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인생-7

조신권 (시인/문학평론가/연세대 명예교수)


우리 모두 저마다 스완송을 가질 수 있었으면!

 

지금 이 때는 흔히들 말하는 대로 ‘블랙 스완’(black swan), 문자 그대로 ‘검은 백조’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검은 백조’가 의미하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발생하는 그런 시대라는 말이다. 더욱 코로나로 인해서 코와 입을 가리고 있어서 일상과 정상이 무너지고 촉각, 후각, 미각, 청각, 그리고 시각 체험이 마비되어 가고 있다. 코끝의 감각으로부터 가슴 언저리까지가 무디어져 계절의 냄새마저 맞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작금의 우리들이다. 어른들은 고사하고서라도 어린 아이들만이라도 보고 들으며 배우고 알아가는 설렘의 순간들을 가질 수가 있었으면 좋겠다. 19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들 중 대표라 할 수 있는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는 그의 스완송(Swan song)이라 할 만한 시 “무지개”(Rainbow)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하늘에 무지개를 보면/내 가슴은 뛰노라./어린 시절에도 그러했고/어른인 지금도 그러하고/늙어서도 그러하리라./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바라노니 내 하루하루가/자연에 대한 경외심(타고난 경건함)으로 이어지기를 -윌리엄 워즈워스, “무지개” 전문
서상한 바와 같이, 이 시는 워즈워스의 ‘스완송’이다. ‘스완송’은 말 그대로 백조의 노래를 뜻한다. 백조는 평생 울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단 한 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한다고 한다. 그래서 ‘스완송’은 가수나 예술가 등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나 운동선수의 은퇴 경기 등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런 스완송에서 워즈워스는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라는 의미심장한 서사를 남겼다. 그 까닭을 워즈워스는 자전적인 성장 과정을 총 13권에 걸쳐 담아 쓴『서곡』(Prelude)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시편들에서 워즈워스는 아이들이야말로 “감각의 성화(聖火), 순수한 감동”을 보여 주는 “능동적인 우주의 동거자”이며, “영적 매력” 그 자체라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소유하고 있는 “우리 인간의 삶의 최초의/시적 영혼(靈魂)”은 “세월의 획일적 통제에 의해/감소되고 억압”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무한과 대화하거나 무한을 향하는” 상상력은 단단하게 굳어지고 쇠퇴해져 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더 이상 ‘무지개’를 바라보며 가슴이 뛸 수가 없고 세상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신묘함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무지개’를 보면서도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하고 아름다움이나 경건함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내면의 원천이 고갈 된 것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마음의 열정과 생동감이 고갈되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볼 수가 없게 된다.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뛰게 되면, 그것이 ‘블루밍 에센스’(blooming essence)가 되어 피부 속에 잠들어 있는 ‘유리 입자’(cell luminous factor)를 일깨워준다고 한다. 이 ‘유리 입자’는 마치 사랑할 때처럼 피부를 통해 들어온 자연의 빛보다도 더 찬란한 ‘감동의 빛’을 넓고 화사하게 비춰 얼굴 전체를 고르게 빛나도록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면 얼굴이 예뻐지고 살갗이 광채가 나듯이, 감동이 강하면 강할수록 전자 광처럼 그 빛의 파장을 넓게 피부에 확산시켜 얼굴빛을 환하게 해준단다. 반면 감동이나 사랑 또는 일상적인 미소가 죽으면 피부 건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각질층 바로 아래인 과립층에 존재하는 ‘유리 입자’가 쪼그라들거나 보이지 않게 손상되어 빛을 제대로 반사하지 못해 안색이 어둡고 칙칙해진다고 한다. 이래서 우주적 불가사의나 영적인 진리나 절대자에 대해 품고 살아가던 신비감이 다 무너지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이런 관성에 사로잡히면 감각이 무디어지고 삶의 설렘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문제다.

아름다움을 보고도 가슴이 뛰지 않고 사랑을 하면서도 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관심에만 몰입되어 ‘찬란한 미감’(blooming sense of beauty)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길섶의 한 작은 들꽃을 보고도 감동하고 가슴이 파동으로 순간순간마다 이어졌으면 좋겠다. 아침에 눈을 떠서 태양을 바라다보며 탄성을 지를 수 있는 ‘블루밍 스킨’(찬란한 얼굴)으로 끝까지 남았으면 한다. 우리 인생에서도 스완송을 부를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내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면 다시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기회의 신 ‘카이로스’가 표현한 것처럼, 그 기회가 언제 다가올지 모르기 때문에 철저히 준비하여야만 한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가는 것이며, 미래는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준비하며 맞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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