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여 깨어나라!

예수님이 오늘의 교회를 보시면 (요한 2:12-22) 

 이 선규 목사 (본지 논설주간)


지금 까지 역사의 뒤안길에는 “종교 개혁” “교회의 변화”를 추구해 왔고 목소리를 높혀왔다. 

그러나 현재는 어느 때 보다 개혁의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다.

20세기를 가리켜 문명의 시대라 말하지만 이와는 달리 ‘문명의 쇠퇴’ ‘정신적 암흑기’라는 지적의 소리가 실감나게 들리는 현실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말도 옛말이 되어 지금은 누가 땅을 사고 집을 샀는지 조차 관심이 없는 시대이다.

그저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는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서도 관심은 무뎌지고 있다.

내게 손해와 간섭이 되는 일들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도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물, 불, 안 가리고 덤비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져있다.

죄와 불의에 대한 무감각 중에는 이미 치료의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이런 세대 속에 그리스도인에게 개혁의 외침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생각도 되지만

예수님 당시의 교회 상황을 통하여 개혁의 의미를 새기고자 한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시니 그 곳에선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장사가 한창이었고 돈 바꾸는 행위가 공공연하게 성행하고 있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은 분노를 발하시며 성전 안에서의 장사치를 내 쫒고 제물 매매 자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그들은 세속적 이익을 신앙의 목적과 방법으로 삼아 이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예식만 갖추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그의 공생애의 첫 번째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셨다. 

당시 성전의 지도자들은 성전본래의 기능을 무시하고 상업화 되었으며 세속 주의에 함몰 되어 있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과감하게 성전의 상인들과 환전상을 내어 쫒으신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교회 지도자들은 물론 제자들 까지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예수님의 개혁운동은 바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운동이었다.


그래서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며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또한 성전은 찬양하는 곳이며 구원이 선포되는 곳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당시 유대교는 이러한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이다.

앞서 말한 대로 상업주의가 만연해 버렸고 유월절은 상업상의 대목경기로 바꾸어 졌다.

그렇다고 성전 안에 들어온 상업상들을 막을 장사는 없었다.


교회의 속성은 무엇인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주님의 지체이다.

이것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길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를 돌아보자. 황금의 신뿐만 아니라. 권력의신에게 미혹당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 권력은 찬양을 받고 진리와 정의의 소수는 무시 아니면 도외시 당한다.

이렇게 권력과 타협한 교회는 그 권력의 위력을 등에 엎고 찬란한 옷을 입고 뻐기며 고난 받는 것은 약자의 운명이요.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웃는다. 이것은 올바른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라 할 수 없다.


교회는 오직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하는 살림 공동체여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서 풍성함을 얻게 하려고 왔다 (요한 10:10)”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으며 그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 하라고 맡겨진 사명을 따라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골 1:24-25)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교회의 일꾼 된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우기 위함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소속해 있는 기관을 위해 좋은 일꾼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들의 구주가 되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온갖 비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너희에게 크기 때문이다. (마5:11-12)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은 지상의 차원을 넘어 하늘과폄 관련 된다고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희망이 가득 찬 고난이란 이름의 그릇이다.


오늘의 교회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을까? 하는데 골몰한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사회의 약자들을 보듬고 돌보기 위한 고난을 지 도 자의 나누어 질 수 있을까를 고민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광장에 군중들을 동원하고 그 위세를 과시하며 반정부 분열과 증오의 바이러스를 확산 시키며 마치 신의 경지에라도 도달한 듯 호통 치는 모습에서 그의 행동 일거지 일 투수를 판단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의 호화로운 저택 고급 승용차며 오만한 자태에서 섬기려 오셨고 낮아지시고 겸손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세속인들에게 교회의 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 때 교회의 신뢰를 찾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면 교회의 개혁은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나부터 이어야 한다.

바른 예배 자가 되어보자.

남을 탓하기 전에 나부터 변화되고 고치고 수선해 나가야 한다. 자기도 변하지 못하면서 무슨 개혁을 말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백팔십도 변해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 하신다(롬12:1)

우리의 중심이 변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개혁은 기대할 수 없다. 

인간성이 달라지지 않고 죄 성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결국 개혁은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가만히 놔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밑으로 추락한다. 저절로 타락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파산 밑바닥에 까지 추락한 교회의 신뢰를 끌어 올리려면 끊임없는 자아 혁신과 변화만이 한국 교회의 희망이라 믿는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성전을 가리켜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는 아버지의 집이다. 우리의 집이 아니다. 돈 많은 자의 것이 아니다.

교회건축 하는데 공로가 많은 중직 자가 아니다.

결코 사람이 주인 아니란 말이다. 성전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는 없다.

한국 교회의 소란스러움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깊이 생각나게 한다.


새 성전을 지으라.

진정한 예배를 드리려면 새 성전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중심에 모셔야 한다.

본문 19절을 보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안에 일으키리라.

여기서 말하는 성전이란 46년 동안 사람들이 피땀흘려가며 돌로 지은 성전이다.

눈에 보이는 성전일 뿐이다.  반면에 주님께서 헐라는 말은 파괴 한다는 뜻이다.

다시 일으킬 성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서 마음에 새겨 질 영적인 성전. 

다시 말하면 제사드리는 시대는 이미 지나 갔으며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 성전의시대가 왔다는 뜻이다.


또한 헐라는 말은 파괴하라는 것이다. 기초까지 정리 하라는 것이다. 

돌로 지은 성전과 새 성 전의 차이는 무엇인가? 돌은 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돌로 지은 성전은 아무리 아름답고 정교하고 웅장해도 결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우리의 죄를 씻지 못한다.

더욱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져다 줄 수 없다.  예배의 공간은 될 수는 있으나 예배 자체를 가능케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우신 새 성전은 이런 문제들을 말끔히 해결 하고도 남는다.

새 성전이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기만하면 그를 통해서 단번에 주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죄 용서함을 받으며 구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은총이란 말인가?

우리를 구원치 못하는 성전에 연연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성전의 주인은 예수님이고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이었던 회막은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의 몸이었다.

이 성전에서 우리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가 이루실 속죄를 고백하며 제사를 드린다. 

예수님이 성전에 가셨을 때는 유월절이었다. 최초의 유월절에서 유대인 들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구속을 확실하게 실감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표하는 어린양의 고기를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는 성전은 형식만 남았다.

유월절에 대한 깨달음과 고백이 없었다. 

그 유월절의 양이신 그리스도가 성전에 그 모습을 드러내셨지만 아무도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유월절을 준비하고 제사는 그대로 드려지고 있었다.

이모든 것이 형식이요 의식일 뿐이다. 

자신의 몸인 성전이 훼손되고 있는 것을 보신 주님은 이를 방치 할 수 없었으므로 청결케 하신 것이다.

이에 성전의 지도자 들이 이를 거부하자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고 말았다 (마24:2)


오늘의 한국 교회를 보실 때 주님은 무어라고 하실까? 

이 말씀이 자꾸 떠오른다 한국 교회 여 이제라도 깨어나라는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