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Humility)을 가르쳐 익히게 하라!

김윤규 목사(한신대학교 은퇴교수, 실천신학; 예배, 설교 목회)

 

 겸손(Humility)을 가르쳐 익히게 하라!

 

어린이날과 어버이주일이 포함된 5월은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의 여왕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분야의 ‘특권계층’에게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점점 약화되고 심지어 상실되어가는 현상에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요즈음 사회적인 계급과 차별을 항변하는 ‘전장연의 지하철농성’과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득권자들’의 끊임없는 폄훼와 왜곡이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20세기 독일의 탁월한 젊은 신학자, 목회자, 설교자요,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1906-1945)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비견할만한 ‘진정한 엘리트주의’(true elitism)를 표방함으로써, 소위 특권계층(Elite)은 오만하고 방자한 지배계층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인 차별과 소외로 고통 받는 약자들을 위해 겸손하게 봉사하고 섬겨야 할 특별한 사명과 책무가 주어졌다고 강변했음을 주목해야 한다(D. Bonhoeffer/김윤규 역, 디트리히 본회퍼의 목회학총론, 한신대학교출판부, 2012, 19).

예수께서도 사회적인 권력자, 재력가 그리고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강자들’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병들고 억울하게 옥살이(유전무죄, 무전유죄)하는 사람들 -소위 약자들- 을 돌봐야 할 책임이 있음을 ‘양과 염소의 비유’(마태 25:31-46)로써 강하게 역설하셨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누가 (타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유능하고 효율적이며 위대한 사람(지도자)인가?”라는 쟁론에 “작은 자들”(μικρος)과 “섬기는 자들”과 “겸손한 자들”이라고 단호하게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6-48) ; 예수께서 …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막 9:35) ; 제자들이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1,4)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연금술사』의 저자인 코엘료도 결어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수도원을 찾으셨다. 사제들이 길게 줄을 서서 성모께 경배를 드렸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시를 낭송했고, 어떤 이는 성서를 그림으로 옮겨 보여드렸다. 성인들의 이름을 외우는 사제도 있었다. 줄 맨 끝에 있던 사제는 볼품없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은 적이 없었다. 곡마단에서 일하던 아버지로부터 공을 가지고 노는 기술을 배운 게 고작이었다. 다른 사제들은 수도원의 인상을 흐려놓을까 봐 그가 경배 드리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아기 예수와 성모께 자신의 마음을 바치고 싶어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오렌지 몇 개를 꺼내더니 공중에 던지며 놀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그가 보여드릴 수 있는 유일한 재주였다. 아기 예수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성모께서는 그 사제에게만 아기 예수를 안아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파울로 코엘료, 최정수 역, 『연금술사』(서울: 문학동네 세계문학, 20011, 200534, 272-273).

 

쟁쟁한 사제들에 밀려 왕따 당한 채 줄 맨 끝으로 밀쳐진 볼품없는 사제를 과연 아기 예수께서 유일하게 제일 먼저 만나주실까? 그것도 환하게 웃음 짓고 손뼉까지 치면서 … 결론적으로 곡예사처럼 공을 돌리는 재능밖에 없는 ‘비천한 사제’에게만 아기 예수를 안아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것은 일반적인 판단과 평가기준을 뛰어넘는 참으로 역설적(paradoxical)인 일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의 오만함과 이기주의(selfish)의 팽배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약화되거나 거의 상실된 채, 한국사회는 극단적인 양극화현상으로 치닫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젊은이들은 결코 “작은 자들” “섬기는 자들” “겸손한 자들”의 내면에 뿌리박은 역설적인 ‘권위’(authority)와 ‘위대함’(greatness)의 본질과 참 뜻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그들이 자만심과 오만함 그리고 교만함에 따른 거칠고 비열한 행위로 타인을 비하하고 멸시하기에 급급할 뿐 상호공존의 삶은 상상조차 못할 것이라고 비판한다면 과언일까? 진정 이들에게서 “겸손”(Humility)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있을까?

일찍이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은 자신의 생을 뒤돌아보며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을 강조하고 ‘겸손한 삶’을 살도록 역설했다. 어원학적으로 땅과 흙(earth, soil)을 지칭하는 라틴어 Humas에서 파생된 '겸손'은 도대체 땅(흙)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비옥한 땅에서 풍성한 결실을 얻는 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온갖 더럽고 냄새나는 오물을 뒤집어쓸 때에야 비로소 기름진 땅(흙)이 될 수 있다. 더럽고 냄새나는 오물을 거절하는 땅(흙)은 메마를 수밖에 없다. 오물을 잔뜩 머금은 기름지고 비옥한 땅(흙)에선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지만, 메마른 땅(흙)에선 결코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온갖 오물들을 받아들인 비옥한 땅과 흙에서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듯이, 겸손이란 그 어떤 시기와 질투, 불평과 비난, 멸시와 천대, 심지어 저주에 가까운 욕설과 증오까지도 묵묵히 수용하고 인내하는 행위이다. 이 때문에 ‘겸손한 자’는 낮은 자리를 향해 기꺼이 ‘섬기는 자’로서 또한 ‘작은 자’로서 살기로 결단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자세’가 바로 ‘겸손한 삶’의 본질이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삶의 스타일’(New Style of Life)의 역설이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6-48) …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

 

오늘날 한국의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겸손’을 맘껏 배우고 익히도록 아무리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한국의 ‘엘리트’로서 사회적인 ‘특권계층’을 형성하려는 ‘기득권자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참 뜻을 각인시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책임을 다하도록 끊임없이 고취해야 한다. ‘겸손’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본회퍼가 지적한 ‘진정한 엘리트주의’의 핵심이요 또한 ‘한국사회의 시급한 통합’을 위한 지름길로 여겨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