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담은 율법, 율법을 품은 복음

윤응진(철학박사, 전 한신대학교 총장)


복음을 담은 율법, 율법을 품은 복음


인간은 동물에 비하여 본능의 지배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그러나 인간에게 허락된 ‘자유’는 잘못 활용될 경우에 오히려 동물세계보다 더 혼란스러운 상황을 초래할 가능성과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지만, 현실에서는 동물만도 못한 삶을 통하여 동료인간에게 해악을 끼치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공동생활이 가능하게 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한, 혹은 강제적인 필요성에 의한 법적 통제가 불가피하다.

 

법이 제정되어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약한 존재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호하기 위하여, 강한 자들의 ‘자유’를 통제하려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법은 강한 자들이 자신들이 행하는 폭력과 착취를 정당화하고 부정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곤 하였다. 그래서 지배자가 흔히 내세우는 “법대로!”라는 구호는 제 멋대로 하겠다는 협박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사회민주화를 위한 기나긴 투쟁은 이러한 구조악을 극복하고 법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작동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구약성서는 우리가 ‘율법’이라 부르는 법적 장치를 통해서 새로운 인류를 탄생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를 증언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평신도들만이 아니라 신학자들까지도!) 구약성서를 ‘율법’의 책이라는 이유로 평가 절하함으로써 하나님의 꿈마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율법’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상 유대인들의 종교생활만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일상생활을 규정하고 보호하는 법체계이다.

구약성서의 ‘율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십계명의 서문에 주목하여야만 한다: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출 20:1-2).

‘율법’은 고대 이집트 제국의 억압과 착취에서 고난 받던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구원)한 야훼 하나님이 제시한 새로운 생활지침으로서 선포되고 있다. 율법은 인간해방을 약속하는 복음이 실현되기 위한 전제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이미 실현된 복음을 전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 노예들이 해방된 삶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즉 또 다시 억압과 착취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요구된 기본적인 생활지침이 바로 ‘십계명’이다. 나머지 율법들은 그 십계명을 구체적으로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규정들이다.

이 율법을 실천하지 않으려던 집단이 바로 지배자들과 부자들이었다. 예언자들은 그들에게 율법을 지킴으로써 사회정의를 실현할 것을 요청했다. 율법을 무시하던 그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하면서, 예언자들은 그들을 향하여, 출애굽 사건을 감행한 야훼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하였다. 이처럼 율법은 지배자들과 부자들의 횡포를 정당화하던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던 근거였고, 사회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던 지침이었다. 율법은 과거의 유산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던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율법이 유대 민중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 강대국들의 식민지로서 명맥을 이어가던 이스라엘이 대제사장 중심의 종교적 지배체제로 굳어지면서 초래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랜 정교분리의 원칙이 사라지고 종교지도자가 정치권력까지 독점함으로써, 율법은 사회변혁을 촉구하는 비판기능을 상실하고 오히려 지배체제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시적으로 정치적 독립국가를 재건한 ‘하스몬 왕조’ 시대에는 왕이 대제사장직까지 겸하게 됨으로써 사회는 더욱 심각한 구조적 모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사회적 분열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 결과 발생한 에세네파, 바리새파, 사두개파는 각기 다른 사회계급의 이익을 대표하기 위하여 율법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율법에 담긴 복음’이 전제되지 않음으로써, 율법의 본뜻이 왜곡 해석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율법이 아니라 ‘율법주의’가 수많은 세부적인 규칙들을 생산하여 유대민중들의 삶을 통제하게 되었고, 결국 종교적인 계급지배체제가 인간들을 비인간화하는 근본원인으로 되고 말았다.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고 선언한 것은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는 종교적 지배계급이 만들어낸 ‘율법주의’를 폐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려 한 것이다. 율법은, 그것이 비록 종교적 지배자들의 관심사에 의해 왜곡 해석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안에 담긴 본래의 뜻이, 즉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꿈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에 담긴 ‘복음’이 기억됨으로써, 율법은 다시 인간혁명과 사회혁명을 일상에서 실행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경청되고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 혁명’의 복음은 율법을 폐기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래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되살리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삶을 지나치게 규제하는 안식일에 관한 세부적인 규정들은 폐기되어야 하지만,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하여 휴식을 허용하려는 ‘안식일 계명’은 준수되어야 하는 것으로 선언되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 막 2:27)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선포한 복음은 율법의 요구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복음을 선포한 예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정의로운 행실”보다 더 나은 정의를 실천할 것을 요구(마 5:20)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간과하고 “믿음으로만”을 요구하는 것은 바울만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뜻을 왜곡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중독증에 걸려있는 것 같다. 항상 “더 큰 믿음”을 얻게 되기를 갈망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율법준수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덕분에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율법대신에 복음만 믿겠다는 ‘신앙인’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다. 사실은 율법의 요구를 회피하기 위하여 복음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해방을 약속하는 ‘복음’과, 지금 일상생활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율법’은 서로 분리될 수 없게 하나로 묶여 있다. 둘 중의 하나만 중요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선포한 “예수 덕분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율법을 실천할 의무가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비기독교적 망언이 아닐 수 없다.

 

율법은 인간을 억압하는 종교적 멍에가 아니다. 그 율법 안에는 이미 인간해방의 복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출애굽’의 구원사건을 현재화하기 위하여 일상생활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 혁명’, 곧 이 땅 위에서 실현되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하였다는 ‘기쁜 소식’이며, 따라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혁명운동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포함하고 있다. 그 요청은 다름 아니라 본래의 의미에서 율법을 실천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선포한 예수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야훼 하나님의 뜻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지배자들은 대부분 권력과 물질적 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실정법을 왜곡 해석하여 집행하곤 한다. 그러므로 권력을 독점하고 특권을 누리는 정치적 지배자가 “법과 원칙”을 강조할수록 현실 사회에서는 오히려 불법과 혼란이 만연하기 마련이다. 바로 그 자신에 의하여 이미 법의 기본 정신이 훼손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지배자들만이 아니라 종교적 지배자들도 마찬가지 유혹에 빠지곤 한다. 종교적 지배자들은 율법을 제공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심지어 이 땅 위에서 인간을 해방하려는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뜻까지 왜곡하여, 자신들의 작은 왕국들을 세우려는 시험에 빠지곤 한다. (그 결과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제시한 율법대신에, 그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규정들을 교인들에게 강요하곤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교인’들이 복음과 율법 사이의 바른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이 요구하는 바른 삶을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복을 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초래한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설교하고 가르친 종교지도자들이다!

 

어떻게 ‘교인’들 스스로가 ‘예수의’ 가르침에 각성한 ‘그리스도인’로 계몽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들이 참된 의미의 율법을 실천하는 정의로운 주체들로, 세상을 변혁하는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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