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하고 위험한 ‘복음’

윤응진(철학박사, 전 한신대학교 총장)

 

불쾌하고 위험한 ‘복음’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눅 6:20-26).

 

이것이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핵심 내용이다. 이 땅 위에 실현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황제의 나라와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기존의 가치관, 사고방식, 판단기준만이 아니라 생활방식과 삶의 목표를 급진적으로 방향 전환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만일 오늘날 누군가 진지하고 용기 있게 이 ‘복음’을 선포한다면, 청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데 오늘날보다 훨씬 더 심각한 신분질서에 의하여 정당화되던 폭력, 불평등, 부정의가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식민지 한복판에서 예수가 이렇게 선언하였을 때, 청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물론 그 “어둠과 죽음의 땅”(마 4:16, 눅 1:79)에서 고난 받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갈 생명의 “빛”을 보여주는 ‘기쁜 소식’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땅을 지배하던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그들과 이권을 나눠먹던 기득권 세력에게는 그것은 매우 불쾌하고 위험한 선동으로서 간주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예수가 그들이 휘두르는 폭력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그 패거리들(사두개파!)은 종교적 정치권력과 물질적 특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를 살해할 음모를 꾸밀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선택한 전략은 예수를 “하나님을 모독하는” 위험한 정치선동가로 몰아서 점령세력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전략을 관철하기 위해 예수를 심문하였고 민중들을 동원하여 관제데모를 실행하였다. 고난 받던 유대민중들을 해방시킬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계몽하고 격려하던 그 예수를 결정적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시위에 바로 그 민중들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로마의 질서와 가치와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그들은 지배자들의 이익을 자신들의 이익과 동일시하였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평화’보다는 일상생활에서 현재 체험하는 폭력과 선전으로 지탱되는 ‘로마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 그들의 안전에 더 유리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자’를 살해하는 데에 앞장섰으리라. 이처럼 지배자들의 사악함만이 아니라 그들의 조종을 받는 피지배자들의 무지몽매함이 예수를 살해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빌라도는 정식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민심’을 잠재우기 위하여(다수결 원칙에 따라서!) ‘유대민중들의 뜻대로’(눅 23:23-25), 예수를 정치범으로서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로마 군인들은 예수를 채찍질하고 조롱함으로써, 그를 무기력한 존재로서 모욕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상은 민족해방을 기대하던 유대인들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래도 예수에 대하여 맹목적인 불안감과 증오심에 사로잡혀 있던 그 군중들은 자신들이 승리하였다고 환호하였다.

로마법에 따라서 실행된 예수에 대한 십자가 처형은 종교적, 정치적 지배 권력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힌 정치적 살해였다. 지배자들은 그 제국의 지배체제에서 누리고 있는 특권적 지위와 부귀영화를 영속적으로 보존하려는 관심사 때문에 서로 적절히 타협하면서(눅 23:12) 골치 아픈 민중선동가를 제거하는 데에 합의하였고, 부당한 재판절차가 그의 죽음을 합법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 과정에서 어리석은 군중들은 여론조작과 공권력의 위협에 굴복하여 예수를 살해하는 데에 동원됨으로써 사실상 자신들의 구원가능성을 스스로 좌절시키고 만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그 꿈을 나누어주려던 그는 그렇게 실패하고 말았다. 지배자들만이 아니라 피지배자들도 여전히 기존의 지배체제가 더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비록 그 체제와 질서가 그들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새로운 세상을 원하지 않았다. 예수의 복음은 평온한 일상을 파괴하는 불쾌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그들을 그 죽음의 길에서 구출하여 생명의 길로 인도하려던 메시아는 철저히 거부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처형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사순절의 현실이다!

 

그 예수가 2022년의 한국 사회에 나타나 그의 ‘복음’을 전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그는 우리를 구원할 탁월한 지도자로서 환영받게 될까? 그의 복음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기쁜 소식’으로서 경청될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기대될 수 없다. 그럼, 그가 설령 사회에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위태롭게 하는 ‘좌파’로 몰려서 배척받아 생명이 위태롭게 되더라도, 언론이 그를 매도하고 검찰이 그를 체포하도록 명령해도, 교회는 그를 받아들이고 ‘그의’ 복음을 실현하기 위하여 함께 투쟁에 나서게 될까? 아니, 교회 스스로가 그 위험한 예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오히려 앞장서서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고, 불순한 사상을 유포하는 자로서 사법당국에 넘겨주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오늘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대답하여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이, 관례적으로 사순절을 지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질문에 대한 침묵은 교회의 위선적이며 사이비적 행태를 은폐하려는 것이리라. 이미 교회들은 부자들과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을 축복하는 ‘다른’ 메시아의 쾌적한 복음을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복음’을 경청하고 예수의 길을 따라가기 위하여 철저히 방향전환하려 하지 않는다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의’ 복음과 ‘그의’ 고난을 다만 종교적으로만, 관념적으로만 이해하려 한다면, 그리고 “예수천당, 불신지옥”만 선전한다면, 부활절의 찬양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베드로처럼 처절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절망과 고난의 현실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비겁함과 무능에 대하여 통곡하지 못한다면, 어찌 부활의 새벽이 감격스러울 수 있겠는가? (2022.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