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우(인천대학교 명예교수)
인간의 꿈, 바다와 숲.
자연은 누가 만들었을까? 사람은 아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물건이다. 물건을 거저 받았을 땐, 준 사람에게 고맙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물건들은 사람의 삶에서 없어도 될 것들이 많다. 그러나 자연의 혜택은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런데도 고마워하지 않는다. 고마워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없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신비(神秘)라는 말의 뜻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반드시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을 노자는 도(道)라고 했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했으며, 불교에서는 법(法)이라고 했다. 도(道)는 철학적 개념이라서, “도님, 고맙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고맙습니다.”라고 한다.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말씀이 육신을 이룬 성육신이 예수님이고, 불교에서는 법이 육신을 이룬 법신불(法身佛)이 부처님이다.
기독교인이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무엇을 감사하느냐가 문제이다. 감사의 내용이 무엇이냐 라는 것이다. 아마도 감사의 내용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쓸 수 있는 물건의 소유에 대한 감사일 것이다. 사람이 만든 물건의 소유는 부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물질적 축복에 대한 감사이다. 자연의 혜택은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이다. 그런데도 고마움을 모른다. 왜 그럴까. 나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주신 혜택을 다 같이 누리는데, 왜 나만 감사해야 하나. 나에게만 이라는 이기심은 결코 감사라는 마음의 꽃을 피우지 못한다. 감사와 고마움은 분명히 아름다운 마음의 꽃이다. 동물성인 육신은 꽃과 잎을 피울 수가 없다. 동물은 꽃을 피울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을 위한 하늘의 혜택 중에서, 첫째가 빛이고, 둘째가 공기이며, 셋째가 물이다. 첫째의 빛은 생명 자체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한 것은, “생명이 있으라 하시니 생명이 있었고”와 같은 말씀이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신 천신(天神, 萬物引出者)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1-5)”고 했다. 이것은 “신(神)은 곧 빛이시라”와 같은 말씀이다. 이 신(神)이 사람의 안으로 들어오면 정신(精神) 곧 마음이 된다. 그러니까 1.3%의 신의 유전자가 곧 정신(精神)이며, 빛이 되어야 할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은 빛이 되어야 할 불씨이다. 빛이 되려면 불꽃으로 피어나야 한다. 고마워하는 마음이 세상을 밝히는 불꽃이다. 이 불꽃이 빛날수록 서로의 마음이 환하게 밝혀질 것이다.
둘째의 공기(空氣)는 하늘기운이다. 공기(空氣)의 공(空)은 원래 하늘 공(空)자이다. 창공(蒼空)은 푸른 하늘이란 뜻이다. 하늘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반드시 있는” 신비이기 때문에, 하늘이 빈 집이라는 뜻으로, 빌 공(空)자로 쓰인 것이다. 이 하늘 공(空)자는 ‘빈 집을 만들다’라는 뜻을 상형한 글자이다. 바꾸어 말하면 ‘마음을 비우다’라는 뜻의 상형이다. 하늘은 원래 비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하늘기운을 ‘빈 기운’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 기독교인은 이 하늘기운을 “하나님의 숨결”이라고 하면 더욱 은혜로울 것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하나님의 숨결”이 내 몸에 드나든다고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 숨을 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숨결과 사귀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하늘은 곧 자연이다. 그래서 자연(自然)을 천연(天然)이라고 한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자연의 사물(事物)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예술작품이다. 그래서 자연의 사물에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다.
셋째의 물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보여주신 작품이다. 빛도 안 보이고, 공기도 안 보이지만 물은 보인다. 인간에게 “물을 보고 물에서 배워라”라고 하신 것이다. 물에 숨겨 놓은 하나님의 뜻을 제일 먼저 깨우친 사람이 노자(老子)이다. 그래서 노자는 “가장 좋은 삶은 물처럼 사는 것이다.(上善若水)”라고 했다. 물은 한사코 낮은 자리로 가서 아랫것이 되려고 한다. 그래서 아래로만 흐른다. 빨리 낮아질수록 기뻐한다. 높은 곳에서 태어난 맑고 고귀한 품성일수록 더욱 빨리 낮아진다. 산비탈에선 노래하며 춤까지 춘다. 낭떠러지에선 온몸을 던져 깨치며 하늘과 하나가 되었다고 소리 높여 노래한다. 제 몸을 깨치며 부르는 감사의 노래가, 그 둘레에 있는 생명들의 목을 축여주고, 귀를 열어주며, 눈을 띄워 준다. 폭포 앞에서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물은 이 땅 위에서의 삶을 상징한다. 나를 깨쳐 낮은 곳으로 가면 마침내 바다가 된다고 가르친다. 바다가 되어야 하늘이 그 가슴 속에 들어와 하나가 된다.
물은 몸이다. 과학적으로도 수소 둘과 산소 하나의 모음이다. 수소가 둘인 것은 땅에서 살라는 것이고, 산소가 하나인 것은 하늘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은 몸이다. 육체는 땅에서 살라는 수소의 성분이고, 마음은 하늘을 잊지 말라는 산소의 성분이다. 다시 말해 육체는 물이고, 마음은 불이다. 물은 땅을 살리는 땅의 수액이고, 피는 육체를 살리는 몸의 혈액이다. 나는 앞에서 육체와 영혼을 모은 것이 몸이며, 몸은 곧 사람이라고 했다.
사람은 곧 몸이기 때문에 혼자서 살 수 없다. 인간 곧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모여서 힘을 모아 하나처럼 살면 얼마나 좋을까. 좋은 줄 알면서도 그게 쉽지 않다. 왜 그럴까. 나 때문이다. 내 마음 때문이다. 물은 제 몸이 따로 없으니까 만나면 한 몸이 된다. 육체는 물이라고 했다. 그래서 육체는 한 몸이 되기 쉽다. 안 되면 강제로라도 섞으면 한 몸이 된다. 부부가 되는 것을 가리켜 살을 섞는다고 한다. 살을 섞었다가도 마음이 섞이지 않으면 헤어진다. 그렇다. 마음이 문제다.
마음은 불이라고 했다. 한 불이 다른 불과 섞이면 큰 불이 된다. 이 큰 불이 문제이다. 섞여서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큰 불은 작은 불을 잡아먹는다. 그리고 불길은 위로만 타오른다. 그래서 높은 불이 큰 불이다. 높이 오른 놈이 큰 놈이다. 노예보다 평민이 큰 놈이고, 평민보다 귀족이 큰 놈이며, 귀족보다 왕족이 큰 놈이다. 회사에서, 직원, 주임, 계장, 과장, 부장의 순서대로 종적인 관계만 있으면 그 회사는 한 몸이 될 수 없다. 내가 높고, 내가 크다는 자존심과 자만심으로는 바다가 될 수 없다. 바다가 되면 저절로 수평이 이루어진다.
바다는 한 몸이다. 높은 놈도 없고, 큰 놈도 없는 수평이다. 그런데 큰 놈도 있고, 작은 놈도 있으며, 높은 놈도 있고, 낮은 놈도 있지만, 잘 어울리는 것이 숲이다. 그래서 숲을 가리켜 ‘나무의 바다’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수해(樹海)이다. 민주사회라는 인간의 바다는 종적관계의 질서가 아니라, 횡적관계의 조화(調和)가 생명이다. 조화는 우리말로 어울림이다. 그래서 인간이 꿈꾸는 민주사회의 모습이 숲이다.
유승우(본명-유윤식 호-한숲). ‘현대문학’지로 등단(1966년, 박목월 추천). 1939년 강원도 춘성산. 가평 초, 중, 고 졸업. 경희대학교국문과 졸. 한양대학교 대학원 졸-문학박사. 인천대학교 교수 역임. 인천시민대학 학장 역임. 인천대학교 명예교수(현). 사)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역임. 사)한국기독교문인협회 이사장 역임. 사)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현). 사)국제펜한국본부 고문(현). 수상-경희문학상(1988). 후광문학상(1994). 한국기독교문화예술대상(2003). 창조문예문학상(2011). 심연수문학상(2011). 상록수문예대상(2019). 시집-바람변주곡(1975). 나비야 나비야(1979). 그리움 반짝이는 등불 하나 켜 들고(1983). 달빛연구((1993). 물에는 뼈가 없습니다(2010). 숲의나라, 노래와 춤(2019) 등 11권. 저서-한글시론(1983). 몸의 시학(2005) 등 5권. 자서전 『시인 유승우』 출간(2014).
유승우(인천대학교 명예교수)
인간의 꿈, 바다와 숲.
자연은 누가 만들었을까? 사람은 아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물건이다. 물건을 거저 받았을 땐, 준 사람에게 고맙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물건들은 사람의 삶에서 없어도 될 것들이 많다. 그러나 자연의 혜택은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런데도 고마워하지 않는다. 고마워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없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신비(神秘)라는 말의 뜻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반드시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을 노자는 도(道)라고 했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했으며, 불교에서는 법(法)이라고 했다. 도(道)는 철학적 개념이라서, “도님, 고맙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고맙습니다.”라고 한다.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말씀이 육신을 이룬 성육신이 예수님이고, 불교에서는 법이 육신을 이룬 법신불(法身佛)이 부처님이다.
기독교인이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무엇을 감사하느냐가 문제이다. 감사의 내용이 무엇이냐 라는 것이다. 아마도 감사의 내용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쓸 수 있는 물건의 소유에 대한 감사일 것이다. 사람이 만든 물건의 소유는 부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물질적 축복에 대한 감사이다. 자연의 혜택은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이다. 그런데도 고마움을 모른다. 왜 그럴까. 나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주신 혜택을 다 같이 누리는데, 왜 나만 감사해야 하나. 나에게만 이라는 이기심은 결코 감사라는 마음의 꽃을 피우지 못한다. 감사와 고마움은 분명히 아름다운 마음의 꽃이다. 동물성인 육신은 꽃과 잎을 피울 수가 없다. 동물은 꽃을 피울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을 위한 하늘의 혜택 중에서, 첫째가 빛이고, 둘째가 공기이며, 셋째가 물이다. 첫째의 빛은 생명 자체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한 것은, “생명이 있으라 하시니 생명이 있었고”와 같은 말씀이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신 천신(天神, 萬物引出者)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1-5)”고 했다. 이것은 “신(神)은 곧 빛이시라”와 같은 말씀이다. 이 신(神)이 사람의 안으로 들어오면 정신(精神) 곧 마음이 된다. 그러니까 1.3%의 신의 유전자가 곧 정신(精神)이며, 빛이 되어야 할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은 빛이 되어야 할 불씨이다. 빛이 되려면 불꽃으로 피어나야 한다. 고마워하는 마음이 세상을 밝히는 불꽃이다. 이 불꽃이 빛날수록 서로의 마음이 환하게 밝혀질 것이다.
둘째의 공기(空氣)는 하늘기운이다. 공기(空氣)의 공(空)은 원래 하늘 공(空)자이다. 창공(蒼空)은 푸른 하늘이란 뜻이다. 하늘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반드시 있는” 신비이기 때문에, 하늘이 빈 집이라는 뜻으로, 빌 공(空)자로 쓰인 것이다. 이 하늘 공(空)자는 ‘빈 집을 만들다’라는 뜻을 상형한 글자이다. 바꾸어 말하면 ‘마음을 비우다’라는 뜻의 상형이다. 하늘은 원래 비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하늘기운을 ‘빈 기운’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 기독교인은 이 하늘기운을 “하나님의 숨결”이라고 하면 더욱 은혜로울 것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하나님의 숨결”이 내 몸에 드나든다고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 숨을 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숨결과 사귀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하늘은 곧 자연이다. 그래서 자연(自然)을 천연(天然)이라고 한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자연의 사물(事物)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예술작품이다. 그래서 자연의 사물에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다.
셋째의 물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보여주신 작품이다. 빛도 안 보이고, 공기도 안 보이지만 물은 보인다. 인간에게 “물을 보고 물에서 배워라”라고 하신 것이다. 물에 숨겨 놓은 하나님의 뜻을 제일 먼저 깨우친 사람이 노자(老子)이다. 그래서 노자는 “가장 좋은 삶은 물처럼 사는 것이다.(上善若水)”라고 했다. 물은 한사코 낮은 자리로 가서 아랫것이 되려고 한다. 그래서 아래로만 흐른다. 빨리 낮아질수록 기뻐한다. 높은 곳에서 태어난 맑고 고귀한 품성일수록 더욱 빨리 낮아진다. 산비탈에선 노래하며 춤까지 춘다. 낭떠러지에선 온몸을 던져 깨치며 하늘과 하나가 되었다고 소리 높여 노래한다. 제 몸을 깨치며 부르는 감사의 노래가, 그 둘레에 있는 생명들의 목을 축여주고, 귀를 열어주며, 눈을 띄워 준다. 폭포 앞에서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물은 이 땅 위에서의 삶을 상징한다. 나를 깨쳐 낮은 곳으로 가면 마침내 바다가 된다고 가르친다. 바다가 되어야 하늘이 그 가슴 속에 들어와 하나가 된다.
물은 몸이다. 과학적으로도 수소 둘과 산소 하나의 모음이다. 수소가 둘인 것은 땅에서 살라는 것이고, 산소가 하나인 것은 하늘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은 몸이다. 육체는 땅에서 살라는 수소의 성분이고, 마음은 하늘을 잊지 말라는 산소의 성분이다. 다시 말해 육체는 물이고, 마음은 불이다. 물은 땅을 살리는 땅의 수액이고, 피는 육체를 살리는 몸의 혈액이다. 나는 앞에서 육체와 영혼을 모은 것이 몸이며, 몸은 곧 사람이라고 했다.
사람은 곧 몸이기 때문에 혼자서 살 수 없다. 인간 곧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모여서 힘을 모아 하나처럼 살면 얼마나 좋을까. 좋은 줄 알면서도 그게 쉽지 않다. 왜 그럴까. 나 때문이다. 내 마음 때문이다. 물은 제 몸이 따로 없으니까 만나면 한 몸이 된다. 육체는 물이라고 했다. 그래서 육체는 한 몸이 되기 쉽다. 안 되면 강제로라도 섞으면 한 몸이 된다. 부부가 되는 것을 가리켜 살을 섞는다고 한다. 살을 섞었다가도 마음이 섞이지 않으면 헤어진다. 그렇다. 마음이 문제다.
마음은 불이라고 했다. 한 불이 다른 불과 섞이면 큰 불이 된다. 이 큰 불이 문제이다. 섞여서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큰 불은 작은 불을 잡아먹는다. 그리고 불길은 위로만 타오른다. 그래서 높은 불이 큰 불이다. 높이 오른 놈이 큰 놈이다. 노예보다 평민이 큰 놈이고, 평민보다 귀족이 큰 놈이며, 귀족보다 왕족이 큰 놈이다. 회사에서, 직원, 주임, 계장, 과장, 부장의 순서대로 종적인 관계만 있으면 그 회사는 한 몸이 될 수 없다. 내가 높고, 내가 크다는 자존심과 자만심으로는 바다가 될 수 없다. 바다가 되면 저절로 수평이 이루어진다.
바다는 한 몸이다. 높은 놈도 없고, 큰 놈도 없는 수평이다. 그런데 큰 놈도 있고, 작은 놈도 있으며, 높은 놈도 있고, 낮은 놈도 있지만, 잘 어울리는 것이 숲이다. 그래서 숲을 가리켜 ‘나무의 바다’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수해(樹海)이다. 민주사회라는 인간의 바다는 종적관계의 질서가 아니라, 횡적관계의 조화(調和)가 생명이다. 조화는 우리말로 어울림이다. 그래서 인간이 꿈꾸는 민주사회의 모습이 숲이다.
유승우(본명-유윤식 호-한숲). ‘현대문학’지로 등단(1966년, 박목월 추천). 1939년 강원도 춘성산. 가평 초, 중, 고 졸업. 경희대학교국문과 졸. 한양대학교 대학원 졸-문학박사. 인천대학교 교수 역임. 인천시민대학 학장 역임. 인천대학교 명예교수(현). 사)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역임. 사)한국기독교문인협회 이사장 역임. 사)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현). 사)국제펜한국본부 고문(현). 수상-경희문학상(1988). 후광문학상(1994). 한국기독교문화예술대상(2003). 창조문예문학상(2011). 심연수문학상(2011). 상록수문예대상(2019). 시집-바람변주곡(1975). 나비야 나비야(1979). 그리움 반짝이는 등불 하나 켜 들고(1983). 달빛연구((1993). 물에는 뼈가 없습니다(2010). 숲의나라, 노래와 춤(2019) 등 11권. 저서-한글시론(1983). 몸의 시학(2005) 등 5권. 자서전 『시인 유승우』 출간(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