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선(한신대 명예교수)
하나님의 섭리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섭리’란 가슴으로 이해하기는 쉬우나 글로 정리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개념이다. 섭리(攝理, providence)라는 말의 라틴어 ‘프로비데오’(provideo)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하나는 ‘미리 본다’는 예지(豫知)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미리 알고 대책을 세운다.’라는 의미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섭리(攝理)를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이라고 정의했고, 종교학에서는 “섭리란 신 또는 신적 존재의 피조물에 대한 계획과 의도를 말한다.”고 정의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섭리를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했다.
성경에는 ‘섭리’라는 직접적인 용어는 없으나, 세상만사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돌보심에 대해 많은 증언을 하고 있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 살피시는도다.”(시33:11-14)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마태6:8/표준새번역)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입니다.”(엡1:11/표준새번역) 이러한 성서적 시각에서의 섭리에는 하나님의 전능(全能), 예견(豫見), 배려(配慮)라는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창세기 37장 이하에 나오는 요셉의 일생을 예로 들어보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은 스무냥을 받고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았다. 요셉은 팔려가면서 한없이 형들을 원망하며 울었을 것이다. 이집트 땅에 팔려온 요셉은 보디발의 집 하인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당하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분명히 인간들이 저지른 사건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불의하고 비극적인 사건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실현하신다. 옥에 갇힌 요셉은 바로의 빵 맡은 시종장과 술 맡은 시종장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꿈을 해석해 준다. 이 일로 인해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해주게 되고, 그의 명철과 슬기에 감탄한 바로는 요셉을 국무총리로 임명한다. 국무총리가 된 요셉은 이집트를 7년 가뭄으로부터 구해낸 영도자가 되었고, 자신의 가족과 동족들까지 이집트에 정착하게 한다.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에 온 형들을 만났을 때 요셉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이 말에서 추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란 화(禍)를 복(福)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의 선견(先見)과 돌보심을 말한다. 성경에는 이러한 증언들이 무수히 많다.
칼빈(J. Calvin)은 창조론과 섭리론을 하나의 교리로 묶어서 정리했다. 그는 ‘기독교강요’의 섭리론 첫 부분에서 이렇게 전제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섭리로서 돌보시고 보호하시며 각 부분들을 다스리신다. 창조주 하나님은 곧 섭리자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섭리란 신앙의 눈으로만 통찰할 수 있는 하나님의 활동이다.” 즉 하나님은 창조주로서의 그의 일을 멈추신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영원히 다스리시고 보존하시되 어떤 기계적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으신 만물을 유지하시고 발전하게 하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특수한 섭리에 의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운명이나 우연한 사건과는 다르다. 섭리는 오직 단독자이시며 지배자이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자신의 지혜와 의지로 자신이 하실 일을 정하시고, 또한 그 정하신 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실행하시는 것을 말한다. 이 섭리는 옛날 스토아학파(stoicism)가 말한 운명론과는 다르다. 스토아학파의 운명론에 의하면 신이 한 번 결정한 것은 사람이 바꿀 수 없다. 결국 모든 사건의 책임이 전적으로 운명을 쥐고 있는 신에게 있고, 인간은 다만 운명의 노예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고 운명에 거역하는 것은 곧 신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이다.
칼빈이 말하는 섭리란 이러한 운명론과는 다르다. 근본적으로 칼빈은 운명론을 부정한다. 왜냐면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자연의 맹목적성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는 것은 자연의 맹목적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관에 이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즉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섭리에 손길에 의해서 운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섭리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의 교리에서 나오는 파생적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섭리한 피조물을 대상으로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 전체를 말한다. 즉,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며, 세상에서 생성하는 모든 일에 관여하시며, 만물을 그 정해진 목적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될 수 없는 신비로운 사역이며, 신앙의 눈으로 관찰하고 해석할 때 그 의미가 살아날 수 있다.
강영선(한신대 명예교수)
하나님의 섭리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섭리’란 가슴으로 이해하기는 쉬우나 글로 정리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개념이다. 섭리(攝理, providence)라는 말의 라틴어 ‘프로비데오’(provideo)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하나는 ‘미리 본다’는 예지(豫知)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미리 알고 대책을 세운다.’라는 의미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섭리(攝理)를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이라고 정의했고, 종교학에서는 “섭리란 신 또는 신적 존재의 피조물에 대한 계획과 의도를 말한다.”고 정의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섭리를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했다.
성경에는 ‘섭리’라는 직접적인 용어는 없으나, 세상만사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돌보심에 대해 많은 증언을 하고 있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 살피시는도다.”(시33:11-14)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마태6:8/표준새번역)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입니다.”(엡1:11/표준새번역) 이러한 성서적 시각에서의 섭리에는 하나님의 전능(全能), 예견(豫見), 배려(配慮)라는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창세기 37장 이하에 나오는 요셉의 일생을 예로 들어보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은 스무냥을 받고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았다. 요셉은 팔려가면서 한없이 형들을 원망하며 울었을 것이다. 이집트 땅에 팔려온 요셉은 보디발의 집 하인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당하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분명히 인간들이 저지른 사건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불의하고 비극적인 사건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실현하신다. 옥에 갇힌 요셉은 바로의 빵 맡은 시종장과 술 맡은 시종장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꿈을 해석해 준다. 이 일로 인해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해주게 되고, 그의 명철과 슬기에 감탄한 바로는 요셉을 국무총리로 임명한다. 국무총리가 된 요셉은 이집트를 7년 가뭄으로부터 구해낸 영도자가 되었고, 자신의 가족과 동족들까지 이집트에 정착하게 한다.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에 온 형들을 만났을 때 요셉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이 말에서 추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란 화(禍)를 복(福)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의 선견(先見)과 돌보심을 말한다. 성경에는 이러한 증언들이 무수히 많다.
칼빈(J. Calvin)은 창조론과 섭리론을 하나의 교리로 묶어서 정리했다. 그는 ‘기독교강요’의 섭리론 첫 부분에서 이렇게 전제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섭리로서 돌보시고 보호하시며 각 부분들을 다스리신다. 창조주 하나님은 곧 섭리자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섭리란 신앙의 눈으로만 통찰할 수 있는 하나님의 활동이다.” 즉 하나님은 창조주로서의 그의 일을 멈추신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영원히 다스리시고 보존하시되 어떤 기계적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으신 만물을 유지하시고 발전하게 하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특수한 섭리에 의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운명이나 우연한 사건과는 다르다. 섭리는 오직 단독자이시며 지배자이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자신의 지혜와 의지로 자신이 하실 일을 정하시고, 또한 그 정하신 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실행하시는 것을 말한다. 이 섭리는 옛날 스토아학파(stoicism)가 말한 운명론과는 다르다. 스토아학파의 운명론에 의하면 신이 한 번 결정한 것은 사람이 바꿀 수 없다. 결국 모든 사건의 책임이 전적으로 운명을 쥐고 있는 신에게 있고, 인간은 다만 운명의 노예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고 운명에 거역하는 것은 곧 신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이다.
칼빈이 말하는 섭리란 이러한 운명론과는 다르다. 근본적으로 칼빈은 운명론을 부정한다. 왜냐면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자연의 맹목적성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는 것은 자연의 맹목적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관에 이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즉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섭리에 손길에 의해서 운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섭리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의 교리에서 나오는 파생적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섭리한 피조물을 대상으로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 전체를 말한다. 즉,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며, 세상에서 생성하는 모든 일에 관여하시며, 만물을 그 정해진 목적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될 수 없는 신비로운 사역이며, 신앙의 눈으로 관찰하고 해석할 때 그 의미가 살아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