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공정한 사회를 꿈꾸는가?

윤응진(철학박사, 전 한신대학교 총장)

 

 정말 공정한 사회를 꿈꾸는가?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우리는 큰 착각에 빠지곤 한다.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으니 이제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이라는 기대처럼 큰 착각이 또 있을까?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전 1:9) - 이것이 전도서를 집필한 현인이 체득한 깨달음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간을 선물로 주시지만, 그것을 새롭게 채워야 하는 것은 인간의 과제이다. 인간 스스로가 새로워지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시간조차 해묵은 관습과 관행들에 의해 오염되고 말 것이다. 이점에서 인간은 거듭 실패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인간이기에 또 다시 진정으로, ‘새해’가 전개되기를 소망하고 싶다.

인간의 변화가 우선해야 하는지 혹은 사회구조의 변화가 우선해야 하는지 묻는 것은 진부하다. 구조가 변화되어야 인간의 삶이 효과적으로 변화될 수 있겠지만, 구조를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개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대선을 앞두고 있어서 어느 때보다도 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더욱 가열되고 있다. 대선 후보들은 자신이 ‘새로운’ 사회를 열어갈 적격자라고 선전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한다. 그러나 이제는 정치인들의 선전 때문에 ‘희망고문’에 사로잡힐 국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새로운 사회’란 어떤 것인가?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기만 하면 ‘새로운 사회’를 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지만, 그들이 말하는 ‘새로움’이란 사실상 어두운 과거로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곤 하였다. 우리는 실제로 역사가 후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하였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회’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새해의 화두는 ‘공정’이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이 ‘공정’을 최고의 가치로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공정한 사회’를 형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공정한 사회를 꿈꾸고 있는 것일까?

 

어느 대학교 전직 총장의 회고담 한 토막. 그의 대학교 구성원들은 두 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두 진영의 싸움은 각각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내세우며 오래 지속되었지만, 그는 갈등의 근본 원인이 특권과 특혜를 추구하는 탐욕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장치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해묵은 갈등구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교육공동체가 ‘공정’과 ‘평등’이라는 기본 가치를 회복하여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교가 학칙과 상식에 따라서 운영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목소리 높여 그런 가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종종 여러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구실로 특혜를 요구받았다. 심지어 공식적으로는 ‘공정’을 요구하던 사람들도 은밀하게 개인적 특혜를 요구하곤 하였다. 그들의 청탁을 거부할 때마다, 그는 “총장이 그것도 못하냐?” 라는 항의를 받아야 했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총장이란 대학 구성원이 지켜야 하는 학칙을 솔선하여 실천하여야 합니다.” 청탁한 사람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총장이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은, 그가 더 가까운 측근의 청탁을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하였기 때문이다. 옛 ‘관례들’을 정당화하던 패러다임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그가 추구하려는 ‘공정’과 ‘평등’이라는 새로운 사고의 틀과 정책노선을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그가 그런 것을 추구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를 이해하고 협력하던 소수를 제외하고는, 양쪽 진영의 아무도 그의 신념과 정책노선에 만족할 수 없었다. 특권을 얻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불이익을 받는 것이라는, 따라서 차별받는 것이라는 불쾌감을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과 특혜를 보장할 ‘새로운’ 지도자를 요구하게 되었다. 결국 그의 ‘무모한 실험’은 실패한 것으로 판정 나고 말았다. ‘공정’을 요구하던 집단마저 그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요구하였던 ‘공정’은 정치적 슬로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새해에 우리의 관심사는 공정과 평등을 실현할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누가 그런 가치를 실현하기에 적합한지 냉철히 분석하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후보가 실제로 삶에서 공정과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는지 철저히 검증되어야 한다.

 

전도서는 공정을 지켜야 하는 마지막 보루마저 무너진 세상에 대하여 탄식한다: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가 있어야 할 곳에 악이 있다”(전 3:16). 이 탄식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누가 이 보루를 무너뜨렸는가? 누가 이 현실에 저항하고 있는가? 우리는 진정으로 ‘새로운’ 사회, 곧 ‘공정’한 사회를 원하고 있는가? 실제로 ‘공정’한 사회를 열어갈 후보를 선택하려 하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심사숙고해야 할 시간이다. 우리의 선택이 ‘새해’를 열어갈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