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십자가 묵 상

2021-03-03

        이선규목사(논설주간)


십자가의 도란 원어로 보면 십자가의 말씀이다.

사도바울은 기독교 진리를 한마디로 “십자가의 도‘라고 하였다.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하였다.


거리낀다는 것은 ‘반대’ ‘상치된다. 는 말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사건이 저들이 염두에 두었던 메시아 관과 상치되며 반대 된다는 말이다.

헬라인들의 메시아관은 다윗 가문에서 나올 왕으로 적과 싸워 이기고 물리치는 강 한자로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벳세다 언덕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로 5천명을 먹이셨을 때에 ‘아 ’바로‘ 이분이시구나 하고 생각하여 왕을 삼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 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메시아 즉 구원할 자로 받아들여 지기는 커녕 거리끼는 것으로 생각한 것은 당연한지 모른다. 이 십자가의 도는 자기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도 찾아 볼 수 없는 어리석고 허탄한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헬라인들 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철학 하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 텔레스 같이 유명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현실적인 생활의 조건들이 점점 좋아지고 부족함을 모르고 사는 현대인들 에게는 십자가의 도는 무의미 할지 모른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보다 형식적이고 명목상의 교인이 많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했다.


능력이란 구원의 능력이요 지혜란 구원의 지혜란 말이다. 십자가를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기 때문에 이 십자가의 도가 구원의 능력이요 구원의 지혜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생의 구원을 얻는 것이요. 그 방법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불교는 자기 죄를 자력으로 해탈을 말하고. 우리 기독교는 대속의 은총으로 사죄받는다고 가르친다.

죄는 선행과 적선을 한다고 상쇠되는 것도 아니다.

히브리서 9:13절에 부정한 암송아지의 제물이 죄를 씻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의 피가 어찌 너희 죄를 깨끗하게 못하겠느뇨.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생각해서는 울어야 하지만 죄만 들여다보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회개해야 한다. 진정으로 회개한 성도의 죄는 주님이 책임져 주신 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는 우리 허물을 사하시고 형벌을 면하시고 심판에서 구하고 포로에서 해방 시키고 지옥에서 건지시고 하늘 궁전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

시편을 쓴 다윗왕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짓고 너무나 괴로워서 밤마다 눈물로 요를 적시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받고 난 후 그는 구원의 기쁨과 사죄의 확신에서 시편을 썼는데 시편 106편에서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셨나이다. 라고 고백하였다.

엡2:1-2“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 행하여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마귀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이다.

여기 불순종의 아들들은 십자가의 도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말한다.

하나님 없이 살던 우리의 조상들은 온전히 마귀의 지배를 받고 살았다.

윗목에는 삽시랑 귀신 부엌에는 조왕 귀신 창고에는 업 귀신 텃밭에는 텃신 변소에는 직신 토방에는 토방 신 샘에는 옥황상제 신들에는 들 귀신 마을 동구 밖에는 지하 대장군 산 고개에는 서낭당 신 그야말로 모든 땅의 영역에서 마귀가 지배 했다. 이사 가는 날 결혼하는 날, 지붕 이는 날, 방 뜯는 날, 해산하는 날, 특히 바닷가에는 용 왕신을 섬겨야 사고가 없다고 해서 용왕 에게 제사를 드리며 살았다.

예수 믿은 뒤에는 마귀는 예수의 십자가 은총을 받고 사는 사람을 지배 할 수 없게 되었다.

딤후2:26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다 예수 믿고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났다.

요일 5:18 하나님 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 못 하느니라.고 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능력은 시험과 환란을 이기는 능력이다.

사람은 누구나 평안을 원하나 세상에는 고난이 있다.

우리들이 많은 시험과 환란을 당할 때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가 한탄을 한다. 시험이오는 이유는 두 가지 가 있다.

약1:2,3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믿음의 시련이 있다. 요셉, 모세, 도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도록 연단시키기 위한 환란이 있었다. 욕심으로 인한 시험도 있다.

야곱의 환란 다윗왕가의 환란 등이 그것이다. 믿음이 시련은 인내의 기도로 욕심으로 인한 환란은 회개의 기도로만 자기를 정화 시킬 수 있다.

하나님은 믿음의 시련이든 욕심으로 인한 시험이든 이 시험을 참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고 한다. (약1:2)왜 기쁘게 여겨야 하나?

하나님이 나를 아주 버리지 않고 사랑하셔서 시험을 허락 하 시기 때문이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 하신 친구 찾아 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다.

골로새서 2:15절에는 그리스도는 정사와 권세에 대항하여 십자가로 승리 하셨다고 하셨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오던 사탄의 불법과 죄악과 못된 것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던 그 순간 완전히 파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십자가가 있는 곳에 승리가 있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는 자는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의 심령 속에는 결코 죄악이 침투하지 못한다.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악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싶은 분들은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배워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시기 바란다.

.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아 계시느니라. 고 하셨다.

그러기에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했다.

바울은 출신 배경이나 학문의 업적 혹은 사람들의 평판을 자랑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의 의식이 바꾸며 선호하는 것이 바뀌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식은 사도들의 의식과 다름이 없어야 한다.

자랑 할 것이 아무리 많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 할 것이 없다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1절 이하에서 허물과 죄로 죽은 진노의 자녀를 하나님께서 그 큰 사랑으로 살리셨다고 하였다.

그 큰사랑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 이다.

그러니 어찌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것으로는 한 명도 구원 할 수 없는데 십자가를 믿는 모든 자를 구원 할 수 있으니 십자가는 정말 우리의 자랑이다.

우리도 남은 생애 너무 세상 것에 급급해 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붙들고 죄와 사탄과 환란을 이기는 자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