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갈5:14) 한 마디 말로써 단정하면

       장상훈 논설위원

      한문성경연구소장


제목/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갈5:14)

한 마디 말로써 단정하면

 

한문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말은 논어 위정편에서도 나온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에서 폐(蔽)는 단(斷)과 같은 의미로 ‘단정(斷定)하다’라는 뜻이다. 이(以)를 후치사로 보고 일언이폐지라는 말을 해석하면 ‘한 마디 말로써 단정하다’라는 뜻이 된다. 논어에서는 시경(詩經) 300편을 ‘한 마디 말로써 단정하면’ 이라는 말로 사용되었고 갈라디아서에서는 구약의 율법전체를 ‘한 마디 말로써 단정하면’ 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논어에 있는 말이 성경에서도 그대로 사용된 것을 보면 바울이 논어를 알고 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성서번역 과정에서 된 일이지만 바울서신에서는 논어의 가치와 통용되는 개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진리는 높은 경지에서 보면 동서(東西)가 서로 통하는 바가 없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한문성경과 동양고전을 함께 읽는 사람들은 진리의 높고 깊고 넓은 경지를 경험하는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요한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성경(구약)을 ‘일언이폐지’하면 “애인여기(愛人如己.갈5:14)”라고 단정했다. 다른 사람을 자기 같이 사랑하라는 뜻이다. 애인여기(愛人如己)에서 ‘인(人)’은 ‘남’ 또는 ‘타인’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에서처럼 인(人)을 ‘린(隣.이웃 린)’으로 하면 “애린여기(愛隣如己.눅10:27)”가 되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뜻이 된다. 한문성경에서는 누가복음에서만 ‘애린여기(愛隣如己눅10:27)’로 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모두 ‘애인여기(愛人如己.레19:18.마22:39.막12:33.갈5:14.약2:8)’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한글성경에서는 모두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로 통일했다. 지금 이 시대는 다른 사람을 자기 같이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 갈 수가 없는 사회가 되었다. 예전에 씨족으로 구성된 농경사회와는 달리, 지금은 남 모르는 사람들과 더 어울려서 살아가야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자기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려가 불교의 시대였고 조선이 유교의 시대였다면 지금 이 시대는 ‘애인여기(愛人如己)’의 시대가 되어 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면서 더불어 함께 사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논어 위정편에서는 시(詩) 삼백을 한 마디 말로써 단정하면 “사무사(思無邪)”라고 했다. 그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는 뜻이다. 다산은 시(詩.詩經시경) 300편은 모두 현인이 지은 것이어서 그 뜻이 바르기 때문에 “사무사(思無邪)”라는 한 마디 말로 단정할 수 있다고 했다. 도(道)에 밝아서 명도(明道)라고 불리우던 동양의 현자였던 명도(明道) 선생은 “사무사자 성야(思無邪者 誠也)”라고 했다. ‘그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는 것은 진실함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진실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웃사랑이 가식(假飾)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도 진정으로 애인여기(愛人如己)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시편에서는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고(시52:4) 잠언에서는 간사한 자는 땅에서 잡초처럼 뽑히리라고 했다(잠2:22). 까닭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게 되지만, 진실하신 주(主)를 바라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지 않는 까닭은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시25:3). 주 하나님은 진실하신데 주를 바라는 자들이 어찌 남을 속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다윗은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가 누구오니까라고 반문하면서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시15:2)”라고, ‘정직, 공의, 진실’을 말하는 사람만이 주의 장막과 주의 성산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법은 모두 진실하여 의롭기 때문이다(시19:9).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며(시33:4)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시111:7)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시86:15) 주께서는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신다(시51:6). 하나님은 진실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말씀이 진실하시고 하시는 일들이 정의이며,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시고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며(시31:23) 정직한 자들만이 주 앞에서 살리라(시140:13)고 했다. 이상에서 인용한 성경구절들은 모두 시편에서 다윗의 시(詩)로 되어 있다. 이것은 다윗이 믿음을 가지고 정치하는 사람으로써 그의 정치 철학이 얼마나 ‘성실과 정직’를 모토로 삼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구절들이다. 다윗은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시편25:21)”라는 기도를 했다.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이 자기 편이 되어 자기를 보호해 달라는 맹목적인 기도가 아니라 성실과 정직을 정치철학으로 삼고 정치하겠으니 성실과 정직이 자신의 정치생명을 지킬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정치에 참여하는 신자나 목회자는 성실과 정직으로 해야한다.

신약성경 사복음서에서도 예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하나라도 진실하지 않은 말씀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18이하 31회. 막3:28이하 13회. 눅4:24이하 6회. 요1:51이하 26회. 총75회)”라고 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요1:51이하 26회)”라고, ‘진실로’를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그마만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문성경에서는 요한복음서를 포함하여 사복음서가 모두 동일하게 “아성고이(我誠告爾.마5:18이하 31회. 막3:28이하 13회. 눅4:24이하 6회. 요1:51이하 26회. 총75회)”라는 말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뜻으로 ‘진실로(誠성)’가 한번으로 되어 있다. 아성고이(我誠告爾)에서 고(告)는 서술어인 동사로 ‘가르치다. 깨우치다’라는 뜻도 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은 가르쳐주시고 깨우쳐주시는 말씀들인데 모두 ‘진실하셨다’는 뜻이다.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외식하는 자들’ ‘회칠한 무덤’ ‘양의 탈을 쓴 이리’ 등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처럼 위선적이고 이중적이며 진실성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뜻이기도 한다. 반면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은 모두 진실하였으니 그의 행적들도 모두 진실하다는 것이다. 진실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써 예수의 말과 삶은 ‘진실’ 그 자체였다는 것을 사복음서는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도 성령은 그 자체가 ‘진실’이라고,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누가는 증언했다. 자본주의 현실에서는 화폐가 되면 약간의 거짓은 용납될 수 있는 분위기가 교회에서마져도 있다. 헌금을 많이 하면 과연 그의 믿음도 진실한 것일까?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의 증언에 따르면 진실과 거짓은 명백하기 때문에 돈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누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1-6)’의 사건을 증거로 삼아 그들이 비록 헌금을 많이 했으나 자신과 사도들과 교회를 속였으므로 그것이 바로 성령을 속인 것이 되어 즉시로 죽어 장사되었다. 즉시로 죽어 장사되었다(행5:5,6)는 것은 성령 하나님은 약간의 거짓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1-6)’의 사건은, 교회는 돈이 아니라 ‘진실’이 생명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함께 성령을 속이는 ‘거짓’을 장사지낸 초대교회는 이후로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면서(행5:13)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아져서 교회는 남녀의 큰 무리가 되었다(행5:14). 교회가 아무리 크고 작고를 떠나서 진실을 회복하지 않고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간사함이 없는 사람’을 높이 평가했다(요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한문성경에서 보면 “무궤휼자(無詭譎者요1:47)”로, ‘그는 간사스럽고 교묘한 속임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간사함과 교묘한 속임수가 없는 나다니엘을 높이 평가 하셨고 이에 나다니엘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요1:49)”라고 고백했다. 진실은 진실한 사람을 서로 알아보게 되어 있다. 에베소서에서도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말라고 전제하고 그리하려면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진실과 거짓을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을 가진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엡4:14).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살전2:3)”라고 하여 간사함이나 속임수를 부도덕한 행동으로 간주하고 이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최후의 심판에서도 거짓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대한 심판과 그리고 진실한 영혼들이 다시 살아나서 살아가게 될 거짓없는 진실한 세계의 도래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상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그 동안 후진국에서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으로 현정부에서부터 이제 막 진입했다. 후진국이란 ‘속이는 정부’ 즉 정부가 거짓말로 백성을 속이는 나라라고 한다면 선진국은 진실과 정직으로 정부가 먼저 솔선수범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들이 가짜뉴스와 거짓정보를 퍼뜨리고 사실보다는 진영논리와 편향된 주장에 휘둘리는 사회라면 후진국을 면할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는 다시 후진국으로 후퇴 할 것인가 아니면 선진국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인가하는 기로에 서 있다. 앞으로 우리는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다시 한번 진실하고 정직한 정부로 나라를 진일보시켜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윗과 같이 ‘성실과 정직’을 삶의 철학으로 삼고 정치할 사람을 선출해야한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 사무사(思無邪)! 즉 국민과 대통령은 그 생각에 간사함이 없어야하고 애인여기(愛人如己)! 즉 이웃을 자기 같이 사랑하는 백성이어야한다. 지금 이 시대는 오로지 백성을 위한 정치권력이 있을 뿐이다. 오로지 백성을 위한 정치권력! 오로지 백성를 사랑하는 정부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을 위민(爲民)사상, 애민(愛民)사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현재 보다 더 위민(爲民)하고 더 애민(愛民)하는 선진정부로 진화해야한다. 거짓이 없는 성실과 정직으로 살아가는 사회와 나라가 선진국이다. 일언이폐지하고 진실하지 않는 교회와 정직하지 않는 나라가 어떻게 하나님의 보호를 받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