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위우사명(爲友舍命.요15:13)

      장상훈 논설위원

    한문성경연구소장


위우사명(爲友舍命.요15:13)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우리 속담에 ‘먼 사촌 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라는 말이 있다. 선조들은 가까운 이웃끼리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 돕고 사는 것이 먼 친척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원족근린(遠族近隣)’ 즉 ‘먼 친족과 가까운 이웃’이라는 뜻이나 ‘격장지린(隔墻之隣)’ 즉 ‘담을 사이에 둔 이웃’이라는 말도 모두 이웃사촌이라는 뜻이다. ‘원수불구근화(遠水不救近火)’라는 말도 ‘멀리 있는 물로는 가까이에서 난 불을 끄지 못한다’라는 뜻인데 가까운 이웃이 멀리 사는 친족보다 낫다는 말이다. 잠언에서도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잠27:10)”라고 했고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18:24)”라고도 했다. 성경은 이미 잠언에서부터 혈연관계의 가족주의를 넘어 서고 있다. 예수께서도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곧 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선언하셨다(마12:50).

친구라고 해서 다 친구가 아니다. 욥기에서는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욥16:20)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욥19:19)”라고 어려울 때 도와 줄 친구가 하나도 없는 것을 한탄했다. 시편에서도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41:9)”라고 우정의 배반을 탄식했다. ‘그의 발꿈치를 들었다’라는 뜻은 ‘향아거종(向我擧踵.시41:9)’이라는 말인데 ‘나를 향하여 발꿈치를 들었다’라는 뜻으로 태권도의 앞차기와 같다. 정면(正面)에서 은혜를 원수로 갚은 친구의 배신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친구를 잘못 선택하여 사귀면 나중에 헤어지기가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친구 선택을 신중하게 하는 것이 젊은 날의 지혜이다. 그래서 조선의 실학자들은 열매를 맺지 않는 꽃은(不結子花.불결자화) 심지 않았으며(休要種.휴요종) 의리가 없는 친구는(無義之朋.무의지붕) 사귈 수 없다(不可交.불가교)라고 했다. 논어에서는 “익자삼우 손자삼우(益者三友 孫者三友.논어계씨편16-4)”라는 말을 했는데 ‘나에게 유익한 친구가 세 종류가 있고 나에게 손해되는 친구가 세 종류가 있다’는 뜻이다. 유익한 벗은 ‘우직(友直) 우량(友諒) 우다문(友多聞)’이라고 했다. ‘정직한 사람을, 신의가 있는 사람을, 견문이 넓은 사람을 벗한다’라는 뜻으로 필자는 해석한다. 해로운 벗은 ‘우편벽(友便辟) 우선유(友善柔) 우편녕(友便佞)’이라고 했다. ‘편벽된 외곬수을, 줏대없이 나약하고 좋기만한 사람을, 말 재주를 부리는 사람을 벗 한다’라고 했는데 이런 사람과 벗하면 해(害)가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유익할 만한 친구를 찾아서 사귀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내가 유익한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매일 자신의 내면의 덕을 쌓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내면의 덕이 차고 넘쳐서 성대한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유익한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성덕광휘(盛德光輝)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벗이 될 수 있었다. 성덕광휘(盛德光輝)란 ‘안으로 덕이 성대하여 밖으로 그 빛이 찬란하게 빛난다’라는 뜻이다.

논어에 보면 “무우불여기자(無友不如己者.학이편1-8)”라는 말을 했다. ‘자기 보다 못한 자를 벗하지 말라’라는 뜻이다. 자기 자신보다 학문이나 경험이 뛰어난 사람과 벗하는 것은 자기의 향상을 위해서 보탬이 될 것이다. 인격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존경할 수 있는 상대와 벗을 삼으면 유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이다. 예수의 반대편에 있던 자들이 예수를 비난하기 위해서 한 말이기는 하지만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11:19)”라고 했다. 당시 ‘세리와 죄인들’은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사람들이었고 천대받고 버림 받은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한문성경에서는 “기식호주 세리급죄인지우(嗜食好酒 稅吏及罪人之友.마11:19)”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자기 보다 못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기를 즐겼고 술을 좋아 했으며 죄인들의 친구였다. 예수의 치유 사역에 있어서 만난 모든 사람들도 기존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버림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예수께 직접 찾아오기도 했으며(눅15:1)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셨고(마19:14.막9:39.막10:14) 그들을 직접 찾아 가시기도 하셨다. 죄인 삭개오 세리의 집에 유하셨고(눅19:5) 세리 삭개오는 그 동안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을 처분하여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라고 회심을 고백하기도 했다. 예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눅19:9)”고 선언하셨고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눅19:9)”이라고 정체성의 회복을 선포하셨다. 누가는 이러한 예수의 삶을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라고 설명했다. 한문성경에서 예수께서는 일찍이 “비초의인 내초죄인(非招義人 乃招罪人.마9:13)”이라는 파격적인 선언을 하신 적이 있다.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마20:28)”라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집권자들은 정권을 잡아서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세도를 부리는 것을 즐기고 있지만 너희들은 반대로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마20:25-27)고 하셨다. 종이 되어 섬기는 철학을 당부하신 말씀이다. 스스로 종이 되어 섬기는 철학을 가진 친구의 우정이라면 이보다 더 큰 우정이 어디에 있겠는가?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친구’를 한문성경에서는 ‘벗 우(友)’ 자를 썼다. 우(友)라는 글자는 ‘동지위우(同志爲友)’라는 말인데 ‘뜻을 같이 하면 벗이 된다’라는 뜻이다. ‘벗 우(友)’ 자는 두 개의 又(손 우)를 따랐다. 又(우)는 手(수)이며 두 손은 두 사람을 표시한다.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서 서로 친하게 지내며 서로 돕는다는 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 자전에 의하면 우(友)는 ‘상선상조지의(相善相助之意)’라는 뜻이다. ‘서로 잘 지내며 서로 돕는다는 뜻이다’라고 우(友)를 설명했다. 일설에 의하면 두 사람이 서로 친하게 지내고 서로 돕는 것을 마치 좌우 두 손과 같다고 해서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치는 사람을 벗이라고 일컬는다고 했다. 그래서 천자문 제2장 군자수신지도(君子修身之道)에서 “교우투분(交友投分)하고 절차잠규(切磋箴規)라” 라는 말을 했다. 여기에서 절차(切磋)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준말이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기욱(淇奧)에 있는 말로 ‘짜르고 다듬고 쪼고 간다’는 뜻이다. 절차(切磋)만 말한 것은 4언구조에 맞춰 축약한 것이다. 잠규(箴規)는 경계하여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벗을 사귀는 데에는 의기에 투합하며 절차탁마하여 경계하고 바로잡아 준다’라는 뜻이다. 좋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권면하는 것이 진정한 친구이다.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서도 “책선 붕우지도야(責善 朋友之道也)”라는 말을 했다. ‘선을 권장함은 벗의 도리이다’라는 뜻이다. 잠언에서도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잠27:6)”이라고 했고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잠27:9)”라고 했다. 그런데 논어에서는 “충고이선도지 불가즉지 무자욕언(忠告而善道之 不可則止 無自辱焉.안연편12-23)”이라는 말을 했다. ‘친구에게 진심으로 말해주고 바르게 이끌어 주어라. 안 되면 그만두어서 자신을 스스로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뜻이다. 친구를 버리거나 배반하라는 뜻이 아니라 무리하게 억지로 인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논어 리인편에서도 “붕우삭 사소의(朋友數 斯疏矣.이인편4-26)”라는 말을 했다. 여기에서 ‘삭(數)’은 동사로 ‘자주 충고한다’는 뜻이다. ‘벗사이에 충고를 자주하면 이에 멀어지게 된다’라는 뜻이다. 좋은 말도 자주 하게 되면 소원해 지고 스스로 욕될 뿐이다. 임금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도 자주 간쟁하면 욕(辱)을 당한다고 했다. 임금, 부모, 스승, 목사, 부부, 자식, 교우, 친구 등등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충고를 자주 하면 소원해 지기는 마찬가지이다. 예(禮)가 없는 가까운 사이는 도리어 소원(疏遠)해 질 수 있다. 목사님을 위해서 드리는 충고라고 하면서 쓴 소리를 자주 되풀이 하면 소원해 질 수 밖에 없다. 사람은 스스로 자각할 줄 아는 존재이다. 충고에 진심이 있다면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을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동방의 지혜와 여유라고 할 수 있다.

“이문회우 이우보인(以文會友 以友輔仁.안연편12-24)”라는 유명한 말이 논어에 있다.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仁)을 돕는다’라는 뜻이다. 교회는 말씀으로 벗을 모으고 교우로써 믿음을 돕는 우정의 신앙공체이다, 모든 신자는 예수와 뜻을 같이하는 믿음의 벗이다. 벗은 믿음과 의리 곧 신의(信義)가 있어야 한다. 믿음과 의리의 우정을 쌓아가는 곳이 교회이다. 신의(信義)라는 문화는 우정의 기준이다. 이런 문화가 빠진 우정은 앙상한 이해관계일 뿐이다. 신의(信義)의 문화를 기초로 하는 우정은 사회를 어질게 만들어 간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신앙의 가치관을 우정으로써 확대해 가면서 우정사회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은 문화선교이다. 신자가 세상 속에서 신의(信義)를 지켜가면서 우정을 쌓아가는 것은 열광주의 신앙이나 전도주의와는 매우 다른 또 하나의 차분한 선교방식이 될 수 있다. 우정을 쌓아가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신의(信義)의 문화를 확대해 가는 문화선교방식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15:13)”라고 하셨다. 한문성경에서는 “위우사명(爲友舍命.요15:13)”이라고 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라는 뜻이다. 그리하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친구와 같이 사랑했던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라고 새 계명을 주셨다. 새 계명대로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요15:14)”라고 하셨다. 현재의 교회는 이러한 예수의 사랑과 뜻을 같이 하는 우정의 신앙공동체로 생생하게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로 고백하는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가장 큰 사랑을 몸소 성취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