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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세상이다 집안에 있으면서 조차 마음 놓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이니 말이다.
잊을만하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 대구에서 실패한 실패한 피의자가 변호사 실에 침입하여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를 위시하여 여러 변호사 사무실에 종사하는 직원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 또 벌어졌다.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에서 왜 이런 일들이 잊어버릴 만 하면 재현 되는 것일까?
범죄를 예방하고 처벌하는 장치가 없어서 인가?. 법도 나라를 평정할만한 제도도 있고 교도소, 감화 소,, 학교, 그리고 교회도 부지기수로 많다.
그러나 사회는 갈수록 난폭해 져 만 간다. 교회 수가 부족해서 일까? 요즘 교역자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줄어들어도 교회 숫자는 늘어난 다는 통계가 나왔다.
한국 교회는 1960년대를 지나면서 수량적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세계 도처에 선교사들을 파송 하였으 며 교회 개척이 성행 하였으며, 그리고 이어 신학교가 설립되어 정부의 허가를 받아 운영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교회의 급격한 성장이 사회의 경제 성장과 그 축을 같이하고 있다.
한국교회 초기에는 0.1-2% 교인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희망이고 어둠을 밝히는 등대와 같은 촉매자 역할을 감당해 왔는데 현재 한국에는 세계의 10교회 중 한국 교회가1-6번째로 꼽히고 있는데 왜 사회 변화의 속도는 느리고 인성은 갈수록 메말라 가고 있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한국의 개신 교회는 청교도의 근본 주의와 경건주의 신앙으로 무장 되었던 미국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교회 생활의 기틀을 잡아왔다.
한국 교회는 이 전통을 개혁 신앙 전통과 교회 전통이 주류를 이루면서 교회 생활의 규범을 삼아왔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는 이러한 기틀이 급격히 허물어져 가는 상황은 아닌지 진단해 볼 일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목회자 들은 큰 교회를 만들어야 하는 목회 철학에 병들어가는 것 같다. 큰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야심 찬 비전과 참을 수 없는 경재의 노이로 제에 시달리고 있다.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지닌 능력의 비결을 돈으로 사려했던 시몬 처럼 목회의 정도를 벗어나 편법과 비상 수단을 써서라도 타인의 성공의 비결을 뻥 뛰기로 단번에 이룩하려는 비법 전수에 매달리고 있으며.
목회의 연륜이나 정도의 과정을 생략 한 채 큰 교회만 만들면 그만 이라는 목회 철학과 허상에 들떠 있는 듯하다.
또한 대형 교회를 만들기 위해 능률과 효율을 극대화 하는 산업 사회의 경쟁 원리를 여과의 과정을 무시한 채 그대로 신앙 생활에 적용하므로 정도에서 이탈한 점은 없었나?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주님이 말씀하신 마음과 몸이 쉼을 얻는 교회라고 하기에 적합한가.
적극적 사고의 경쟁 원리와 사마니즘의 기복이 복합 된 성장 주의로 대치 시키므로 목회자와 성도들은 강박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의 목장과 교회에는 기독교의 비 본질적인 것들이 본질적이며 전통적인 것들을 구축하고 노략질 하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바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래샴의 법칙이 통용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은 더 이상 스타가 될 부흥사나 큰 교회의 신기루를 좇아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차분히 본연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양떼를 보살펴야 한다.
1453년 콘스탄티 노풀신학 회의 때의 일라고 한다.
주교가 세례를 주기 위해 물을 떠 놓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파리 한 마리가 그만 그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주교가 기도 했으니 그물은 거룩한 성수가 된 것이다.
그런 성수에 파리가 빠져 죽었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신학 토론의 주제였다고 한다. 한 편은 주교가 기도 했는데 더러운 파리가 빠져죽었 성수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비록 더러운 파리지만 거룩한 물에 빠졌으니 거룩해 졌다는 것이다.이 신학적 논쟁이 교회를 양분 시키고 급기야는 회교도의 침공을 자초하여 교회가 소멸의 길로 들어섰다는 교훈을 한국 교회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가 기독교와 예수교가 다투고 분쟁으로 치닫는 동안 온갖 사이비 이단들은 날뛰고 교회를 오염 시키고 있는 추세를 언제까지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한국 교회의 허상을 좇았던 점은 무엇이고 변화 되어야 할 점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 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내년에 조금 더 있다 상황이 좋아지면 하고 지연 시키다 보면 허상은 우리를 기다 려 주지 않는다
허상에서 실상으로 나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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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세상이다 집안에 있으면서 조차 마음 놓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이니 말이다.
잊을만하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 대구에서 실패한 실패한 피의자가 변호사 실에 침입하여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를 위시하여 여러 변호사 사무실에 종사하는 직원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 또 벌어졌다.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에서 왜 이런 일들이 잊어버릴 만 하면 재현 되는 것일까?
범죄를 예방하고 처벌하는 장치가 없어서 인가?. 법도 나라를 평정할만한 제도도 있고 교도소, 감화 소,, 학교, 그리고 교회도 부지기수로 많다.
그러나 사회는 갈수록 난폭해 져 만 간다. 교회 수가 부족해서 일까? 요즘 교역자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줄어들어도 교회 숫자는 늘어난 다는 통계가 나왔다.
한국 교회는 1960년대를 지나면서 수량적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세계 도처에 선교사들을 파송 하였으 며 교회 개척이 성행 하였으며, 그리고 이어 신학교가 설립되어 정부의 허가를 받아 운영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교회의 급격한 성장이 사회의 경제 성장과 그 축을 같이하고 있다.
한국교회 초기에는 0.1-2% 교인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희망이고 어둠을 밝히는 등대와 같은 촉매자 역할을 감당해 왔는데 현재 한국에는 세계의 10교회 중 한국 교회가1-6번째로 꼽히고 있는데 왜 사회 변화의 속도는 느리고 인성은 갈수록 메말라 가고 있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한국의 개신 교회는 청교도의 근본 주의와 경건주의 신앙으로 무장 되었던 미국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교회 생활의 기틀을 잡아왔다.
한국 교회는 이 전통을 개혁 신앙 전통과 교회 전통이 주류를 이루면서 교회 생활의 규범을 삼아왔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는 이러한 기틀이 급격히 허물어져 가는 상황은 아닌지 진단해 볼 일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목회자 들은 큰 교회를 만들어야 하는 목회 철학에 병들어가는 것 같다. 큰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야심 찬 비전과 참을 수 없는 경재의 노이로 제에 시달리고 있다.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지닌 능력의 비결을 돈으로 사려했던 시몬 처럼 목회의 정도를 벗어나 편법과 비상 수단을 써서라도 타인의 성공의 비결을 뻥 뛰기로 단번에 이룩하려는 비법 전수에 매달리고 있으며.
목회의 연륜이나 정도의 과정을 생략 한 채 큰 교회만 만들면 그만 이라는 목회 철학과 허상에 들떠 있는 듯하다.
또한 대형 교회를 만들기 위해 능률과 효율을 극대화 하는 산업 사회의 경쟁 원리를 여과의 과정을 무시한 채 그대로 신앙 생활에 적용하므로 정도에서 이탈한 점은 없었나?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주님이 말씀하신 마음과 몸이 쉼을 얻는 교회라고 하기에 적합한가.
적극적 사고의 경쟁 원리와 사마니즘의 기복이 복합 된 성장 주의로 대치 시키므로 목회자와 성도들은 강박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의 목장과 교회에는 기독교의 비 본질적인 것들이 본질적이며 전통적인 것들을 구축하고 노략질 하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바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래샴의 법칙이 통용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은 더 이상 스타가 될 부흥사나 큰 교회의 신기루를 좇아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차분히 본연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양떼를 보살펴야 한다.
1453년 콘스탄티 노풀신학 회의 때의 일라고 한다.
주교가 세례를 주기 위해 물을 떠 놓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파리 한 마리가 그만 그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주교가 기도 했으니 그물은 거룩한 성수가 된 것이다.
그런 성수에 파리가 빠져 죽었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신학 토론의 주제였다고 한다. 한 편은 주교가 기도 했는데 더러운 파리가 빠져죽었 성수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비록 더러운 파리지만 거룩한 물에 빠졌으니 거룩해 졌다는 것이다.이 신학적 논쟁이 교회를 양분 시키고 급기야는 회교도의 침공을 자초하여 교회가 소멸의 길로 들어섰다는 교훈을 한국 교회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가 기독교와 예수교가 다투고 분쟁으로 치닫는 동안 온갖 사이비 이단들은 날뛰고 교회를 오염 시키고 있는 추세를 언제까지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한국 교회의 허상을 좇았던 점은 무엇이고 변화 되어야 할 점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 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내년에 조금 더 있다 상황이 좋아지면 하고 지연 시키다 보면 허상은 우리를 기다 려 주지 않는다
허상에서 실상으로 나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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