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마음

2020-12-21

기다리는 마음 시편 130:1-8절

지난주 교회 권사님과 대화하던 중 얼마 전 딸과 통화 후

소식이 두절 되어 보고 싶은데 팬데믹(pendemic)코로나로 인 하여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기다려지게 마련이다.

예상치 않던 연락이라도 오면 큰 은혜라도 입은 듯 누구에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지는 것이 바로 기다리는 마음이다.

본문 시 130편은 이러한 기다리는 자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 소서 이 구절에서 그러한 심정을 엿보게 된다.

이시는 여호와 앞에서 나는 정결 하다거나 죄와는 상관없다고 나설 자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말라기 3:16 절에도 피 차에 말한 것까지도 분명하게 행위록에 기록하리라고 했고 욥기 25:4절에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겠느냐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죄인인 인생이랴. 얼마나 더 하겠느냐는 것이다.

과학 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죄에대한 관심조차 무디어져 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인간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구약에 나타난 나단 선지자는 다윗왕 앞에 나타나서 어느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행패를 부리는 비유를 말한다.

다윗왕은 크게 노하여 그런 놈은 당장에 처치해 버리라고 엄한 명령을 내린다.

그때 나단은 “왕인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직고를 하게 된다.

다윗은 여호와 앞에 거꾸러진다.

내가 여호와 앞에 범죄 하였나이다.

여기서 다윗의 위대성을 보게 된다. 보통사람이라면 온갖 변명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소인과 대인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소인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의 큰 허물은 작게 보이고 자기가 미워하는 자의 작은 죄는 크게 보인다.

이체는 말하기를 죄의 관념은 병이다. 라고 했지만 성경은 말하기를 죄의식은 영혼의 척도라고 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다. 이 죽을 죄인들에게 ‘그러나’가 없으면 영, 영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으므로 주 앞에 당당히 나아 갈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열려 있지 않은가?.

우리는 주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의인의 반렬에 세워주시려고 오신 바로 그날을 기다려 본다.

둘째는; 그 말씀이 주께 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들어오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시오, 그날이 바로 성탄절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다.

같은 말씀을 빌립에는 생명의 말씀 엡113절에는 진리의 말씀 행13:26절에는 구원의 말씀 고후5:19절에는 화목케 하는 말씀으로 나온다.

내 영혼이 말씀 사모하기를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하다고 하였다. 허리에 칼을 차고 손에 창과 훼불을 들고 적진을 응시하는 병사의 마음에는 날이 새기만을 간절히 기다린다.

날이 새면 경계가 쉬워지고 임무가 교대되기 때문이다.

말씀을 갈망하는 자의 열심은 사실 파수꾼의 기다림 정도에 비교 할 수가 있겠는가.

기나긴 어두운 밤이 지나고 아침 햇볕이 비춰올 때 제사장은 아침 제사를 드린다.

지난밤 성전을 지키는 파수의 임무를 다 마친 레위인도 동참 하여 함께 제단 앞에 나아가 감의 기도를 드린다.

그 때에 주님은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주검도 고통도 없는 영원히 안식하는 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셋째는 소망이 주께 있다. 자신이 철저한 죄인이라고 깨달은 소망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은총을 베풀고 용서해 주신다.

그것을 보여준 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우리는 코로나 정국을 맞이하여 힘들고 어려운 터널을 지나고 있지만 이 기 다림의 희망의 끈을 붙들고 나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녀로 받아 주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이 세상의 소망 구름 같고 부귀와 영화도 한 꿈일세” 범죄 한 인간에게는 소망은 없다. 현대인들은 생존의 삶을 위해서는 피나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이긴 것으로 끝납니까? 수많은 실의와 좌절을 격으며

살아가고 있다. 팬데믹 코로나로 인하여 그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

지금껏 과학의 발달은 천체 세계의 개발에 총력을 다 기우렸다. 그러는 동안 인간의 본성은 소외되고 추방되었으며.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기계문명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인간은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와 같다.

결국 인간은 죽음에 넘겨져서 무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망의 사도 베드로는 일직이 선포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고 했다. 인류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공포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각자의 양심이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죽음은 죄의 값이라고 또는 죽음의 가시라는 것이다.

“주의 사자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니라. 이러므로 메시야 탄생은 전 인류의 소망이다.

인류의 소망은 물질계에도 과학의 만능에도 지식의 팽창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인류의 소망은 예수 그리도”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능력과 생명의 열쇠를 가지셨다.

그 어느때 보다 성탄의 의미가 희석되고 고요한 밤이 탄식의 밤이 되고 있다. 오늘 나는 안양천을 걸으며 나무 그늘에 앉아 있으니 싸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일어나 앞으로 나아 가니 따스한 햇빛이 비쳐온다. 현재 어려운 상황이지만 한 걸음 만 앞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따스한 은총의 햇빛을 비추어 주시리라 믿는다. 한 걸음 만 믿음의 발걸음을 앞으로 나아 가자.

이 은총을 내려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아기 예수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성탄의 기쁨이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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