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마지막 인사

2022-07-05

             최원현

수필가⋅문학평론가⋅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어떤 마지막 인사

오늘따라 하늘이 더 맑다. 봄을 맞은 하늘과 땅과 바다는 어쩌면 서로 반가움 반 어색함 반 당황함 반으로 만나는 것 같다. 그런 마음처럼 산길을 오른다. 산길이래야 얼마 되지도 않지만 왠지 숨이 차고 발도 느려진다. 마음 한 자락을 무언가가 자꾸 붙잡는 것만 같다. 하기야 벌써 4년이나 되었지 않은가.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 영면의 장소를 뚫고 지나 이윽고 어머니에게 이르니 웬 생뚱맞은 나무 하나가 내 키보다 더 크게 서 있다. 봉분은 기계총*을 앓은 것처럼 헐어있고 비석은 새들이 쉼터로라도 쓰였는지 허연 잔존물로 덮여 있다. 순간 허망의 깊이로 다가오는 알 수 없는 낭패감, 이런 건 아닌데.

어머니 잘 계신가요? 한참을 낮아진 봉분에 눈을 주다가 주위를 둘러본다. 4년이나 깎아 주지 않았던 풀들은 자라고 시들고 다시 나서 자라고 시들면서 그동안 왜 오지 않았느냐고 역정을 내는 것 같다. 하지만 생각보다 변한 게 없는 것에 더 당혹해하다 어쩌지? 나에게 묻는다.

수 해전 아들과 이곳에 왔었다. 아들은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할머니 산소의 벌초를 처음으로 같이 했다. 군대에 있었고 미국에 있었기도 했지만 여긴 나 혼자 감당할 몫으로만 생각했었다. 한데 이젠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 넌지시 물어봤다.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다. 그러려니 했지만 그래도 제가 할게요 할 줄 알았다. 하다가 힘들면 방법을 또 찾으면 되고 내가 없어지면 그땐 안 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보다 자식이었다는 의무감 아니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던 부모에 대한 유일한 섬김으로 직접 벌초를 해왔다. 처음엔 기계를 대는 것도 아니다 싶어 낫으로만 벌초를 했다. 하지만 서툰 낫질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늘 능률도 노력도 기대 이하였다. 그래도 그거라도 손수 해드린다는 자부심과 의무감으로 해 왔는데 어느새 나도 나이가 들며 기운도 그걸 거부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사람을 사서 하는 것엔 더 마음이 동하지 않던 터라 아이의 생각을 앞당겨 알아본 것인데 역시였다. 가치 기준이 다른 요즘 애들 아닌가. 그렇다면 돌은 돌로 나무는 나무로 몸은 흙으로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것도 좋다 싶었다. 자연은 사람이 들어가지만 않으면 순식간에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버린다. 파묘(破墓)해서 화장(火葬)을 하여 뿌려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굳이 그런다고 그냥 놔두는 것과 뭐가 다르다는 것인가. 그래서 그다음 해로부터 찾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는 나 또한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리라는 약속이 전제된 것이었다. 그런데 아내와 함께 장인어른을 찾아뵈러 가는 길인데 새삼스레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래 그동안엔 어떻게 얼마나 변했을까. 아마 어딘지 찾을수도 알아볼 수도 없게 풀숲으로 덮여 버렸겠지 생각했다. 아버지 산소를 예기치 않게 잃어버린 전력으로 봐선 충분히 그럴 거로 생각했던 것인데 정작 와서 보니 그렇지가 않아 오히려 당황을 한 것이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은 매년 전라도 무안 몽탄의 산소를 다니셨다. 거기엔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부모님과 조부모님이 계셨다. 도시개발로 이장공고가 난 것을 모르고 있다가 누군가가 알려준 소식에 황급히 문중 산이라지만 외지디 외진 곳에 급한 이장(移葬)을 했다. 한데 나무로 땔감을 하는 세상도 아니다 보니 사람이 산에 들어갈 일도 없어 있던 길도 없어지고 숲은 우거져 어디가 어디인지 방향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큰 손자에게 그 위급함을 몇 번이나 알리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가치 기준이 다른 손자와 할아버지의 마음은 평행이었고 급기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돌아가시기 이태 전 그곳에 다녀오셔서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내게 푸념인지 하소연인지 나라도 들으라는 것인지 한숨 섞인 말씀을 하시던 기억이 난다. ”인자 어디가 어딘지 길도 찾을 수 없어야. 넌출이 얼마나 우거져쌌는지 질을 내서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없드라. 산소 다 잃은 것 같다.“ 그게 내가 들은 마지막 정보였다.

수년 후 할아버지의 정보를 따라 살아 보지도 가보지도 않은 원적지(原籍地)로 갔다. 동네 어르신께 사정을 말하니 첫 마디가 이미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그래도 직접 확인해보고자 찾아가 봤다. 하지만 의구한 산천도 아니고 인간과 인연을 끊은 다른 세계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내 아버지의 산소를 잃고 말았다. 스스로 위로하기를 어차피 자연으로 돌아가신 것인데 해 버렸다. 그리고 어머니도 자의건 타의건 아버지가 그리된 상태에서 그렇게 놔버리면 되겠다 싶었다. 나는 아예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이리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내가 이미 합리화했던 양심이 가책 같은 동요를 일으켰다고나 할까.

흔적은 결국 남은 자들의 몫 아닌가. 가끔은 그걸 빌미로 모이고 조상의 뿌리도 생각하겠지만 그 또한 남의 이목이나 자기 위안이 적당히 짝짜꿍한 짓 같기 때문이다. 그래 내 마지막 인사는 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나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었으면 싶은 것이다. 어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한다. 13매

 

*기계총 : 머리 밑에 피부 사상균이 침입하여 일어나는 피부병인 ‘두부 백선(頭部白癬)’

최원현

『한국수필』에 수필(1989), 『조선문학』에 문학평론(2008) 등단. 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수필문학상 수상 외. 《날마다 좋은 날》외 19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