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문학의 주소

2021-09-10

         김지원시인


기독교문학의 주소


나는 반공주의자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은 반공주의자다. 내가 반공주의자가 된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어려서부터 받은 세뇌교육 때문이다. 물론 세뇌 교육이라 하여 무슨 특별한 교육을 따로 받은 것은 아니고 흔히 내 주변에서 들리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거나 또는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이 간간히 가르치신 가르침, 그리고 반공 웅변대회가 열릴 때 연사들이 외치던 말들을 귀동냥했던 것들이었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반공”또는 “방첩” 이란 표찰을 늘 가슴에 달고 다녔다. 그리고 불조심 표어와 함께 동네 담벼락에 붙어있던 “이웃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등의 표어도 보면서 성장했다. 당시에는 잡지도 흔치 않던 시대인데 어디를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잡지가 있었다. “자유의 벗”이었다. 그런데 다 기억 할 수는 없지만 그 잡지의 맨 뒤에는 만평이 있었는데 그 만평에 그려진 공산당은 흉악한 괴물이거나 피 흘리는 마귀 또는 머리에 뿔달린 도깨비의 형상쯤으로 묘사된 것이어서 볼 때 마다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 나를 세뇌시킨 일에 일조했던 것들이다

 

가끔 우리는 어떻게 북한에서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3대 독제 세습이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간간히 뉴스 시간에 방영되는 그들의 집단체조 광경이나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계적인 동작과 열병식을 보게 된다. 그 뿐 아니라 가두에서 한복을 입고 붉은 꽃을 흔들어 대며 열광적으로 환호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불가사의 하다는 느낌마저 받을 때도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한 것일까. 그러나 그들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 역시 어려서부터 세뇌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반복적으로 학습되어진 것들로 인해 다른 것을 미처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 그들이나 추구하는 것은 다를 지라도 세뇌되었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목회자들 가운데는 자기가 배운 신학이나 신조를 지상 최고의 선이라 맹신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역시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고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듣고 학습되어진 것을 보수 하려는 본능적인 고집 때문에 빚어진 일들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른 시각이나 견해는 철저히 배척하고 정죄하며 인간적으로 단절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은 평생 학습된 그 도그마의 틀 속에 갇혀 산다. 어떻게 보면 행복한 일이기도 하지만 불행한 일이기도 하다.

짐승들에게 각인 효과라는 것이 있다. 세상에 태어나서 맨 먼저 본 것을 제 어미로 기억하고 따르는 것을 말한다. 특별히 날짐승 이거나 날짐승 중에서도 거위나 기러기 또는 청둥오리 같은 철새들은 더 분명하다. 물론 이런 일들이 일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제 어미를 한 번 놓치면 대오의 이탈자가 되고 당장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날짐승 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개나, 소 그리고 말이나, 사람도 동일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희랍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물래 돌리는데 방해가 된다며 자기 손가락을 도끼로 잘라버렸다. 끔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카잔차키스는 생전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인이다”라는 묘비명을 미리 써 놨는데 그는 지금 그 묘비명 아래 고이 잠들어있다. 하지만 눈을 빼고 손가락을 자르는 잔혹한 이야기는 성경에도 등장한다. “누구든지 오른 눈이 실족케 하거든 빼내버리라. 누구든지 오른 손이 실족케 하거든 잘라버리라.” 한 것이다. 영혼의 자유 함을 얻기 위한 말씀이다.

 

해가 지면 학습되어진 동물들은 우리를 찾는다. 미끼로 길들여진 동물들은 시간이 되면 착유실에 들어가고, 수족관에서 쇼를 하고, 무대에서 재주를 넘고, 대가로 먹이를 얻는다. 양몰이 개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양을 몰아 산등성이를 내 달리고 군용견은 수색과 정찰을 하고 폭발물을 탐지하다 목숨을 잃기도 한다. 숭고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학습을 완강히 거부 하는 것들도 있다. 야크는 방목해서 길러야지 우리에 가두면 먹이도 먹지 않고 새끼도 낳지 않는다. 수족관에 갇힌 백상아리는 식음을 전폐하므로 죽음을 선택한다. 식별번호 53번을 달고 있던 지리산 반달곰은 세 번이나 수도산 쪽으로 탈출을 시도하다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왼쪽 앞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다. 왜, 무엇 때문에 안락한 복음자리를 버리고 탈출을 감행했을까. 반달곰 종 복원사업본부는 이제 그를 놔 주기로 결정했다. 동물뿐인가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장수하늘소와 소금쟁이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늑대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어느 땐가 우리 집 베란다 화분에 심어 논 남산제비꽃 역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죽음으로서 거주지를 박탈당한 자신을 항변한 것이다. 다 자유에의 갈망 때문이다.

문학의 기저는 상상력과 자유다. 문학의 생명력은 낡은 사고의 틀을 깨트릴 때 폭발적인 에너지를 방출하게 된다. 그러나 세뇌되어진 문학은 희망도 절망도 없는 한낱 생각의 배설물이며 죽은 낱말의 시체에 불과하다. 문학이 최소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유를 향한 사유의 몸짓이 필요하다. 이미 학습되어진 것을 나열하거나 길들여진 생각이라면 관객의 비위에 장단을 맞추려는 어릿광대의 가여운 몸짓에 지나지ㅐ 않는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유대교의 낡은 틀을 깨는 것이었다.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은 길들여진 오류에 대한 거부였다. 문학에서 실험이나 해체는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 모색이다. 계절 마다 바뀌는 패션쇼는 옛것을 벗는 새로운 것을 갈아입는 시도다. 그렇다면 작금의 기독교 문학은 어떠한가. 답습된 틀을 벗는 것인가 아니면 입는 것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세뇌된 굴레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인가. 혼란스럽다. 기독교문학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에게 달란트로 받은 은사를 남기려는 열정이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