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인상 8

조신권 (시인/문학평론가/연세대 명예교수)

 


한 줄로 신념을 관통시키는 일관성의 철학이 있었으면

 

지금은 어두움과 부끄러움이 짙은 안개처럼 깔린 때다. 얼마 전에 어느 글에서도 썼지만 이 시대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모르는 시대다. 머리가 나쁘거나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욕심이 눈을 가려 나쁜 것이 나빠 보이지 않고 옳은 것이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도 쇠가죽으로 된 얼굴(鐵面皮)인 듯 부끄러워할 줄도 모른다. 사회가 유기적인 공동체 관계에서 일탈하여 기계적인 관계로 전환되면서 익명 사회가 되자 부끄러움 곧 수치는 윤리적 기능을 상실되고 말았다.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감시하고 통제해 줄 규범인 ‘성실성’(sincerity)의 줄이 끊어져 죽을죄(deadly sin)를 저지르고서도 뻣뻣하게 얼굴을 쳐들고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떠드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진정한 주체(主體)마저 살아진 시대가 현대다. 진정한 주체는 당연히 따라야 하는 요구에 따르지 않는 부조리한 자아를 발견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윤동주는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요구하는 절대적인 순종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너무나 부끄러워 “서시”(序詩)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러움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

참으로 어려운 고백이다. 생명을 내건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원하는 신념을 지키기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동주는 그 신념을 죽음으로써 고수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우러르게 되고, 그 한 줄로 관통하는 성설성의 철학을 따라 생명을 받친 순국자로 기리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전환기(turning point)는 대체로 30-33세 어간이다. 그러나 막장 사회가 되면서 요즈음은 젊은이 늙은이 누구라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면 먹으려고 침을 삼키고 음모와 흉계를 꾸며 악을 도모한다. 악의 꽃이 만발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국가가 통제하질 않고 오히려 조장하는 불합리한 악랄한 때가 되었다.

이런 위기 시국에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손규태와 이신건이 옮긴『나를 따르라』(서울 : 기독교서회, 2010)라는 책 38페이지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확산과 교회의 점진적인 세속화와 더불어 값비싼 은혜에 대한 인식은 점차 상실되었다. 세상은 그리스도교 세상으로 변했고, 은혜는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값싸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값비싼 은혜가 싸구려 은혜로 변질되면서 기독교적인 신앙이나 신념도 변했다. 세상이 기독교 세상처럼 되고 기독교는 세상과 한 패거리가 되었다. 그러면서 세상을 향해 침묵하기 시작한다. 본회퍼는『옥중서신』283페이지에서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교회는 죄 없는 사람들의 피가 하늘을 향해서 울부짖는 것을 보고 외쳐야 할 때 침묵을 지켰다. 교회는 바른 말을 바른 방법으로 바른 때 찾아내지 못했다. 권력 앞에 무릎 꿇고 가난한 자를 약탈하고 방조하는 일에 교회가 침묵했다.”

이 시대는 값싼 은혜만 있고 값비싼 은혜는 사라진 시대로서, 이런 수치스러운 요구에 부응해서도 안 되고 침묵해서도 안 되는데, 부끄럼 없이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그러면서 이 시대의 영혼을 이끌어갈 교회는 그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과거에는 동시대의 부당하고 불합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침묵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회가 교회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교회의 양심적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교회는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다. 의식과 신념과 양심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 세울 신앙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한 줄로 꿰고 세울 수 있는 철학이 있으면 행동의 지침이 되어 그것이 가능한데 그것을 잃으니 등치만 큰 무력한 실체가 되고 말았다. 왜곡된 생각도 한 줄로 정리하면 반듯해질 수가 있고 잘못했다가도 회개하고 돌아서 정도를 따라 갈 수가 있는데, 요즈음엔 그런 황금률이 없다. 그래서 울리는 괭과리가 되어 요란하기만 할 뿐, 현실의 부끄러움을 향하여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만 지킨다. 이제라도 그 침묵의 대열에서 일탈하여 올곧은 삶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폴 틸리히가 말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용기다. 한 줄의 철학, 다른 말로 말하면, 일관된 ‘성실성’이 정신적인 용기 있는 인물을 만든다. 사회의 지도자는 지위가 높거나 재산이 많은 것이 아니라 일관된 신념을 가졌느냐에 달렸다.

 

 

 

조신권 (시인/문학평론가/연세대 명예교수)

 

지금은 어두움과 부끄러움이 짙은 안개처럼 깔린 때다. 얼마 전에 어느 글에서도 썼지만 이 시대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모르는 시대다. 머리가 나쁘거나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욕심이 눈을 가려 나쁜 것이 나빠 보이지 않고 옳은 것이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도 쇠가죽으로 된 얼굴(鐵面皮)인 듯 부끄러워할 줄도 모른다. 사회가 유기적인 공동체 관계에서 일탈하여 기계적인 관계로 전환되면서 익명 사회가 되자 부끄러움 곧 수치는 윤리적 기능을 상실되고 말았다.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감시하고 통제해 줄 규범인 ‘성실성’(sincerity)의 줄이 끊어져 죽을죄(deadly sin)를 저지르고서도 뻣뻣하게 얼굴을 쳐들고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떠드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진정한 주체(主體)마저 살아진 시대가 현대다. 진정한 주체는 당연히 따라야 하는 요구에 따르지 않는 부조리한 자아를 발견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윤동주는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요구하는 절대적인 순종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너무나 부끄러워 “서시”(序詩)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러움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

참으로 어려운 고백이다. 생명을 내건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원하는 신념을 지키기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동주는 그 신념을 죽음으로써 고수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우러르게 되고, 그 한 줄로 관통하는 성설성의 철학을 따라 생명을 받친 순국자로 기리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전환기(turning point)는 대체로 30-33세 어간이다. 그러나 막장 사회가 되면서 요즈음은 젊은이 늙은이 누구라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면 먹으려고 침을 삼키고 음모와 흉계를 꾸며 악을 도모한다. 악의 꽃이 만발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국가가 통제하질 않고 오히려 조장하는 불합리한 악랄한 때가 되었다.

이런 위기 시국에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손규태와 이신건이 옮긴『나를 따르라』(서울 : 기독교서회, 2010)라는 책 38페이지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확산과 교회의 점진적인 세속화와 더불어 값비싼 은혜에 대한 인식은 점차 상실되었다. 세상은 그리스도교 세상으로 변했고, 은혜는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값싸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값비싼 은혜가 싸구려 은혜로 변질되면서 기독교적인 신앙이나 신념도 변했다. 세상이 기독교 세상처럼 되고 기독교는 세상과 한 패거리가 되었다. 그러면서 세상을 향해 침묵하기 시작한다. 본회퍼는『옥중서신』283페이지에서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교회는 죄 없는 사람들의 피가 하늘을 향해서 울부짖는 것을 보고 외쳐야 할 때 침묵을 지켰다. 교회는 바른 말을 바른 방법으로 바른 때 찾아내지 못했다. 권력 앞에 무릎 꿇고 가난한 자를 약탈하고 방조하는 일에 교회가 침묵했다.”

이 시대는 값싼 은혜만 있고 값비싼 은혜는 사라진 시대로서, 이런 수치스러운 요구에 부응해서도 안 되고 침묵해서도 안 되는데, 부끄럼 없이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그러면서 이 시대의 영혼을 이끌어갈 교회는 그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과거에는 동시대의 부당하고 불합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침묵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회가 교회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교회의 양심적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교회는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다. 의식과 신념과 양심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 세울 신앙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한 줄로 꿰고 세울 수 있는 철학이 있으면 행동의 지침이 되어 그것이 가능한데 그것을 잃으니 등치만 큰 무력한 실체가 되고 말았다. 왜곡된 생각도 한 줄로 정리하면 반듯해질 수가 있고 잘못했다가도 회개하고 돌아서 정도를 따라 갈 수가 있는데, 요즈음엔 그런 황금률이 없다. 그래서 울리는 괭과리가 되어 요란하기만 할 뿐, 현실의 부끄러움을 향하여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만 지킨다. 이제라도 그 침묵의 대열에서 일탈하여 올곧은 삶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폴 틸리히가 말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용기다. 한 줄의 철학, 다른 말로 말하면, 일관된 ‘성실성’이 정신적인 용기 있는 인물을 만든다. 사회의 지도자는 지위가 높거나 재산이 많은 것이 아니라 일관된 신념을 가졌느냐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