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정의

 강원돈(한신대학교 신학부 은퇴교수/민중신학과 사회윤리)


 인권과 정의


성서와 신학은 은혜에 근거한 정의를 옹호한다. 은혜에 근거한 정의는 업적에 무관한 정의다. 그러한 정의 개념은 업적에 대해 보상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정의의 관념을 무너뜨린다. 은혜에 근거한 정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학의 심오한 통찰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인의론(認義論)이다. 인간은 그가 쌓은 업적과 아무 상관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존재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게 하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깨뜨린 죄의 권력을 이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사건, 곧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죄가 하나님의 권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하나님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져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허락받는다. 바로 이 인의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나고, 인간의 존엄성이 창설된다. 인간의 존엄성은 그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해방된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 삶의 권리를 의식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인의의 핵심적 메시지’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업적 이전에, 업적과 무관하게 확립된다는 인의론의 가르침은 사회적 업적과 사회적 재화의 분배에 참여할 자격을 서로 직결시키는 정의론에 대해 거리를 취하게 한다. 물론 인간은 기회가 되는대로 최선을 다해 공동체를 위해 업적을 제공하여야 하고 그러한 업적을 낼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업적이 인간의 존엄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는 업적 능력이 없는 사람을 업적 능력이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인정하는 사회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권리와 의무가 대칭을 이룰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인간의 권리로 인정되는 사회에서는 복지에 참여할 권리의 보장을 노동 의무나 업적의 의무와 결부시킬 수 없다.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정의론을 펼친다. 정의론의 과제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정의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고, 그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매우 폭넓은 개념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자유는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형성할 기회이다. 그러한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존엄한 삶을 펼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존엄한 삶을 살아가려면 자유만이 아니라 존엄한 삶에 꼭 필요한 조건들도 충족하여야 한다. 음식, 주거, 기본적인 의료 혜택, 이웃 관계, 사회적 소속감, 프라이버시 유지, 정치적 자율성 등이 그것이다. 그 모든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최소한의 삶의 조건들이다.

누구나 자유로운 삶을 형성하고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국가는 모든 사람이 그러한 권리를 갖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 모든 사람이 존엄한 삶의 조건들을 충족하는 데 필요한 자원과 재화를 확보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국가만이 정의로운 국가다. 그러한 국가의 지원이 사회적 업적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정의의 요구다.

교회가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옹호한다면, 그것은 인의론의 빛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