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사역의 방향

신현수 박사(전 평택대학교 부총장)


한국교회 사역의 방향

오늘날 세계는 놀라운 교통 기술의 발달로 하루 생활권이 되었다. 최첨단의 통신 기술로 정보는 세계 어디든지 곧바로 전달하고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고도의 생명기술은 인류가 이 땅에서의 유토피아를 꿈꾸게 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사역은 이러한 상황과 떨어져서 볼 수 없다. 사역이란 구체적 삶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고 실천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리는 하나님의 초월적 계시이기 때문에 믿음과 삶에서 언제나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진리를 자신들의 삶의 상황에서 받아들인다. 따라서 기독교 사역은 언제나 사람들이 오늘이라는 구체적 삶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실천하도록 하는 노력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사역해 가야 하는가?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한 상황은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신앙의 오락화 현상이다. 첨단 통신 기술의 발달로 정보를 세계 곳곳에 매우 빠르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인터넷 네트워크는 세계 어디든지 즉각적으로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하였다. 급속한 정보의 흐름은 지식의 폭발적 증가를 불러일으키고, 정보가 부와 권력이 되게 한다. 또한 그것은 텔레비전과 비디오와 같은 하이테크와 결합하여 순간 이미지 문화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미지를 중요시 여기는 것은 감성 중심으로 치닫는 오늘날 사회현상의 한 반영이다. 이러한 시대 흐름은 한국교회가 신앙을 점차 오락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게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인격적 반응을 나타내는 것보다 어떤 이미지에 대한 느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 이른바 ‘유명’ 설교가로 평가하는 기준이 성경의 진리를 얼마나 바르게 해석하고 전달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얼마나 감성에 잘 호소하여 재미있게 전달하는가 하는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둘째, 사람의 생명이 갖는 존엄성이 경시되고 있다. 놀라운 생명 공학의 발전으로 미리 설계된 신체를 가질 수 있고, 몸의 여러 기관의 이식 및 이용이 이루어 질 수 있으며, 사람에 의한 인간의 가능성마저 예측되고 있다. 이러한 생명 기술은 결국 사람의 생명이 갖는 존엄성을 약화시키 이르렀다. 이러한 시대 흐름은 한국교회가 사역의 목표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보다 교인의 수적 증가를 통한 대교회를 이루는 것에 두게 한다.

셋째, 공동체 정신이 약화되고 있다. 급속한 정보화의 흐름은 이른바 "나 세대“(I-generation)의식을 갖게 한다. 이 의식은 자기중심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다. 사람들은 어떤 외부적 권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러한 가치관은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남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잘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고 , 자기가 목적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인간관계는 이권에 따라 결정되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교회가 교회의 본질인 공동체 정신을 훈련하는 일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넷째, 진리의 상대화 현상이다. 오늘날 사회는 진리가 절대적이고 보편적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상대화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진리의 다원성 주장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성경의 절대적 진리가 크게 도전을 받는다. 뉴 에이지(New Age) 운동, 점성술, 심령 과학 등 각종 신흥 종교와 이단 사이비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 기독교 진리를 위협한다.

다섯째, 교회의 세속화의 현상이다. 현대사회의 특징적 모습의 하나는 세속화이다. 피터 버거는 “속화란 사회의 부분들이나 문화가 종교적 제도와 상징들의 지배력으로부터 이탈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하면서 서구 문명사회의 세속화는 경제적 발전 과정에서 산업자본주의의 역동적 기능에 기인하고 비서구권 사회는 서구 문명화의 과정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세속화의 세계적 흐름은 한국교회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레오 오스터롬(Leo Oosterom)은 일찍이 “한국의 모든 교회가 가까운 미래에 직면하게 될 최대의 이슈는 세속화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삶의 원리가 실현되는 사회와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사회의 어두움울 밝히고 내일의 희망을 제시하기는커녕 세상 가치관에 물들여 있다. 가령, 믿음이 세상 가치관에 바탕을 둔 복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고 있고, 물량주의와 대교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여섯째, 세계화 현상이다. 오늘날 세계는 정보, 교통 및 통신의 발달로 하나의 생활권을 이룬다. 세계는 더 이상 이념의 대립, 나라, 종교 및 민족의 울타리에 머물지 않고 각 나라의 고유한 문화들이 하나로 묶는 지구촌 문화 공동체가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은 자연스럽게 한국교회가 세계화의 의식을 갖게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한반도에 머물지 아니하고 세계 교회와 연대하여 교회의 책임과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요구된다.

일곱째, 자연 파괴 현상이다. 21세기 사회는 자연 환경의 파괴 현상이 가속화된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자기중심적 가치관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이것은 결국 환경의 훼손에 이르게 된다. 지구의 온실화, 사막화, 생태계 훼손, 자연수의 오염, 엘리뇨 현상, 오존층 파괴, 공기 오염 등은 과학 기술의 발달로 초래한 자연 파괴 현상의 예들이다. 이러한 환경 문제는 오늘날 사회가 겪는 심각한 문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문제를 성경적 진리의 관점에서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요구된다면, 환경 문제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풀어가야 할 중요한 과제에 속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해가야 할 사역의 방향은 무엇인가? 사역이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맡기신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일이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한 구원을 실제화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사역의 기본 성격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이 어떠한 것이냐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라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분야에서 계속적으로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들의 주인이며 그러한 분으로서 그 모든 영역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힘써 가야할 사역은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과 사랑의 사귐을 갖게 한다.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다. 하나님 형상은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게 가지고 있는 특징적 모습이다. 그것은 본래 고결한 것이었다(창 1:31).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어긴 죄로 그 본래 상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는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 형상을 새롭게 하였다. 새롭게 된 하나님 형상은 사역을 통하여 실제화 된다. 따라서 사역의 방향은 회복된 하나님 형상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그러면 회복된 하나님 형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완전한 하나님 형상이기 때문이다. 회복된 하나님 형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어 그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목표(proorisen)이다(롬 8: 29). 그것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neos anthropos) 을 입는 것이고(골 3: 9-10),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입는 것이다(엡 4:22-24).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성품들이 하나님 형상을 결정짓는 요소이다. 이런 뜻에서 하나님 형상(imago Dei)는 그리스도 형상(imago Christi)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볼 때, 회복된 하나님 형상은 역동적 공동체 삶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가'라는 말이 뜻하는 것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홀로 존재하시지 않고 역동적 공동체로 존재하고 일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 형상이란 이러한 하나님의 본질을 따라 역동적 공동체를 이루는 삶이라는 것을 나타내 준다. 이러한 사실은 회복된 하나님 형상을 정적으로가 아니라 동적으로 이해해야 하고, 형이상학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관계 중심으로 보아야 함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회복된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이웃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 그리고 종말론적 미래 관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역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주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이 창조주요 구원자라는 것을 알고 그를 섬기며 경배와 영광 돌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사람과 다른 피조물에 대한 절대 주권을 가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음을 뜻한다. 또한, 하나님의 주되심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받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의 존재와 삶에 있어서 자율적이거나 독립적이지 못하고 전적으로 창조자 하나님께 의존적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받아가는 것으로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되심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포함된다. 가령,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는 책임이다.

하나님의 주되심을 받아들이는 성품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죄로 말미암아 상당한 손상을 입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을 지은 창조주로 알 만한 능력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연적 재능들까지 근본적인 손상을 입었다. 또한 사람은 창조주의 뜻에 순종하기를 의지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 사역에 기초하여 이러한 성품을 새롭게 한다.

새롭게 된 이 성품은 하나님 형상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주되심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나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종이 되기까지 하였다. 그가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온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자신을 낮추는 행위이다. 그가 이 땅에서 살았던 삶은 하나님과 그의 다스림에 복종하는 삶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다. 그의 이러한 낮아지심의 절정이 십자가 죽음이다 (빌 2: 6-11).

사역은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주되심을 받아들인 삶을 살아간 것은 인류가 그 주되심을 거역한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으로서 하는 역할이다. 따라서 기독교 사역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지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 창조자와 구원자임을 알게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바로 여기에 케리그마(kerygma)가 기독교 사역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가 있다.

또한, 기독교 사역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주되심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은 것과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계시를 통해서 세상을 다스린다. 그 계시는 하나님이 영감을 주어 기록하게 한 성경과 인간이 누구나 갖고 있는 이성, 양심, 역사, 자연, 사회 질서 및 제도 등이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 사역이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didache)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우선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의 말씀을 사람들이 알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일반 계시인 보편 가치를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으로서 갖는 존엄성, 사람답게 살아감, 자유, 정의, 질서, 평화, 양심 등의 인류의 보편 가치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기독교 사역의 분야이다.

둘째, 이웃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한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로 지음 받은 것을 하나님 형상과 관련시키고 있다(창 1:27; 5:2). 사람은 다른 성을 가진 사람과 성실한 동반자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다. 바른 남녀 관계는 위계질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 사랑과 섬김이다(갈 3:28; 엡 5:21). 이것은 사람이 남과 떨어져서가 아니라 이웃과 깊은 유대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회적 존재로서 사람은 홀로 계시지 않고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삶을 반영한다. 하지만,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자기중심적 이기심에서 이웃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고 외로움과 공허감에 이르게 하였다. 또한, 사람은 죄의식에서 자기 파괴적 성향을 가지게 됨으로써 스스로 내적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은 이웃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공동체적 삶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잘 나타난다. 그는 전적으로 남을 위한 존재였다. 그는 다른 이웃들과 깊은 유대를 맺고 살았다. 특히, 그는 당시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 가령, 죄인, 가난한 자, 이방인, 및 장애자 등과 함께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왕으로서 사람들을 서로 소외되었던 상태에서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의 영역으로 이끌었다. 따라서 그를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주인과 노예가,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상하 관계에 있지 않고 모두 형제와 자매가 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공동체의 삶의 원리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의무감에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나 자기중심적 이기심과 구별된다. 이러한 삶의 방식에서는 정의가 법과 일치될 수 없다. 법은 정의 구현을 위하여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이다. 궁극적인 정의는 오직 자기희생의 사랑을 통해서만 성취된다. 이러한 뜻에서 사랑은 율법의 중심 내용일 뿐만 아니라 율법의 완성이다. 자기희생의 사랑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존중받고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모든 사회적 노력을 기울이게 한다. 사랑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 가는 공동체적 삶의 원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개념에 근거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그 존재와 사역에서 서로 구별되나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룬다. 또한 사랑의 공동체의 삶의 원리는 상호 섬김이다(요 13: 14-15). 이것은 자기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앞세우는 삶의 원리이다. 이 원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를 섬기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일한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그것은 나와 우리만을 아는 이기주의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특정 종교나 문화나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그들만을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온 인류에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한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삶을 통해서 볼 때,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은 이웃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사역은 그 하나님 형상을 구체적 삶의 상황에 구체화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 삶에서 벗어나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이웃을 사랑하고 남과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섬기는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것은 이웃과 사회를 섬기는 사역으로서(diakonia) 기독교 사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셋째, 미래에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한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은 어느 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도전하는 역동적 존재다. 성경은 하나님 형상을 사람이 땅을 다스리는 사명과 연결한다(창 1:28). 사람이 땅을 다스리는 권한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그것에 대한 절대 주권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것을 위계질서 중심의 세계관에서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존재에서 뛰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고, 영혼은 몸을 통제하며, 남자는 여자를 주관하고,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거리가 멀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그것들을 지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은 그것들이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임 받도록 잘 관리하고 보존하는 청지기의 책임을 가질 뿐이다. 청지기는 스스로 독립적이지 않고, 피조물들을 돌보는 일에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진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으로부터 에덴동산을 잘 가꾸는 책임을 부여받았다(창 2:4-25). 이것은 한 마디로 문화적 사명, 곧 하나님을 위해서 땅을 다스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문화를 발전시키라는 명령이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그러한 문화를 이루어 가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러한 뜻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문화의 실제(reality)가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평화가 실현된다. 그런데 이 나라의 최종적 실현은 미래에 있다. 종말에 하나님은 친히 그가 지은 모든 것들이 새로워져서 그의 창조 목적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는 먼 미래에 있는 어떤 공상의 세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사람들에게 그것을 선택하도록 요구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이 땅에 정의와 평화의 실제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심판에 이를 것인가를 선택하도록 촉구하였다. 또한, 구약의 구세주(메시야) 전통은 하나님이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할 날을 기다려야 할 것을 선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선포하고 또한 선지자로서 하는 자신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의 미래 곧 모든 피조물들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최종적 하나님 나라를 기대할 수 있게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이 미래에 모든 것을 다스리고 주관하실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였다.

이와 같이, 회복된 하나님 형상이란 하나님이 미래에 하실 일을 소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기독교 사역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미래 약속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절대 주권을 갖고 있음을 확신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살고 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결국은 승리할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희생과 저항이라도 무릅쓰게 하는 것이다. 이 기독교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Kerygma)하고 가르치는(Didache) 형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성령이 구원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것이나 또한 그리스도인 자신이 노력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 형상으로 새로워지는 것은 서술적(indicative)이면서 명령적(imperative)이다. 하나님 형상의 완전한 회복은 미래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현재 삶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후 3:18). 바로 여기에 기독교 사역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회복된 하나님 형상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는 기독교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성령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이 일을 행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칠 때 성령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새롭게 한다. 가령,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고 가르쳤다(베전 1:23).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구원하는 방편이고(고전 1:21),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롬 1:16),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세우게 하는 한다(롬 1:11, 12, 15).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열 두 제자를 선택한 것은 그들이 복음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막 2:14; 6:12). 초대교회에서 집사들을 세운 주된 목적은 사도들이 기도와 더불어 복음 사역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행 2:14).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한 사역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사역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한 상황은 신앙의 오락화 현상,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는 현상, 공동체 정신의 약화 현상, 진리의 상대화와 종교다원주의 현상, 교회의 세속화의 현상, 세계화 현상, 자연 파괴 현상 등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역은 하나님 형상의 회복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은 인간론의 관점에서 볼 때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는 완전한 하나님 형상이기 때문이다.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주되심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전인적 믿음이고, 동료 인간과 자기희생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이 미래에 실현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 사역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라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것의 초점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는 것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kerygma), 가르치며(didache),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따라 살도록 섬기는(diakonia) 형태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