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부활 – 정말 기뻐할 수 있는가?

윤응진(철학박사, 전 한신대학교 총장)


 예수의 부활 – 정말 기뻐할 수 있는가?

 

예수에 대한 재판과정들은 모두 이른 바 ‘절차적 정의’를 내세우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였다. 재판절차를 밟기 이전에 이미, 그를 처형하겠다는 정치적 의도가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부당하고 불법적인 재판과정의 희생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십자가에 달렸다. 그리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그 절망스러운 절규만 남기고 예수는 숨졌다. 그가 처형됨으로써,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혁명의 꿈도 무효화되고 말았다. 로마제국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구원받기 위하여 대안사회를 찾으려던 시도는 헛된 일로 판명이 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것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예수를 살해한 자들은 의기양양하여 활개치고 다녔다. 여전히 그들의 제국이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안도감에 사로잡혀, 그들은 그들의 수호신들에게 감사하며 이렇게 외쳤으리라: ‘로마의 평화’가 회복되었다!

반면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은 죽음만도 못한 삶을 연명해야만 했다. 이미 그들은 참으로 사람다운 한 사람을 만났고, 그의 가르침에 감동하였고, 그와 함께 지내면서 참된 자유와 사랑을 맛보았고,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름을 경험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그들이 겪어야만 하는 절망과 좌절은 그를 만나기 이전보다 더욱 더 처절하게 다가왔다. 지배자들의 폭력과 착취, 거짓말과 오만, 몰상식과 부정의가 만연한 사회를 불변하는 현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환멸과 무기력감으로 인해서 그들은 숨쉬기초차 힘들었으리라. 그리고 수많은 질문들이 끊임없이 떠올라서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으리라. 왜 예수는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어가야만 했을까?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현실은 변화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말인가? 그럼 구원받을 기회는 영원히 사라지고 만 것일까? - ‘지금’의 한국 상황에서야말로 우리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고 있다.

 

그런데 몇 여인들이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났다!”고 소식을 전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사실 그 여인들도 그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이 그 소식을 전할 뿐이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은 그가 처형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그것도 황제의 이름으로 처형된 사형수가 어떻게 부활한다는 말인가! 그런 소문에 들뜨기보다는 차라리 절망과 환멸에 빠져서 체념하고 주저앉아있는 것이 그나마 더 상식적인 행동이 아닌가?

그들을 그 혼란에서 구해준 것은 부활한 예수와의 직접적인 ‘만남’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그와 재회한 것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던 ‘그 예수’를 실제로 만났다고 증언한다. 그 증언이 없었다면, 그 증언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교회도 신약성서도 존재할 수 없었다. 그 증언이 없었다면, 예수는 잊혀야 하는 사형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뿔뿔이 흩어지고야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한 예수와 만남으로써, 그들의 인식과 사고방식에, 더 나아가 행동방식에 혁명적 변화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실로 유쾌한 반전이었다. 부활한 주님은 바로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던 ‘그 예수’이다. 하나님께서 그 예수를 부활시킴으로써, 심판받아야 할 것은 예수가 아니라 그를 처형한 대제사장과 로마제국,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예수가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한 메시아로서 그리고 주님으로서 입증되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예수가 옳았고 그의 활동이 정당하였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로마의 평화’는 제국의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고, 그 대신에 정의로운 ‘하나님의 평화’가 지상에 완성될 것이라는 희망만이 확실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로마황제’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게 된 것이다. 그 부활사건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혁명’ 운동을 계승하도록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였다. 이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그리스도인들)은 기득권 세력이 지배하는 ‘옛’ 세계에 대하여 절망하거나 타협할 수 없으며, 오직 세계를 새롭게 변혁하시는 ‘하나님의 혁명’이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무장하고, 예수가 시작한 운동을 계승하여야 한다. 그들은 더 이상 황제와 그 추종자들에게 머리를 숙일 수 없다. 그들의 주님은 황제가 아니라 오직 ‘예수’ 한 분 뿐이기 때문이다. - 바로 ‘예수의 부활’ 사건이 이러한 반전을 초래하였다. 그러니, 어찌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어찌 마침내 기뻐 환호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부활절’에 우리는 이러한 놀라움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가?

 

기독교가 성장하여 로마제국의 국교로 되었을 때, 그것은 사실상 기독교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 제국의 종교 이데올로기로 변질됨으로써 기독교가 패배한 것이었다. 기독교는, 예수가 십자가의 고난을 무릅쓰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바로 그 제국과 타협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복음의 내용도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사회적으로 구체적인 현실은 잊히고, 관념론적 체계 안에서 추상적인 종교적 교리들이 형성되었다. 예수의 죽음은 인간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속죄 제물로서 해석되었다. 본디오 빌라도를 비롯한 살인자들은 다만 그의 운명을 집행한 자들로 간주됨으로써 사실상 면죄부를 얻었다. 대제사장의 범죄는 (아마도 교황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하여) 아예 기억조차 되지 않았다. 결국 기독교는 민중들의 관심을 지옥과 천당, 심지어 연옥이라는 종교적 영역에 묶어둠으로써, 현실을 지배하는 자들의 악행을 은폐하거나 방조하였다. 심지어 기독교 자체가 지배세력이 되어 악행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매년 ‘사순절’에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기억하면서 그의 ‘대속’적 죽음에 대하여 감동하고 고마워한다. 그러나 제자들이 겪었던 충격과 절망과 슬픔을 느낄 수는 없다. 운명적 프로그램에 의하여 “예수는 죽어야 마땅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부활절’에, 예수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역사개입이 초래한 놀라움과 감동, 기쁨과 새로운 희망이 느껴질 수 있겠는가? 더구나, ‘천당’만 기대하고 있는 교인들이 어찌 그의 ‘부활’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무늬만 남아있는 “부활절의 기쁨”은 종교적 기만에 불과하다.


‘지금’처럼 사회변혁의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도, 그러므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려 애쓰는 것, 그리고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작은 몸짓이라도 시도하는 것! - 이것이 십자가에 달렸던 ‘그 예수’의 부활을 놀라움과 기쁨으로 체험한 신앙인이 취할 기본자세이다. 부활의 기쁨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저항운동을 촉진하는 불꽃이기 때문이다. (202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