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의사

2021-07-19


          이기동(수암교회 담임목사)


구미에서, 3월.친구가 근무하는K정형외과 방사선실을 잠깐 들렀다. 그 친구는 나와 신학을 같이 전공하여, 개척교회에서 목회 하면서,병원에서 아픈 이들을 돌보는 일까지 하였다.

 

우리는 대학 과정을 마칠 무렵,실천 신학을 전문으로 정하여,목회에 관한 논물을 썼다.

나는 목회 상담학에 관심을 가졌고, 그는 농촌 선교를 위하여 농민들의 생활과 시골교회의 실태를 조사하였다.나는 많은 종교심리학자들의 책을 읽다가,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칼 융의 책에서‘영혼의 의사’라는 말을 발견하였다.

 

칼 구스타브 융은 목사의 아들로서 영혼의 고통을 겪는 많은 환자를 치료하는 마음의 의사였다. 그는 바젤대학에서 해부학 과정을 마치고, 외과나 내과를 전문으로 선택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이야말로 자기가 개척해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교수들은,그 결심을 듣자 어안이 벙벙했다.

정신의학과 같은 우스운 것을 위해 의사로서의 빛나는 장래를 희생시킬 작정인가? 하고 놀랐던 것이다.

 

의사들은 대개 정신의학을 멸시하고 있었다. 정신의학은 터무니없는 말의 덩어리이며,정신과 의사는 그 환자와 마찬가지로,색다른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과연 마음의 의사답게 단호히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흔히 목회자는 교인이 고통을 겪을 때 가까이 해주고,아픔을 상담해주는 영혼의 의사라고 불리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신체에 대한 치료가 증상을 가라앉힐 수는 있지만,정신에 대한 치료만이 영혼의 고뇌를 치유시킬 수 있다는 뜻에서 제법 진지한 대화를 이어갔다.그러나 환자가 오기 시작하자 그는 수시로X선 촬영을 하고 필름을 보이며 판독을 설명해 주었다.

 

병원의 좁은 복도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다.그들의 무표정한 얼굴들에서 나는 많은 상념을 가진다. 왜 나에게 아픔을 주어져야 하는가,하고 원망하는 것일까?고통을 견디기 어려워서 실의에 빠진 것일까? 비엔나의과대학의 교수였던 빅터 프랭클은“고난은 그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에 고난이 되기를 그친다”고 한다.죽은 자기 부인 때문에 상처를 받아 고통을 겪고 있는 남편에게 프랭클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먼저 죽고,당신 부인이 아직 살아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남편은‘그녀가 이 고통을 정말 참기 어려웠을 것’을 말하자,프랭클은‘당신이 살아남아 부인을 애도함으로 대신 그 고통을 치르는 의미’를 역설하였다.이 말을 듣자 그 남편은 자기의 고통이 사랑하는 자기 아내를 대신하는 고통이라고 생각하자,곧 아픔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다.

 

결국 그 남편은 자기의 고통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고통은 진지한 의미를 가진다면 무력해진다. 자기 인생의 의미를 위해서 사람은 고난을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

여전히 화색이 없는 얼굴들은 환자의 병력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지 않는 의사와 사무적인 간호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내가 원하는 대로 간호원이 분주히 뛰어다니지 않는가고 그녀를 꾸짖는 대신 이렇게 묻지 않는가? “일이 너무 많지요?언제나 다른 사람을 위해 일만 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지요.”그러나 친구는 아파서 우는 아이와 상처와 질병 때문에 웃음이 없는 얼굴들을 대하면서도 친절을 잃지 않았다. 물론 사무적인 태도가 아니라 오직‘ 마음으로부터’우러나오는 것이었다.그의 신앙과 사랑을 보게 된다.

 갑자기 밖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렸다.어느 부인이 응급실에서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나왔다.농기계 공장에서 일하다가 그만 손가락을 잘린 것이다.검게 그을린 남편의 얼굴에서 뼈에 사무치도록 한 되는 가난의 쓰라림을 본다. 눈물이 부인이 두 눈에 그렁 그렁하게 흘러내렸다

 X레이를 보니 집게 손가락과 장가락이 한 마디가 넘게 잘리워졌다.부인은 친구의 상담을 통하여 인간적으로 자기에게 말을 건네는 감정을 느끼게 되며,자기가 당한 불의의 재해에 대한 분노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리라.또 동시에 친구는 자기 자신의 본질과 순간적으로 만나서 자아실현을 스스로 돕게 되었으리라.

 나는 영혼을 사랑하고 돌보는 존엄한 일을 해내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어떤 사람이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대놓고 자신도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그 고통은 인간이 지닌 필요한 아픔이라고 역설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나는 그 고통의 문제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잠시 내 것으로 느껴야 하며 결코 손쉬운 말로 위로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구속을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셨던 것이다.사람이 되어서 나와 꼭 같이 되셨던 주님은 나의 문제의 깊이와 그 본질을 몸소 겪어 아셨던 것이다. ‘고난을 받으사 완전히 이루신’그 분은 나와 함께 하신다.

 친구는 이제 오전 진료를 끝내고 햇빛 쏟아지는 거리로 나섰다.친구와 나와 그리고 거리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창조하신 사랑을 깨닫고 있는 것일까?자기와 같은 사람을 아무리 찾아 헤매어도 만나지 못할 유일한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친구와 플랫폼에서 굳은 악수를 하며 영혼을 사랑하는 주님의 종이 되자고 했다.서울로 달리는 열차 안에서 사랑과 은총의 꽃에 파묻힌 내가 언제나 평행선을 긋고 있는 철길 위에 영원히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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