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슨 뜻인가?

강 영 선 (한신대 명예교수)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슨 뜻인가?


인간은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하고, 그 모양을 만들어 놓고 섬기고 싶어 한다. 막연한 신 보다는 가시적인 신을 좋아하는 것이 종교적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그것은 자신의 인식능력 안에서, 또는 지식의 범주 안에서, 신을 파악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야훼 하나님은 인간들의 그러한 시도를 거절하신 분이다.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분이 인간의 좁디좁은 사고범주 안에 갇혀계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서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창1:27)라고 증언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이 당신의 모양을 본 따 인간을 만들었다는 뜻일까? 고대 근동의 신화에 의하면, 인간은 여신에게서 태어난 반신적(半神的) 존재였다. 그래서 시편 8편에서도 “인간을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는 표현이 나온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성서의 증언도 그런 뜻일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그리스도교 2천년 동안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다.

첫째로, 인간의 품성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라는 해석이다. 인간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내면적 특성, 즉 양심, 도덕성, 책임감, 정의감, 창조성 등에서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도덕성을 지닌 윤리적 존재이고, 환경을 변화시킬 줄도 알고, 새로운 것을 창조할 줄도 알고, 사회와 역사를 발전시킬 줄도 알고, 자신의 운명을 역전시킬 수 있는 능력도 지니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는 해석이다.

둘째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을 말한다는 해석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특별한 존재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을 창조의 파트너로 삼으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창2:15) 이러한 성서의 기록들을 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마치 부자지간 같은 관계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특별한 관계성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해석하기도 한다.

셋째로, 인간은 하나님과 의사소통 할 수 있는 영성적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해석이다. 인간은 대화적 존재요 영성적 존재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맑고 투명하다면, 그리고 우리의 영적 안테나를 잘 가동시키면, 하나님과도 소통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해석이다.

넷째로, 인간의 사회적 책임성 측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해석이다. 이것은 인간이 지닌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뜻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창1:28) 또한 에덴동산을 맡아서 관리할 책임도 부여해주셨다.(창2:15)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재창조의 사명과 동시에 통치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어느 왕이 다른 나라를 점령하면, 그 곳에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대리자에게 전권을 위임하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관리권을 위임받은 인간은 선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창조된 세계만물을 아름답게 관리해야 하는 권한과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해석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네 가지 해석은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타당성이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해석의 각도가 달라지고 강조점이 달라지는 것이다. 특히 네 번째 해석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생태계의 문제가 신학의 관심사로 등장한 1970년대 이후에 강조되고 있는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