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가 무성하다. 
(이선규 논설 주간)
평생 목회를 하며 거처할 공간이 없던 차에 은퇴 후 하나님의 은혜로 거처할 곳을 마련 해주셔서 천안으로 이사한 지 벌써 여러 해가 된다. 나는 서울에서 일을 보아야 하므로 주말 부부, 아니면 월말 부부로 전락하게 되었지만 홀로 집을 지키는 사모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이웃 주민이 ’묵어 있는 땅이 있으니 한번 경작해 보라‘는 제의가 와서 묵은 땅을 경작하고 생전 처음으로 먹거리를 심었는데 어설프지만 자라는 모습 에 흐뭇한 마음 자랑도 해보고 잘 자란 먹거리들을 이웃과 이웃과도 나누는 것이 참 보람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하루는 경작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건넨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대답이 ’잡초가 워낙 많이 나와 약을 하자니 번거롭 고 잡초를 일일이 뽑자니 힘에 부쳐 내 몸이 먼저라는 생각을 피력한다.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하고 채소밭을 가보니 과연 심지 않은 잡초가 먹거리들을 무 성하게 치고 올라온다. 아내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잡초의 왕성함이 대견스럽게 다가온 다. 현대 문명의 특징을 표현하는 말은 여러 가지이겠으나 그 대표적인 말은 기계 문명이라 할 것이다. 기계 문명의 대표적인 상징인 과학 기술은 드디어 원자력 시대를 지나 우주 시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으니 인간의 두뇌 발달도 그 극에 달하고 있다.
이와같이 문명의 발달은 추앙할만한 하나, 그와 동시에 찬미하고만 있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염려스러운 징후들이 표출되고 있는데 이것이 현대의 고민과 그늘로 자리 잡아가는데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본래 사람이란 자연의 일부인데 자연을 정복하기에 바쁜 나머지 자연에 대하여 겸허함을 잊어버릴 정도로 오만해 질 수도 있으니 여기에 인간성의 재발견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 된다.
요즘 보면 과일이나 채소 할 것 없이 온실에서 속성 재배되는 것이 제철도 아닌데 사시 사철 미식가들의 입맛을 붓 돋아 줄 수 있어 좋지만 어딘지 그 미각이 좀 이상함은 기분의 탓만도 아닌 듯하다. 교육만 하더라도 확실히 온실적 속성 교육의 면이 눈에띈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 문명 아래서는 이런 것들이 다 불가피하며 또 불가피한 일들이겠지만 자연성이란 안목으로 볼 때에 어딘지 한군데 텅 비어있는 느낌이 드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그리고 시가를 활보하는 선남, 선녀들에게도 뒤 퉁 수를 맞을는지 모르지만 이런 냄새가 풍기는 데서 때로는 좀 더 잡초 적인 인간상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온실에 핀 화분의 꽃도 아름 답지만 외로이 산 중에 홀로 핀 꽃들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자연 앞에 겸허하게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잡초적 인간이 지니는 인간미와 야성미가 문명이 최고도로 발전하면 할수록 때로는 아쉬워질 따름이다. 잘살아 보겠다고 힘쓰다 보면 삶의 본질보다 부수적인 문제에 노력과 관심이 부과되어 잘 살아야 할 인간성 자체를 상실하기 쉬운 법? 사람끼리 믿고 사는 마음, 속이지 않는 사회, 거짓이 통하지 않는 곳이 좋은 사회일 것이다. 경제적 토대 위에 나라가 바로 서는 것이 아니라 도덕의 토대 위에 경제력이 확립되어야 올바른 사회가 아니겠는가?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창조주의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보람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고 어떤 지위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였느냐가 더 중요하다.
무슨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사람의 갑이 평가되는 사회가 되는 듯해 보여 안타깝다. 얼마나 가치 있고 보람을 남기고 살았느냐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명석한 두뇌로 어떤 일을 꾸몄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우주 만물은 조물주의 섭리와 성실성으로 쉬임 없이 운행하고 있는데 사랑 없는 개인이나 성실성 없는 개인이나 사회는 모래 위에 세운성임을 왜 인식하지 못할까?
잠언 기자도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사람의 마음에서 거짓과 불신의 잡초는 제거해 버리고 사랑과 성실의 잡초를 가꾸는 일에 매진해 가야 할 때이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은 온통 나체 사진으로 구성된 그림이다. 당시의 교황 바오 로 4세는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측근자를 통하여서 그 작품의 대대적인 수정을 종용해 왔다고 전해진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측근자에게 자신의 말을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교황은 내 작품의 수정보다도 이 사회의 수정을 먼저 생각하여 주셨으면 좋겠소! 하기야 그쪽이 더 어렵기는 하겠지만, 본인은 이말이 감동으로 다가 온다.
“그쪽이 더 어렵기는 하겠지만” 우리 사회는 각 분야에서 개혁의 슬로건 아래 노력하고 있지만 언제나 기득권층은 개혁자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들에 내 박 쳐진 잡초의 청순함은 장려하고 자기 멋대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란 내 안의 잡초는 제거 해야 됨에도 이일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오늘도 절감하고 기도의 손을 모아 본다. 내 마음의 잡초를 제거케 해 달라고. 그러나 홀로 들에 핀 잡초 같은 청순함과 고상함은 가꾸어 가리라 다짐해 본다. |
잡초가 무성하다.
(이선규 논설 주간)
평생 목회를 하며 거처할 공간이 없던 차에 은퇴 후 하나님의 은혜로 거처할 곳을 마련 해주셔서 천안으로 이사한 지 벌써 여러 해가 된다.
나는 서울에서 일을 보아야 하므로 주말 부부, 아니면 월말 부부로 전락하게 되었지만 홀로 집을 지키는 사모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이웃 주민이 ’묵어 있는 땅이 있으니 한번 경작해 보라‘는 제의가 와서 묵은 땅을 경작하고 생전 처음으로 먹거리를 심었는데 어설프지만 자라는 모습 에 흐뭇한 마음 자랑도 해보고 잘 자란 먹거리들을 이웃과 이웃과도 나누는 것이 참 보람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하루는 경작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건넨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대답이 ’잡초가 워낙 많이 나와 약을 하자니 번거롭 고 잡초를 일일이 뽑자니 힘에 부쳐 내 몸이 먼저라는 생각을 피력한다.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하고 채소밭을 가보니 과연 심지 않은 잡초가 먹거리들을 무 성하게 치고 올라온다. 아내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잡초의 왕성함이 대견스럽게 다가온 다.
현대 문명의 특징을 표현하는 말은 여러 가지이겠으나 그 대표적인 말은 기계 문명이라 할 것이다.
기계 문명의 대표적인 상징인 과학 기술은 드디어 원자력 시대를 지나 우주 시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으니 인간의 두뇌 발달도 그 극에 달하고 있다.
이와같이 문명의 발달은 추앙할만한 하나, 그와 동시에 찬미하고만 있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염려스러운 징후들이 표출되고 있는데 이것이 현대의 고민과 그늘로 자리 잡아가는데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본래 사람이란 자연의 일부인데 자연을 정복하기에 바쁜 나머지 자연에 대하여 겸허함을 잊어버릴 정도로 오만해 질 수도 있으니 여기에 인간성의 재발견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 된다.
요즘 보면 과일이나 채소 할 것 없이 온실에서 속성 재배되는 것이 제철도 아닌데 사시 사철 미식가들의 입맛을 붓 돋아 줄 수 있어 좋지만 어딘지 그 미각이 좀 이상함은 기분의 탓만도 아닌 듯하다.
교육만 하더라도 확실히 온실적 속성 교육의 면이 눈에띈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 문명 아래서는 이런 것들이 다 불가피하며 또 불가피한 일들이겠지만 자연성이란 안목으로 볼 때에 어딘지 한군데 텅 비어있는 느낌이 드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그리고 시가를 활보하는 선남, 선녀들에게도 뒤 퉁 수를 맞을는지 모르지만 이런 냄새가 풍기는 데서 때로는 좀 더 잡초 적인 인간상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온실에 핀 화분의 꽃도 아름 답지만 외로이 산 중에 홀로 핀 꽃들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자연 앞에 겸허하게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잡초적 인간이 지니는 인간미와 야성미가 문명이 최고도로 발전하면 할수록 때로는 아쉬워질 따름이다.
잘살아 보겠다고 힘쓰다 보면 삶의 본질보다 부수적인 문제에 노력과 관심이 부과되어 잘 살아야 할 인간성 자체를 상실하기 쉬운 법?
사람끼리 믿고 사는 마음, 속이지 않는 사회, 거짓이 통하지 않는 곳이 좋은 사회일 것이다.
경제적 토대 위에 나라가 바로 서는 것이 아니라 도덕의 토대 위에 경제력이 확립되어야 올바른 사회가 아니겠는가?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창조주의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보람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고 어떤 지위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였느냐가 더 중요하다.
무슨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사람의 갑이 평가되는 사회가 되는 듯해 보여 안타깝다.
얼마나 가치 있고 보람을 남기고 살았느냐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명석한 두뇌로 어떤 일을 꾸몄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우주 만물은 조물주의 섭리와 성실성으로 쉬임 없이 운행하고 있는데 사랑 없는 개인이나 성실성 없는 개인이나 사회는 모래 위에 세운성임을 왜 인식하지 못할까?
잠언 기자도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사람의 마음에서 거짓과 불신의 잡초는 제거해 버리고 사랑과 성실의 잡초를
가꾸는 일에 매진해 가야 할 때이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은 온통 나체 사진으로 구성된 그림이다. 당시의 교황 바오 로 4세는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측근자를 통하여서 그 작품의 대대적인 수정을 종용해 왔다고 전해진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측근자에게 자신의 말을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교황은 내 작품의 수정보다도 이 사회의 수정을 먼저 생각하여 주셨으면 좋겠소!
하기야 그쪽이 더 어렵기는 하겠지만, 본인은 이말이 감동으로 다가 온다.
“그쪽이 더 어렵기는 하겠지만” 우리 사회는 각 분야에서 개혁의 슬로건 아래 노력하고 있지만 언제나 기득권층은 개혁자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들에 내 박 쳐진 잡초의 청순함은 장려하고 자기 멋대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란 내 안의 잡초는 제거 해야 됨에도 이일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오늘도 절감하고 기도의 손을 모아 본다. 내 마음의 잡초를 제거케 해 달라고. 그러나 홀로 들에 핀 잡초 같은 청순함과 고상함은 가꾸어 가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