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원현수필가
놓치다
아차, 또 닫혀버렸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다. 이제 다섯 정거장 뒤에나 오는 차를 타는 수밖에 없다. 이 바쁜 시간에 10분이나 늦어지는 것이다. 억울하다고 푸념하고 투정해봐야 소용없다. 아까 해찰했던 그 잠깐이 죄라면 죄다. 그러게 남의 일에 한 눈 팔 일 없는데 바쁘다면서도 아침부터 뭔 일로 큰 소리 내며 싸울까 궁금해 했던 건 무슨 오지랖이었나. 그게 1분은 족히 되었을 게고 덕택에 나는 1초도 안 되는 차이로 차를 놓치고 말았다. 지난주에도 그랬는데 또 그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는 중에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으랴.
놓친 고기가 가장 크다는 말처럼 내 삶 속에 이렇게 놓쳐버린 것이 여럿 되었을 것 같다. 아내 말을 안 들어 행운의 기회를 놓쳐버린 적도 있었다. 수십 년 전 일이지만 강남 k여고 옆 9평짜리 아파트가 전세 4천5백만 원을 안고 5천만 원이라고 했다. 하니 5백만 원만 보태면 된다며 그걸 사자고 했다. 나는 9평짜리가 오르면 얼마나 오르겠으며 5천만 원이 오르면 또 얼마나 오르겠느냐며 타박을 놓으면서 묵살 해 버렸는데 그게 얼마 가지 않아 재건축이 된다 하여 5천만 원이 5억이 되어버렸다. 또 언젠가는 우연히 경매물로 나온 수원의 원룸 건물을 알게 되었는데 부담금 별로 없이 구입 할 수 있겠다며 아내가 사자고 했다. 무엇보다 위치는 좋았지만 땅 지분이 적어 불안하게 뾰족이 들어서 있는 사진을 보고 대꾸를 하지 않자 무산되고 말았었다. 한 1년쯤 지나 그쪽을 지나가게 되어 그 일이 생각나 그곳엘 가보니 그 자리엔 아주 멋진 건물이 들어서 있었는데 1층은 편의점이고 2층부턴 원룸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이재에 밝지도 못하지만 그런데 신경을 쓰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지금 생각하면 못 이기는 척 아내의 말만 들었어도 지금보단 훨씬 낫게 살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놓쳐버린 것은 분명 내 것이 아닐 것이다.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만 40년 살이다. 그동안 재건축을 해서 다시 입주하긴 했지만 나를 아는 많은 이들이 내가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산다고 바보 취급을 할 정도였다. 이걸 팔아서 옮기면 넓은 평수로 갈 수도 있고 두 채를 마련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다며 참 많이 나를 주눅 들게 했었다. 한 번만 이동을 해도 큰돈이 떨어진다고도 했다. 하지만 내 복에 무슨 그런 일이 있겠느냐고 꼼짝않고 있었던 것이 지금은 오히려 잘했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때 내가 놓쳤다고 아쉽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만일 내 것으로 만들었다면 내게 어떤 일이 생겼을지 알 수 없다.
놓친 것은 내 것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니 내 것이 아닌 것들이었다. 바보스러울지 몰라도 내 걸음이 맞는 거였다. 남의 보폭에 힘겹게 맞춰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내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도 내 분수에 맞는 일이니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놓치다’는 말은 동사로‘잡거나 쥐고 있던 것을 떨어뜨리거나 빠뜨리다. 얻거나 가졌던 것을 도로 잃다. 목적하였던 것이나 할 수 있었던 것을 잘못하여 이루지 못하다. 일을 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나 시기를 그냥 보내서 할 일을 하지 못하다. 듣거나 보거나 느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지나쳐 보내다.’(표준국어대사전) 등의 뜻을 갖고 있다.
모두 좋은 의미의 말이 아니다. 다 아쉽고 손해 보는 일이다. 하지만 내 의사와 관계없이 놓쳐버리기보다 스스로 놓아버리는 것을 결정해야 하는 때도 나이가 드니 오는 것 같다. 놓쳐서 안타까운 것보다 놓아버리지 못해 겪는 오해와 원망이 사람을 참 난처하게 만들 때도 있다.
어린 날 친구들과 연을 날리다가 동네 미루나무에 내 연이 걸려버렸다. 아무리 당기며 애를 써 봐도 결린 연은 풀려날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거기서 헤어나고 싶다고 연이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애원하는 것 같아보였다. 하지만 연은 가지와 가지 사이에 줄이 걸려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그때 동네 형이 연줄을 끊으라고 했다. 그를 놓아주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줄을 끊었다. 그런데 그때 바람이 휙 부는가 싶더니 실 끊긴 그 연이 스르르 가지로부터 벗어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반갑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와! 연이 풀렸다’소리 지르며 좋아했는데 순간 연은 하늘 저 멀리로 날아가 버렸다. 다행히 얼마 못 가 아래로 내려오더니 건너편 다복솔밭에 내려앉았다. 놓치는 것이 아니라 놓아 준다는 것은 이렇게 때로 내 것을 다시 찾을 수도 있다는 걸 어린 나이에도 생각 했었다.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본다. 놓친 것 중 가장 큰 것은 너무 일찍 내 곁을 떠나버린 부모 형제다. 속수무책으로 나만 남겨지게 만든 그들은 나를 참 많이 서럽고 안타깝게 했고 해서 원망스럽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믿었던 사람이 배반을 하거나 내 몫이어야 할 것을 가져가 버려 허망하게 빈손이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만큼 와서 보니 내가 놓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나는 늘 얻었고 받고 있었다. 그러니 딱히 손해 본 것은 없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놓친다는 것은 내 것이 아니란 거였다.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할 것들이었다. 안타까워하거나 아쉬워할 것들이 아니라 제 갈 길을 찾아가게 해 줘야 하는 것이었다.
요즘 들어 유난히 안타까워지는 것들이 많다. 좀 더 공부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가장 크다. 나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도 해낸 사람들이 많았는데 내 인내와 절실함이 그들보다 못했던 거다. 아이들에게도 좀 더 잘 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 못 한 것이 아쉽다. 그렇게 했다면 저들도 조금은 더 좋은 조건에서 더 나은 삶을 살 텐데 하는 후회도 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지금의 내가, 이만큼이 내 분수라는 생각을 한다. 이에서 더 했다면 지금의 내가 아닐 수도 있다.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마음 편할 수 있는 것도 복이라면 복이다.
가을이다. 나무들이 저마다의 옷을 벗고 있다. 저들이라고 아쉬움이 없으랴. 그런데 저들은 그런 내색조차 안 한다. 슬그머니 놓아버린다. 아니 놓친다. 그러면서 태연하다. 조금 전 상가(喪家)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왔다. 그분의 영정 속 웃는 얼굴처럼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도 놓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가 지켜야 할 의무나 본분, 나다움, 어쩌면 그걸 놓칠까 봐 겁내는 것 아닐까. 나도 모르게 되어버릴 그런 순간은 아니 와야 할 텐데 창밖에서 떨어지고 있는 낙엽을 하나둘 세어본다. 창밖은 가을인데 나도 가을일까.
어느새 칠순을 넘기고 보니 그간 놓친 안타까움보다 놓아버려야 할 것들을 더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좀처럼 욕심을 제어할 수 없으니 무소유란 말은 내 사전엔 없을 것 같다. 차라리 내 의사에 관계없이 놓치는 것이 나를 도와줄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 놓친 열차도 시간을 계산해 보니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삶은 그렇게 알게 모르게 놓치는 것들 속에서도 이어져 가는 것인 게다. 나처럼 앞차를 놓친 사람들인지 차 문이 열리기 바쁘게 뛰어나가는 사람들 그 속에서 나도 이젠 시간을 놓치지 않겠다고 함께 뛴다. 손에 든 가방을 놓치지 않게 단단히 붙잡고.
최원현
수필가·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월간 한국수필 발행인.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등 17권. 《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문학평론집 2권. 중학교 교과서《국어1》《도덕2》 고등학교 《국어1》《문학 상》 등에 작품이 실려 있다.
최원현수필가
놓치다
아차, 또 닫혀버렸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다. 이제 다섯 정거장 뒤에나 오는 차를 타는 수밖에 없다. 이 바쁜 시간에 10분이나 늦어지는 것이다. 억울하다고 푸념하고 투정해봐야 소용없다. 아까 해찰했던 그 잠깐이 죄라면 죄다. 그러게 남의 일에 한 눈 팔 일 없는데 바쁘다면서도 아침부터 뭔 일로 큰 소리 내며 싸울까 궁금해 했던 건 무슨 오지랖이었나. 그게 1분은 족히 되었을 게고 덕택에 나는 1초도 안 되는 차이로 차를 놓치고 말았다. 지난주에도 그랬는데 또 그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는 중에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으랴.
놓친 고기가 가장 크다는 말처럼 내 삶 속에 이렇게 놓쳐버린 것이 여럿 되었을 것 같다. 아내 말을 안 들어 행운의 기회를 놓쳐버린 적도 있었다. 수십 년 전 일이지만 강남 k여고 옆 9평짜리 아파트가 전세 4천5백만 원을 안고 5천만 원이라고 했다. 하니 5백만 원만 보태면 된다며 그걸 사자고 했다. 나는 9평짜리가 오르면 얼마나 오르겠으며 5천만 원이 오르면 또 얼마나 오르겠느냐며 타박을 놓으면서 묵살 해 버렸는데 그게 얼마 가지 않아 재건축이 된다 하여 5천만 원이 5억이 되어버렸다. 또 언젠가는 우연히 경매물로 나온 수원의 원룸 건물을 알게 되었는데 부담금 별로 없이 구입 할 수 있겠다며 아내가 사자고 했다. 무엇보다 위치는 좋았지만 땅 지분이 적어 불안하게 뾰족이 들어서 있는 사진을 보고 대꾸를 하지 않자 무산되고 말았었다. 한 1년쯤 지나 그쪽을 지나가게 되어 그 일이 생각나 그곳엘 가보니 그 자리엔 아주 멋진 건물이 들어서 있었는데 1층은 편의점이고 2층부턴 원룸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이재에 밝지도 못하지만 그런데 신경을 쓰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지금 생각하면 못 이기는 척 아내의 말만 들었어도 지금보단 훨씬 낫게 살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놓쳐버린 것은 분명 내 것이 아닐 것이다.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만 40년 살이다. 그동안 재건축을 해서 다시 입주하긴 했지만 나를 아는 많은 이들이 내가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산다고 바보 취급을 할 정도였다. 이걸 팔아서 옮기면 넓은 평수로 갈 수도 있고 두 채를 마련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다며 참 많이 나를 주눅 들게 했었다. 한 번만 이동을 해도 큰돈이 떨어진다고도 했다. 하지만 내 복에 무슨 그런 일이 있겠느냐고 꼼짝않고 있었던 것이 지금은 오히려 잘했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때 내가 놓쳤다고 아쉽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만일 내 것으로 만들었다면 내게 어떤 일이 생겼을지 알 수 없다.
놓친 것은 내 것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니 내 것이 아닌 것들이었다. 바보스러울지 몰라도 내 걸음이 맞는 거였다. 남의 보폭에 힘겹게 맞춰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내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도 내 분수에 맞는 일이니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놓치다’는 말은 동사로‘잡거나 쥐고 있던 것을 떨어뜨리거나 빠뜨리다. 얻거나 가졌던 것을 도로 잃다. 목적하였던 것이나 할 수 있었던 것을 잘못하여 이루지 못하다. 일을 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나 시기를 그냥 보내서 할 일을 하지 못하다. 듣거나 보거나 느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지나쳐 보내다.’(표준국어대사전) 등의 뜻을 갖고 있다.
모두 좋은 의미의 말이 아니다. 다 아쉽고 손해 보는 일이다. 하지만 내 의사와 관계없이 놓쳐버리기보다 스스로 놓아버리는 것을 결정해야 하는 때도 나이가 드니 오는 것 같다. 놓쳐서 안타까운 것보다 놓아버리지 못해 겪는 오해와 원망이 사람을 참 난처하게 만들 때도 있다.
어린 날 친구들과 연을 날리다가 동네 미루나무에 내 연이 걸려버렸다. 아무리 당기며 애를 써 봐도 결린 연은 풀려날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거기서 헤어나고 싶다고 연이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애원하는 것 같아보였다. 하지만 연은 가지와 가지 사이에 줄이 걸려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그때 동네 형이 연줄을 끊으라고 했다. 그를 놓아주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줄을 끊었다. 그런데 그때 바람이 휙 부는가 싶더니 실 끊긴 그 연이 스르르 가지로부터 벗어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반갑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와! 연이 풀렸다’소리 지르며 좋아했는데 순간 연은 하늘 저 멀리로 날아가 버렸다. 다행히 얼마 못 가 아래로 내려오더니 건너편 다복솔밭에 내려앉았다. 놓치는 것이 아니라 놓아 준다는 것은 이렇게 때로 내 것을 다시 찾을 수도 있다는 걸 어린 나이에도 생각 했었다.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본다. 놓친 것 중 가장 큰 것은 너무 일찍 내 곁을 떠나버린 부모 형제다. 속수무책으로 나만 남겨지게 만든 그들은 나를 참 많이 서럽고 안타깝게 했고 해서 원망스럽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믿었던 사람이 배반을 하거나 내 몫이어야 할 것을 가져가 버려 허망하게 빈손이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만큼 와서 보니 내가 놓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나는 늘 얻었고 받고 있었다. 그러니 딱히 손해 본 것은 없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놓친다는 것은 내 것이 아니란 거였다.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할 것들이었다. 안타까워하거나 아쉬워할 것들이 아니라 제 갈 길을 찾아가게 해 줘야 하는 것이었다.
요즘 들어 유난히 안타까워지는 것들이 많다. 좀 더 공부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가장 크다. 나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도 해낸 사람들이 많았는데 내 인내와 절실함이 그들보다 못했던 거다. 아이들에게도 좀 더 잘 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 못 한 것이 아쉽다. 그렇게 했다면 저들도 조금은 더 좋은 조건에서 더 나은 삶을 살 텐데 하는 후회도 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지금의 내가, 이만큼이 내 분수라는 생각을 한다. 이에서 더 했다면 지금의 내가 아닐 수도 있다.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마음 편할 수 있는 것도 복이라면 복이다.
가을이다. 나무들이 저마다의 옷을 벗고 있다. 저들이라고 아쉬움이 없으랴. 그런데 저들은 그런 내색조차 안 한다. 슬그머니 놓아버린다. 아니 놓친다. 그러면서 태연하다. 조금 전 상가(喪家)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왔다. 그분의 영정 속 웃는 얼굴처럼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도 놓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가 지켜야 할 의무나 본분, 나다움, 어쩌면 그걸 놓칠까 봐 겁내는 것 아닐까. 나도 모르게 되어버릴 그런 순간은 아니 와야 할 텐데 창밖에서 떨어지고 있는 낙엽을 하나둘 세어본다. 창밖은 가을인데 나도 가을일까.
어느새 칠순을 넘기고 보니 그간 놓친 안타까움보다 놓아버려야 할 것들을 더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좀처럼 욕심을 제어할 수 없으니 무소유란 말은 내 사전엔 없을 것 같다. 차라리 내 의사에 관계없이 놓치는 것이 나를 도와줄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 놓친 열차도 시간을 계산해 보니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삶은 그렇게 알게 모르게 놓치는 것들 속에서도 이어져 가는 것인 게다. 나처럼 앞차를 놓친 사람들인지 차 문이 열리기 바쁘게 뛰어나가는 사람들 그 속에서 나도 이젠 시간을 놓치지 않겠다고 함께 뛴다. 손에 든 가방을 놓치지 않게 단단히 붙잡고.
최원현
수필가·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월간 한국수필 발행인.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등 17권. 《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문학평론집 2권. 중학교 교과서《국어1》《도덕2》 고등학교 《국어1》《문학 상》 등에 작품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