 율법과 신앙의 본래적인 정신으로 돌아가서 신앙 자체가 목적이 되게 하라는 뜻이다. 들보는 율법이나 신앙을 수단으로 하는 편벽된 시각을 의미한다. 이런 사람들을 한글성경에서는 “외식하는 사람” 이라고 했고 한문성경에서는 “위선자(僞善者.마7:5)” 라고 했다. 겉으로만 선을 가장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종교적이고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이념이나 신념에 빠지면 사람이 단순해져서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선으로만 치닫게 된다. 들보와 같이 단선(單線)적이다. 이런 사람들은 단선적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거나 신중하지 않고 조급하고 과감하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최고의 선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자기 생각을 완고한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입장을 살벌하게 비판, 탄압하면서 결국 독재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노자는 도덕경 3장에서 “지자(智者)” 라고 했다. 지자(智者)란 좁다란 인식에 갇혀 전문가 행세를 하는 사람이다. 성경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노자는 이런 지자(智者)들로 하여금 과감하게 행동하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다(使夫智者不敢爲也,도덕경3장). 여기에서 ‘지자(智者)’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소위 이념에 사로잡힌 ‘헛똑똑이’를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율법에 사로잡힌 위선자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헛똑똑이들을 높이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백성들이 경쟁하지 않고 다양성이 보장되는 강한 사회가 된다는 것이 노자의 주장이다. 노자는 항상 어떤 기준이나 권력화된 이념으로 사람과 세상을 통제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항상 권력화 된 율법으로 사람들과 세상을 획일적으로 통제하고 억압하고 지배하려고 했다. 자기 편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상대방을 살벌하게 비판하고 작은 허물도 크게 확대하여 책잡아서 곤욕스럽게 하는 것을 즐겼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사람들을 구분하고 배제하고 사람들을 억압하고 탄압하고 폭력까지도 서슴치 않으면서도 그것이 정당한 것으로 착각했다.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면서도 전혀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권력화된 율법을 위해서는 어떤 폭력도 정당한 것으로 착각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가 얼마나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지 의식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신앙양심을 정당하게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눈의 들보이다.

자기 눈에 들보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사람이나 사물을 객관적인 사실대로 보지 못 한다.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기 때문에 진실을 외면한다. 왜곡된 자기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상대방의 작은 허물도 크게 보이고, 크게 확대해서 보기 때문에 살벌하게 비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눈의 들보를 가지고 보는 한 그것은 ‘헛똑똑이’ 곧 노자가 말한 ‘지자(智者)’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했고 선을 가장하는 ‘위선자들’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눈의 들보를 가진 왜곡된 시각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기 때문에 ‘진실’을 외면할 수 밖에 없다. 진실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어야만 보인다. 율법이나 이념의 들보를 빼고 순수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사람과 자연과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사람과 자연과 세상의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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