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달에 생각 나는 것

2022-04-01


         이선규 논설 주간 


4월이 되면 기독교의 명절인 부활절이 겹쳐있어 4.19혁명과 함께 혁명의 달이라고 칭하고 싶다.

우리는 지난날 나라가 어려운 난국에 처해 있을 때 피 끓는 젊은 들에 의해 혁명을 일으켰고 4.19묘지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생명들이 희생을 당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왜 혁명을 해야 했느냐? ’하는 자기 행위에 대한 강한 부정적 회의가 깔려 있다. 그러기에 항상 역사의 발전은 전투적인 투쟁에 의해 발전해 왔다. 그러기에 교회는 이 시대에 어떤 위치에 서있어야 하며 예언자 적인 사명을 잊어 버려서는 안될 것 이다.

만일 예언자적 역할을 망각 한다면 그러한 교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사람에게 밟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 교회는 안일을 찾아 모여든 유원지가 아니요. 불의와 비 진리와 왜곡된 사회 질서와 투쟁하는 악의 영들과도 싸우는 새로운 혁명 운동의 대열에 서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혁명 운동은 무엇이어야 하나?

그 해답을 에베소서 6:10-20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사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라고 하셨다.

기독인들이 싸워야 하는 투쟁 대상은 이 어두운 세상의 정사와 권세이다.

오늘날 선교의 전통을 말하는 교회들은 개인주의적인 영향을 너무나 많이 받아왔기 때문 에 항상 개인적인 범위를 넘지 못하였고 그러한 경향은 자연적으로 사회에 대한 도전은 언제나 소극 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혹시 도전한다 해도 지엽적인 자선 행위에 자족해 왔던 것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경우를 현재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는 동방 정교회가 오래 동안 정신적인 지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러시아의 불의한 정권에는 눈을 감은 채 침묵 상태로 짖지 못하는 개 모양이 될 때 나라의 운 명이 어떠한지를 뼈저리게 체험 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교회의 투쟁 대상이 항상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죄에만 지나친 열심을 보인 나머지 사회적인 불의와 정치적인 죄악에 대한 투쟁은 너무도 소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개인이 해결 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는데 문제가 심각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투쟁 대상은 바로 이 사회적인불의와 국제적인 죄악 등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싸움에 있어서 우리의 갖추어야 할 무장이나 부르짖을 구호, 우리가 성취해야 할 목표는 무엇일까?

“그런 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를 동이라 엡6:14)고 하였다. ‘서서’이고 참 진리의 편에 서는 일이다.

왜 우리는 진리의 편에 서야 하는가? 진리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철저하고도 전적인 복종이다. 세계 2차 대전 중 독일에서 히틀러 폭정에 항가 하다 처형된 본훼퍼 목사는 말하기를 히틀러가 그의 나찌 독일공화국에 국민으로 하여금 복종을 요구하는 때 거기에 항거하며 ‘인간은’ 오직 하나님 한분께만 복종하고 불의한 정권에 복종 할 의무가 없음을 밝히고 그는 처형을 당하였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이러한 예언자 적인 목회자가 많이 일어나기를 소원해 본다.

참 예언적인 목회만이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선교의 사명을 다 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에 말이다. 국가의 중대사나 사회 문제가 대두 할 때 그 문제의 중간에서 엉거주춤 하며 명확한 해답이나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는 강단은 러시아의 정교회를 만 면 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예언자적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주의 강단에서 하늘의 음성을 대면하기 보다는 인간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 능숙해 있기 때 문이 아닐까? 환경에 따라서 그 몸의 색깔을 자유롭게 변형 시키는 곤충들처럼 교회가 성도 들의 요구와 주장에 따라 복음의 본질을 흐리거나 퇴색 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 이 시대의 예언자 들은 성도들을 현실과 죄악의 노예가 된 우리 시대의 온갖 속박과 노예의 삶을 사는 애굽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며 이것을 위한 폭군 바로와의 싸움에선 투쟁의 첨병의 역할이 요구되며 오늘날 이 땅에 이러한 영적 혁명군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