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생영(人成生靈.창2:7) 사람은 살아 있는 영으로 완성되었다

장상훈 논설위원(한문성경연구소장)


인성생영(人成生靈.창2:7)

사람은 살아 있는 영으로 완성되었다


성경에서 그 첫 번째 책은 창세기이다, 창세기에서는 ‘사람’이라는 말이 190번, 성경전체에서는 4,577번 이 나온다. 창세기는 처음부터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철학에서는 스스로 존재하거나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여 ‘자연(自然)’이라고 본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천지만물과 인간은 창조된 피조물이다. 특별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창1: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라고 했다. 사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 해 주는 구절이다. 사람은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라고 했다. 흙을 자연의 근원이라고 볼 때 흙이란 자연이다. 사람은 자연에서 와서 자연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 간다. 동양에서 사람의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이라는 4대(四大)로 구성되어 있다.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이다. 그러므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몸은 죽어서 흙이 되고 물이 되고 햇빛이 되고 바람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몸은 죽어 깨끗한 토양과 물이 되고 따뜻한 햇빛과 신선한 바람으로 돌아 갈 수 있도록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자연에서 온 인간의 몸은 죽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데에는 성경과 동양철학이 다르지 않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성경의 신학적인 고백은 동양철학에는 없는 신학과 철학의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동양철학에서도 사람은 자연적인 것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이라는 오상(五常)의 본성(本性)을 항상 지니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존재로 본다. 순자라는 책 비상편5-40에서도 ‘사람이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고 질문했다. 무슨 까닭으로 ‘사람’이라 이르고 금수(禽獸)보다 존귀한 것이냐고 질문한 것이다. 그것은 <만물 상호간의 관계를> 구별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각종 관계를 구별하는 것은 명분을 확정하는 것이고 명분을 확정하는 것은 예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사람과 금수의 차이를 ‘예법’에서 찾은 것이다.

다윗은 시편에서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으며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시8:5,6)고 했다.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만물의 차이를 구별했다. 대체로 동양에서는 식물은 생명은 있으나 지각이 없고 동물은 생명이 있고 지각이 있으나 도덕이 없다. 인간은 생명도 있고 지각도 있고 도덕이 있으므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했다. 인간이 만물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는 데에는 동양의 철학이나 성경의 신학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인간에게 ‘도덕’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생기(生氣.창2:7)로서 ‘영혼’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흙덩어리에 불과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생기(生氣)를 코에 불어 넣었을 때에 비로소 인간은 ‘생영(生靈.창2:7)’이 된 것이다. 생영(生靈)이란 ‘살아 있는 영(靈)’으로써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인간에게서 영(靈)을 없애버리면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약2:26)’ 인간은 한낱 ‘흙덩어리’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는 인간이란 영혼 없는 흙덩어리와 같이 허무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시편에서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셨다(시94:11). 다윗은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생각하시나이까(시144:3)라고 반문하면서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시144:4)” 라고 허무한 인생을 탄식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시90:3)고 하셨기 때문에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89:47)” 라고, 짧은 인생을 허무한 존재로 한탄했다.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라고 탄식했는데 다윗도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62:9)” 라고 했다. 사람은 입김에 불과한 존재이며 인생이란 속임수이기 때문에 저울에 달아 보면 입김보다 더 가벼운 존재에 불과하다고, 도덕이 없는 인생의 무가치와 허무를 탄식했다. 전도서에서도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1:14.4:4)” 라고 했다. 인생의 필경은 사망의 길(잠14:12.16:25)이라고 했으며 호흡하다가 죽는 짐승같이 사람도 호흡하다가 죽으니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고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3:19.11:8)라고 했다. 그러나 전도서는 인생이 허무하다고 해서 인생을 허무주의로 결론을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람은 죽음으로써 허무할 수 밖에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다(전3:12)” 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인생의 가치라고 고백했다. 동양의 철인들이 도덕에서 인간의 가치를 발견했던 것처럼 전도서에서도 ‘인간의 선행’에서 짐승보다 나은 인간의 가치를 깨달았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3:13)” 라고 했다. 인생의 희락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았으며 결국 인생은 희락(喜樂.전3:13.8:15) 이라고 낙천적인 결론을 내렸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다 헤아려 알 수는 없지만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전3:14)고 했다. 전도서의 최종적인 결론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라고 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서 ‘하나님 없는 인간의 허무’를 극복하려고 했다.

다윗은 시편에서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 라고 했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자들은 비도덕적인 인간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에, 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기에 사람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다윗은 고백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써 도덕적인 본성을 지닌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도덕이 없는 금수와 같이 짐승처럼 살 수는 없다는 것이 유가(儒家) 철학의 결론이다. 신학에 앞서 참된 인간이 먼저 되라는 말은 잃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다시 찾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본성을 회복하여 그 선한 본성에 따라서 살아가는 도덕적인 인간이 먼저 되라는 뜻이다. 신학은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은 도덕적일 뿐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영(生靈)’으로써 영적인 존재이며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존재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요한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요3:6)” 이기 때문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했다. 사람이 ‘거듭난다(요3:7)’는 것을 한문성경에서는 “중생(重生.요3:7)” 이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복음서의 중생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신학화했다. 사도 바울은 중생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라고, 자기 죽음을 선언했다. 자기 죽음의 선언을 통해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그래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4:22)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라고 했다.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과 대비해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중생 이전과 중생 이후를 구별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10)”라고 했다. ‘지식’이 한문성경에서는 ‘지혜(智慧)’로 되어 있다. 새 사람(新者)이란 처음 창조했을 때의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회복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새롭게 되어가는 존재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혜로 행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신약성경 복음서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있다.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이 있다고 선언했다. 사람이 먼저 창조되었고 그 다음에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창조되었다. 사람이 안식일보다 먼저 있었다. 따라서 안식일 뿐만이 아니라 법과 제도, 국가와 종교와 모든 단체들은 모두 사람을 위해서 있을 뿐이다. 단체 속에는 생명 자체가 없다. 생명은 오직 각 사람에게만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천하에는 없는 것이다. 하나 밖에 없는 각 사람의 생명이 제일 귀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도덕적인 존재이며 더 나아가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지닌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마가도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막8:37.마16:26)” 라고, 사람의 목숨을 가장 귀한 것으로 강조했고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마16:26)” 라고, 하나 밖에 없는 인간의 목숨을 온 천하 보다도 더 귀하게 높이 평가했다. 마태도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6:25)” 라고 반문하여 인간의 목숨과 몸을 가장 귀한 것으로 강조했고 누가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눅12:23)” 라고, 평서문으로 목숨이 음식보다 귀하고 몸이 의복보다 귀하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사람은 흙으로만 되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도덕적인 존재이며 “인성생영(人成生靈.창2:7)” 즉 사람은 살아 있는 영혼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호에서 한글로 ‘론’ 자는 모두 ‘의’ 자로 바로 잡는다. 의(議)와 론(論)은 동의어로 내용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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