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에게 주지 마라(이선규 논설 주간!)
개를 빗대어 인간 세상을 풍자한 유머들이 아주 많다. 어떤 곳에 개를 훈련시키는 조련사가 있었다. 천원을 개 목걸이 밑에 끼워주면서 가게에 가서 담배를 한 갑 사오게 하는 심부름을 시킨다. 곧잘 해낸다.
한번은 잔돈이 없어서 만원을 목걸이에 끼워주면서 심부름을 시켰다. 그런데 개가 돌아오지 않는다. 기다리다 못해 주인이 가게에 가보니 이놈의 개가 의자에 누워 서 맥주를 마시면서 안주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인 왈 “야 이놈아 너 왜 훈련받은 대로 안 하는 거야? 이게 무슨 짓이야!” 호통을 친다.
그러자 개가 왈 “전에 담배 한 갑 사고 나면 돈이 없었잖아요”라고 대꾸했다. 이는 돈만 있으면 방종 하는 인간들의 꼴불견을 풍자한 말이다. 어떤 사람이 개 자랑을 한다. 개가 출근할 때는 배웅을 하고 퇴근할 때는 마중을 나오고 가게에 가서 먹거리도 구해오고 신문도 가져오라 하면 곧잘 가져온다. 고 침이 마르도록 개 자랑을 한다.
듣고 있던 친구 왈 “그 개 얼마에 샀는데?” “30만원 주고 샀어.” “그 개 내개 팔아” “안 돼” “그럼 배로 60만원을 줄 테니 팔아”그러자 선 듯 팔았다. 며칠 후 개를 사간사람이 와서 “뭐라고? 배웅을하고 마중을 한다고? 먹고 잠만 자는 개를 ...이 사기꾼 놈아!” 하고는 노발 대발했다. 그러자 개를 판 작자가 하는 말 “이봐요 그렇게 말해 가지고 그 개를 어떻게 그 개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 치울 수 있겠소” 라고 했다. 이는 인간 (人間) 세상에 범람하는 사기 범죄를 비꼰 이야기이다. 남의 이익을 가로채거나 남의 행복을 손상 시키면서 이기적인 욕심만 채우려는 세상이 아닌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세상이다. 속는 어리석음도 없어야 하지만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한 남자가 개가게 주인에게 와서 화를 내면서 항의한다. ‘ 이 똥개를 개라고 팔아먹어 ! 왜 그러냐고 묻자 “지난밤 집에 도둑이 들어 100만원을 훔쳐 갔는데 한 번도 짖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주인 왈 “이것 보세요?
이 개는 부자집에서 키운 개라서 100만 원 정도 도둑맞는 것은 눈도 까딱 안 해. 개를 좀바로 알아 이 양반아 되레 큰 소리치면서 기세등등하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그와 유사한 사례들이 비일비재하다.
위의 이야기 들은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돈이 없어서 불행이 아니라 돈이 있어서 낭패를 겪고 불행을 자초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품을 경매하는 일이라든지 허위 과장 광고를 통하여 고객들을 속이는 일들은 너무 많아 문제를 삼을 수도 없으며 교활한 사기도 날로 더해가고 있는데 이 세상 인간들의 부조리와 모순을 보면 실로 개도 웃을 세상이다.
속성이든 정식으로 되었던 무더기로 배출된 교역자가 일년에 수천을 헤아리며 겉모습만 보고는 그 속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부는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직에 비교해 성도들 위에 군림 하여 성직에 대한 질 저하에 무자격자들이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치부이며 약점이기도 하다. 문제는 교회를 양도 할 때에 넘겨주기로 한 교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한두 사람씩 빠져나가기 시작해 거의 목회자 가족만이 나는다고 한다.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개가 웃는지도 모른다. 늘 베풀기에 힘썼던 나의 어머니의 말씀 ‘무는 개가 돼라. 그래야만 되돌아본다. 당신이 물지 못하니까? 자식에게는 귀에 새기도록 들려주시는 그 말씀을 나 역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물다니 물리지나 말일이지. 항상 당하고만 들어오니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자기 주인이 아니면 짖어대는 개의 속성이라도 현대인들은 주인을 바로 알아보기라도 하는가?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그러한 개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마7:6 절에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하신다. 거룩한 것은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나
구별해 주신 것 성도라는 구별된 신분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성서에서 말하는 개는 성도가 지켜야 할 거룩성을 상실한 것을 빗대신 것으로 이해한다. 교회가 지켜내야 할 거룩성을 상실하면 개들이 웃을 세상이 되 었다. 개로 취급하는 우리도 그렇지는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요즘 코로나 19로 인한 후유증이 심각한 것은 선진국이라는 유럽에서 더 심각한가 보다.
우리나라 확진자 수가 4-500명 추세로 하향 추세인데 비해 인구 비율로 보면 비슷하나 그 나라들이 확진자가 1-2만 또는 4-5만이라고 한다. 그들은 어떤 나라들인가? 14세기 무렵 신 중심의 역사를 제거하고 르네상스 인본주의를 주장하던 신 중심의 역사를 제거하고 인본주의를 수용한 결과로 교회는 텅텅 비어있고 과학의 신도 절, 절 매고 있는 상황이다. 거룩한 것을 세속에 내어준 결과가 아니겠는가?
어제는 이웃집에 혼자 사는 부인께서 기르던 개를 잃어버렸다고 애를 태우며 찾아 헤매인다. 얼마나 효자 노릇을 대신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 애완견을 기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가 보다. 진리를 찾고 은혜를 사모하는 열심히 저분만큼이라도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이 뇌를 자극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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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에게 주지 마라(이선규 논설 주간!)
개를 빗대어 인간 세상을 풍자한 유머들이 아주 많다.
어떤 곳에 개를 훈련시키는 조련사가 있었다.
천원을 개 목걸이 밑에 끼워주면서 가게에 가서 담배를 한 갑 사오게 하는 심부름을 시킨다. 곧잘 해낸다.
한번은 잔돈이 없어서 만원을 목걸이에 끼워주면서 심부름을 시켰다. 그런데 개가 돌아오지 않는다.
기다리다 못해 주인이 가게에 가보니 이놈의 개가 의자에 누워 서 맥주를 마시면서 안주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인 왈 “야 이놈아 너 왜 훈련받은 대로 안 하는 거야? 이게 무슨 짓이야!” 호통을 친다.
그러자 개가 왈 “전에 담배 한 갑 사고 나면 돈이 없었잖아요”라고 대꾸했다. 이는 돈만 있으면 방종 하는 인간들의 꼴불견을 풍자한 말이다.
어떤 사람이 개 자랑을 한다. 개가 출근할 때는 배웅을 하고 퇴근할 때는 마중을 나오고 가게에 가서 먹거리도 구해오고 신문도 가져오라 하면 곧잘 가져온다. 고 침이 마르도록 개 자랑을 한다.
듣고 있던 친구 왈 “그 개 얼마에 샀는데?” “30만원 주고 샀어.” “그 개 내개 팔아” “안 돼” “그럼 배로 60만원을 줄 테니 팔아”그러자 선 듯 팔았다.
며칠 후 개를 사간사람이 와서 “뭐라고? 배웅을하고 마중을 한다고? 먹고 잠만 자는 개를 ...이 사기꾼 놈아!” 하고는 노발 대발했다. 그러자 개를 판 작자가 하는 말 “이봐요 그렇게 말해 가지고 그 개를 어떻게 그 개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 치울 수 있겠소” 라고 했다.
이는 인간 (人間) 세상에 범람하는 사기 범죄를 비꼰 이야기이다.
남의 이익을 가로채거나 남의 행복을 손상 시키면서 이기적인 욕심만 채우려는 세상이 아닌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세상이다. 속는 어리석음도 없어야 하지만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한 남자가 개가게 주인에게 와서 화를 내면서 항의한다.
‘ 이 똥개를 개라고 팔아먹어 ! 왜 그러냐고 묻자 “지난밤 집에 도둑이 들어 100만원을 훔쳐 갔는데 한 번도 짖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주인 왈 “이것 보세요?
이 개는 부자집에서 키운 개라서 100만 원 정도 도둑맞는 것은 눈도 까딱 안 해. 개를 좀바로 알아 이 양반아 되레 큰 소리치면서 기세등등하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그와 유사한 사례들이 비일비재하다.
위의 이야기 들은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돈이 없어서 불행이 아니라 돈이 있어서 낭패를 겪고 불행을 자초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품을 경매하는 일이라든지 허위 과장 광고를 통하여 고객들을 속이는 일들은 너무 많아 문제를 삼을 수도 없으며 교활한 사기도 날로 더해가고 있는데 이 세상 인간들의 부조리와 모순을 보면 실로 개도 웃을 세상이다.
속성이든 정식으로 되었던 무더기로 배출된 교역자가 일년에 수천을 헤아리며 겉모습만 보고는 그 속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부는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직에 비교해 성도들 위에 군림 하여 성직에 대한 질 저하에 무자격자들이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치부이며 약점이기도 하다.
문제는 교회를 양도 할 때에 넘겨주기로 한 교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한두 사람씩 빠져나가기 시작해 거의 목회자 가족만이 나는다고 한다.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개가 웃는지도 모른다. 늘 베풀기에 힘썼던 나의 어머니의 말씀 ‘무는 개가 돼라. 그래야만 되돌아본다. 당신이 물지 못하니까? 자식에게는 귀에 새기도록 들려주시는 그 말씀을 나 역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물다니 물리지나 말일이지. 항상 당하고만 들어오니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자기 주인이 아니면 짖어대는 개의 속성이라도 현대인들은 주인을 바로 알아보기라도 하는가?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그러한 개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마7:6 절에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하신다. 거룩한 것은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나
구별해 주신 것 성도라는 구별된 신분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성서에서 말하는 개는 성도가 지켜야 할 거룩성을 상실한 것을 빗대신 것으로 이해한다.
교회가 지켜내야 할 거룩성을 상실하면 개들이 웃을 세상이 되 었다.
개로 취급하는 우리도 그렇지는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요즘 코로나 19로 인한 후유증이 심각한 것은 선진국이라는 유럽에서 더 심각한가 보다.
우리나라 확진자 수가 4-500명 추세로 하향 추세인데 비해
인구 비율로 보면 비슷하나 그 나라들이 확진자가 1-2만 또는 4-5만이라고 한다. 그들은 어떤 나라들인가? 14세기 무렵 신 중심의 역사를 제거하고 르네상스 인본주의를 주장하던 신 중심의 역사를 제거하고 인본주의를 수용한 결과로 교회는 텅텅 비어있고 과학의 신도 절, 절 매고 있는 상황이다. 거룩한 것을 세속에 내어준 결과가 아니겠는가?
어제는 이웃집에 혼자 사는 부인께서 기르던 개를 잃어버렸다고 애를 태우며 찾아 헤매인다. 얼마나 효자 노릇을 대신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 애완견을 기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가 보다. 진리를 찾고 은혜를 사모하는 열심히 저분만큼이라도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이 뇌를 자극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