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5주년에 되 새기는 말씀

광복절에 되새기는 말씀 

         논설주간: 이선규 목사


현재 지구상에는 수억의 인구가 상존하고 있으며 또는 수없는 인구가 지구를 다녀갔다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관심이 무엇일까? 해방과 자유의 문제가 아닐까?

혹 생각하기를 먹 거리가 있어야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유가 제한된 사회를 보면 먹 거리 문제가 해결된 경우는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자유의 문제는 먹 거리 만큼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역설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0. (갈5:01)

자유의 문제는 우리의 모두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자유하게 되는 길은 무엇일까?

진리를 터득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 진리를 기반 하지 않는 모든 자유는 반드시 더 무거운 멍에를 메게 되고 더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소련의 공산 혁명 세력들, 나치스의 국가사회주의나 그 밖의 군부 혁명 세력들의 결말은 잔 인 무도한 독재 정권 탄압정치 폭력정치의 양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진리가 인간에게 주는 은덕이 무엇일까?

(헤셀(heschel)은 곧자유라고 말하였다.

죄의 유혹으로 부터의 해방 타인 (他人)의 노예 상태로 부터의 해방됨으로 부터 얻는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유대인 성서학자요 예언자이다. 그는 결코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 들이 지 않았지만 성서의 내용을 부인하지 않았다. 진리에 의한 자유 그것이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자유 사람의 생명을 지키며 그 존엄성을 지키는 자유이다.


그렇다면 진리를 터득하는 길이 무엇일까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너희가 내 말에 머무르면 진리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물리학자는 물리학의 원리를 터득하여야 온갖 물리적인 현상을 올바르게 진단하고 처방을 내릴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해야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老子는 우주의 법은 도 (天法道)라 하였다. 그가 말한 도는 요한복음서에는 하나님을 일컬어 말씀 (logos)이라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된 개념이다.

서양의 속담에 나오는 말이다.

똑똑한 쥐는 하늘을 나는 새를 부러워하지 않고 깊이, 깊이 굴을 뚫는다. 그것이 쥐가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그리스도인이나 현인들은 세상 돌아 가는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

진리를 터득한 사람만이 자유를 올 바르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자유는 지키지 못하면 다시 빼앗기고 누리지 못하면 잃게 되고 만다.

잃은 후에 다시 얻으려면 더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질병도 재발하면 고치기가 더 힘들어 지는 이치와 같다.


자유는 항상 도전과 위협을 받도록 되어 있으므로 자유를 지키고 더 풍성히 누리도록 해야 한다. 성서는 말하기를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 우는데 쓰지 말라고 당부한다(벧전 2:16)자유가 있는 곳 그 자리에는 자유의 노래가 있고 기쁨의 춤이 있다.

자유의 원동력은 진리에서 비롯된다.

진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한다.


그 말씀의 내용이 무엇일까?

토인비는 그의 역사가의 종교적 접근에서 성서가 인류에게 끼친 위대한 공헌은 두 가지를 제시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4;7)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한다. (마태 26:52)

사랑 한다는 것은 너무나 낭만 적이며 감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 받을 때의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의 일, 일 뿐이다.


실제로 자기를 버리고 비우는 사랑은 힘들고 괴로운 일이다. 말과 같이 사랑하기엔 사람의 생각과 의지가 너무 약하다.

슐라이엘마하 (schleiemacher)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저술을 남기었다. 그는 그의 책에서 기도에 관해 언급한다.


그리스도교의 위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다가온다.

첫째는 기도 없는 행동이고

둘째는 행동 없는 기도라는 것이다.

교회가 사회적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일은 바람직 하지만 기도가 없을 때 그것은 사회 혁 명 세력으로 변형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기도는 줄기차게 드리는데 실제로 실천 하는 일이 없으면 종교의 형식으로 남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들어야 할 내용으로 다가온다.

교회의 사명은 제사장 역할과 예언자 역할이 있다.

사람은 기도 하자고 역설한다. 그런데 그 대부분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일 뿐이 아 닌가? 참으로 기도 드린다는 것은 나는 없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만이 살아 계신다는 것 이다.


이런 뜻에서 성 어거스티 누스 (st.augustinus)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뜻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남 겨 놓았다. 하나님 당신을 저 버림은 쓰러지는 것이요

당신께 향하는 것은 일어서는 것이며

당신 안에 머무는 것은 확실한 존립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을 떠나는 것은 죽는 것이요


당신께 돌아가는 것은 신생으로 깨어나는 것이며

당신 앞에 머무는 것은 사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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