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수이사/경기지사장
(사협)사회적경제를 이끄는 공동체 이사장
복음의 가치를 담는 사회적 그릇, 협동조합
우리 기독교의 복음이 한국에 들어온 지 올해로 137년이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와 같은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진 개신교의 복음은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고 한국교회 부흥의 원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 한국교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초기 한국선교의 역사 속에서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은 현대 교회처럼 예배당에 모이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나 교인들의 관리가 그 중심이 아니었다.
그들이 보여 준 복음은 한국의 민중들의 필요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들의 사회적 필요가 무엇인지를 간파하고 민중들에게 다가간 것이었다.
고통받는 병든 자들을 고쳐주기 위해 병원을 세우고(전 세브란스병원), 글을 배우지 못한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쳐 자의식 깨우고(현 이화여대, 연세대, 배재대등과같은 교육기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는 가난한 자들의 친구로서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그들을 보듬는 보육시설(고아원)등을 통해 사회적 필요를 채우고 지원하는 일에 헌신한 것이었다.
다시말하면 선교의 최우선의 관심사는 사회문제 해결이었다.
이는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연민의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았던 때문이었다.
협동조합의 정신과 사회적경제의 가치는 사회문제의 해결이다.
최근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의존해 온 한국사회는 수많은 사회문제들이 매일 매일 화산과 같이 분출하고 있다.
더구나 코로나 19와 같은 전염병으로 인해 생명의 위기와 함께, 외형적으로 풍요한 것처럼 보이는 물질만능주의 사회 속에서 불평등과 불의한 제도로 인한 갈등이 심화 되고 있고, 경쟁 사회 속에의 대립과 분열에 이어 자유의 남용과 폭력이 일상화되고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연일 드러나는 사회문제들을 외면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면 교회는 종교라는 영역에 갇혀 자기들만의 세계에 안주하는 피안적이고 이기적인 단체로 전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발맞춰 정부나 기업들도 사회문제 해결과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는 정책을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다.
국민들의 세금을 통해 운용되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사회문제 해결에 심혈을 기울이고, 국민들의 요구나 사회에 적합한 정책을 입안하여 사회복지 예산을 투입하는 이유도 사회와 민중들의 니즈(Needs)에 대응하기 위한 결과이다.
자기 자본을 투자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적인 기업이나 그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들도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회적 가치를 외면하고 오직 자사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을 소비자들이 배척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교회가 사회의 현안 문제들을 외면하고 사회적 가치실현에 소홀히 하여 자기들만의 리그에 만족하게 되면 교회는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퇴행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교회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나은 사회적 가치를 담는 복음의 그릇이어야 한다.
국가나 사회보다 먼저 민중이 원하는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담아내는 교회가 사회에 필요한 영적 공동체로서의 인정받을 수 있고 그 사명과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목회자들은 사회적경제나 협동조합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필요하다.
선진국인 유럽에서는 이미 200여년 전부터 의식있는 성직자들이 협동조합의 선구자로서 그 역할을 감당해왔다.
일례로 세계행복지수 1위를 점하고 있는 덴마크는 그룬트비 목사가 시민의 의식을 깨우고 사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앞장서서 사회 개혁운동을 전개했고 그 결과로 지금 덴마크는 다섯 사람만 모여도 협동조합을 만들어 내는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가 되어 북유럽의 행복한 사회를 견인하고 있고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신부는 스페인 바스크 지역에 몬드라곤 협동조합을 통해 지난 50년 동안 단 한 사람의 실직자도 없는 거대한 상생의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내고 그 공동체의 지속을 위한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세계경제공황과 같은 경제위기에서도 국가경제와 지역경제가 흔들리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던 이탈리아 로마냐 주와 같은 지역은 수 천 개의 협동조합이 그 사회의 중심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세계가 공인하고 있는 팩트이다.
세계에서 가장 빈국 중의 하나인 방글라데시에서도 무하마드 유누스라는 평화운동가가 가난한 자들의 은행 즉 그라민 뱅크를 만들어 무이자, 무담보, 무신용으로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 줌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이 되는 사회를 구현하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주택문제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야기되는 한국과는 달리 카나다는 주택을 필요로 하는 국민들을 위해 협동조합들의 사회적 연대기금과 인내기금 등을 자원마련을 통해 주택란를 해결하고 장기적인 정책을 입안해 내고 사회적 이슈를 해결하느 일에 교회공동체들이 연대하고 있음은 고무적인 일이다.
독일이나 스위스의 우수한 기업이나 마켓 등은 자기 혼자 잘 살기 위한 길을 모색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우리와는 달리 다 함께 행복하기 위해 협동조합 정신으로 운영하여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에 참여함을 물론 사회적 가치를 슬로건으로 하는 기업들을 지원하고 연대하여 건강한 사회를 이루어가고 있다.
우리는 교회를 신앙의 공동체라고 말하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공동체는 복음의 영성과 함께 경제적, 사회적 삶을 같이 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교회라는 공간 안에서의 예배와 기도와 혹은 신앙훈련 시간을 통해서 영적인 공감 이외에는 서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는 현대 교회의 신앙생활은 진정한 공동체적인 삶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협동조합 정신 중의 하나가 조합원의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제이고 1인 1표제이다.
투자하는 자본의 크기만큼 주식을 보유하는 주식회사와는 달리 출자하는 기금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1인 1표제를 의무화하는 협동조합은 10,000,000원을 출자하든 단10,000원을 출자 하든 1인 1표의 의결권을 갖게 하는 정신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낳은 돈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 아닌 누구나 공평한 세상을 추구하는 공동체적 정신을 기반한 것이 때문이다.
마태복음 20:1-16에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말씀이 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용노동자에게는 일과 하루의 품삯이 필요하다.
포도원 주인은 오전 아홉 시에 나가 일이 필요한 사람에게 일을 맡긴다. 정오에도 보니 일을 찾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도 일감을 준다. 오후 세 시에도 일을 찾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도 일감을 나눠 준다. 오후 3시에도 일을 찾지못 한 사람에게 일을 주고, 해질 무렵인 오후 6시까지도 일을 찾지 못한 사람을 발견하여 그에게도 일을 맡긴다.
저녁이 되어 일을 마치고 품삯을 계산하는데 포도원 주인은 오전부터 온 종일 일한 사람에게도, 해 질 무렵에 와서 잠깐 일한 사람에게도 공평하게 똑같이 하루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씩 지불한다.
그 때 하루종일 일한 품꾼이 원망한다. “나 중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온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태복음 20:12)
포도원 주인이 말한다
“ 친구여 내게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내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가 선함으로 (나를) 악하게 보느냐”(마태복음20:14-15)
우리 목회자들은 위의 말씀을 본문으로 수없이 많은 설교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포도원 주인이고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의 판단과 선한 의지에 공감하고 옳다고 흔쾌히 여길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그리고 개인적인 이기심에서 자유롭지 않다.
복음을 메시지로 전하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삶은 늘 이중적이기 쉽다.
진정한 신앙과 교회 공동체적 삶은 복음을 그릇에 담는 일이다. 교회는 신앙의 본질과 복음의 가치를 담는 그릇이여야 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협동조합은 복음의 생명력과 사회적의 가치를 담는 사회적 그릇이다.
박남수이사/경기지사장
(사협)사회적경제를 이끄는 공동체 이사장
복음의 가치를 담는 사회적 그릇, 협동조합
우리 기독교의 복음이 한국에 들어온 지 올해로 137년이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와 같은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진 개신교의 복음은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고 한국교회 부흥의 원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 한국교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초기 한국선교의 역사 속에서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은 현대 교회처럼 예배당에 모이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나 교인들의 관리가 그 중심이 아니었다.
그들이 보여 준 복음은 한국의 민중들의 필요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들의 사회적 필요가 무엇인지를 간파하고 민중들에게 다가간 것이었다.
고통받는 병든 자들을 고쳐주기 위해 병원을 세우고(전 세브란스병원), 글을 배우지 못한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쳐 자의식 깨우고(현 이화여대, 연세대, 배재대등과같은 교육기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는 가난한 자들의 친구로서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그들을 보듬는 보육시설(고아원)등을 통해 사회적 필요를 채우고 지원하는 일에 헌신한 것이었다.
다시말하면 선교의 최우선의 관심사는 사회문제 해결이었다.
이는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연민의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았던 때문이었다.
협동조합의 정신과 사회적경제의 가치는 사회문제의 해결이다.
최근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의존해 온 한국사회는 수많은 사회문제들이 매일 매일 화산과 같이 분출하고 있다.
더구나 코로나 19와 같은 전염병으로 인해 생명의 위기와 함께, 외형적으로 풍요한 것처럼 보이는 물질만능주의 사회 속에서 불평등과 불의한 제도로 인한 갈등이 심화 되고 있고, 경쟁 사회 속에의 대립과 분열에 이어 자유의 남용과 폭력이 일상화되고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연일 드러나는 사회문제들을 외면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면 교회는 종교라는 영역에 갇혀 자기들만의 세계에 안주하는 피안적이고 이기적인 단체로 전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발맞춰 정부나 기업들도 사회문제 해결과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는 정책을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다.
국민들의 세금을 통해 운용되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사회문제 해결에 심혈을 기울이고, 국민들의 요구나 사회에 적합한 정책을 입안하여 사회복지 예산을 투입하는 이유도 사회와 민중들의 니즈(Needs)에 대응하기 위한 결과이다.
자기 자본을 투자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적인 기업이나 그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들도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회적 가치를 외면하고 오직 자사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을 소비자들이 배척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교회가 사회의 현안 문제들을 외면하고 사회적 가치실현에 소홀히 하여 자기들만의 리그에 만족하게 되면 교회는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퇴행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교회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나은 사회적 가치를 담는 복음의 그릇이어야 한다.
국가나 사회보다 먼저 민중이 원하는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담아내는 교회가 사회에 필요한 영적 공동체로서의 인정받을 수 있고 그 사명과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목회자들은 사회적경제나 협동조합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필요하다.
선진국인 유럽에서는 이미 200여년 전부터 의식있는 성직자들이 협동조합의 선구자로서 그 역할을 감당해왔다.
일례로 세계행복지수 1위를 점하고 있는 덴마크는 그룬트비 목사가 시민의 의식을 깨우고 사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앞장서서 사회 개혁운동을 전개했고 그 결과로 지금 덴마크는 다섯 사람만 모여도 협동조합을 만들어 내는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가 되어 북유럽의 행복한 사회를 견인하고 있고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신부는 스페인 바스크 지역에 몬드라곤 협동조합을 통해 지난 50년 동안 단 한 사람의 실직자도 없는 거대한 상생의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내고 그 공동체의 지속을 위한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세계경제공황과 같은 경제위기에서도 국가경제와 지역경제가 흔들리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던 이탈리아 로마냐 주와 같은 지역은 수 천 개의 협동조합이 그 사회의 중심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세계가 공인하고 있는 팩트이다.
세계에서 가장 빈국 중의 하나인 방글라데시에서도 무하마드 유누스라는 평화운동가가 가난한 자들의 은행 즉 그라민 뱅크를 만들어 무이자, 무담보, 무신용으로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 줌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이 되는 사회를 구현하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주택문제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야기되는 한국과는 달리 카나다는 주택을 필요로 하는 국민들을 위해 협동조합들의 사회적 연대기금과 인내기금 등을 자원마련을 통해 주택란를 해결하고 장기적인 정책을 입안해 내고 사회적 이슈를 해결하느 일에 교회공동체들이 연대하고 있음은 고무적인 일이다.
독일이나 스위스의 우수한 기업이나 마켓 등은 자기 혼자 잘 살기 위한 길을 모색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우리와는 달리 다 함께 행복하기 위해 협동조합 정신으로 운영하여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에 참여함을 물론 사회적 가치를 슬로건으로 하는 기업들을 지원하고 연대하여 건강한 사회를 이루어가고 있다.
우리는 교회를 신앙의 공동체라고 말하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공동체는 복음의 영성과 함께 경제적, 사회적 삶을 같이 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교회라는 공간 안에서의 예배와 기도와 혹은 신앙훈련 시간을 통해서 영적인 공감 이외에는 서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는 현대 교회의 신앙생활은 진정한 공동체적인 삶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협동조합 정신 중의 하나가 조합원의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제이고 1인 1표제이다.
투자하는 자본의 크기만큼 주식을 보유하는 주식회사와는 달리 출자하는 기금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1인 1표제를 의무화하는 협동조합은 10,000,000원을 출자하든 단10,000원을 출자 하든 1인 1표의 의결권을 갖게 하는 정신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낳은 돈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 아닌 누구나 공평한 세상을 추구하는 공동체적 정신을 기반한 것이 때문이다.
마태복음 20:1-16에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말씀이 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용노동자에게는 일과 하루의 품삯이 필요하다.
포도원 주인은 오전 아홉 시에 나가 일이 필요한 사람에게 일을 맡긴다. 정오에도 보니 일을 찾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도 일감을 준다. 오후 세 시에도 일을 찾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도 일감을 나눠 준다. 오후 3시에도 일을 찾지못 한 사람에게 일을 주고, 해질 무렵인 오후 6시까지도 일을 찾지 못한 사람을 발견하여 그에게도 일을 맡긴다.
저녁이 되어 일을 마치고 품삯을 계산하는데 포도원 주인은 오전부터 온 종일 일한 사람에게도, 해 질 무렵에 와서 잠깐 일한 사람에게도 공평하게 똑같이 하루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씩 지불한다.
그 때 하루종일 일한 품꾼이 원망한다. “나 중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온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태복음 20:12)
포도원 주인이 말한다
“ 친구여 내게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내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가 선함으로 (나를) 악하게 보느냐”(마태복음20:14-15)
우리 목회자들은 위의 말씀을 본문으로 수없이 많은 설교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포도원 주인이고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의 판단과 선한 의지에 공감하고 옳다고 흔쾌히 여길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그리고 개인적인 이기심에서 자유롭지 않다.
복음을 메시지로 전하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삶은 늘 이중적이기 쉽다.
진정한 신앙과 교회 공동체적 삶은 복음을 그릇에 담는 일이다. 교회는 신앙의 본질과 복음의 가치를 담는 그릇이여야 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협동조합은 복음의 생명력과 사회적의 가치를 담는 사회적 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