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아기는 어디에?

평화의 아기는 어디에? 

          (이선규 논설주간)


암울하던 과거 역사를 들여다보면 다툼과 분쟁, 전쟁의 소용돌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역사는 현재도 마침 표가 아니라 진행으로 흐르고 있다. 이렇게 흐르고 있는... 이제 마땅히 중지 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역사에는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어지기 때문이다. 보복이건 응징이건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기 마련이다.

영국에서 발행된 ‘평화의 아기“ 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세계 제2차 대전을 치루고 나서도 100여 개국에서 1300 여건의 분규 또는 전쟁이 있었으며 3.500만 명이 전쟁으로 희생되었다고 한다.

1차 대전에서만 천만 명이 희생되었고, 그 외 2차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에서 약 5.0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인류는 20세기 100년 동안에 세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데올로기보다 자유가 낫고 자원보다 두뇌가 낫고 대립보다 공존이 낫다는 것을 이제 서서히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대립이란 내가 너보다 우월하니 너는 나를 따라야 한다는 교만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공존은 함께 살자 피차 돕고 의지하자 함께 잘 되자.는 형제애 정신에서 나온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서에 보면 하나님 자신이 이런 생각을 가지시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시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 이라. 곧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하나님의 공존이란 이름을 붙여 주셨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는 순간 천사의 말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평화의 고지가 전하여 진다.

옛날 인도네시야의 아리안 자야족에 전도한 단 리차드슨 선교사의 유명한 선교 사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때는 아직 식인종이 활동하고 있었고 부족 간의 싸움이 치열했다고 한다. 서로 싸우다가 만일 화해를 청할 때는 자기 마을의 갓난아기를 적군에게 제물로 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아기를 ‘평화의 아기’라고 불러 주었다고 한다.

리차드슨 선교사가 이곳에 간지 이태되던 해 다시 부족전쟁으로 싸우고 있을 때 어느 백인 부부가 아기를 안고 나타났다. 양쪽이 서로 대치하고 있던 그들은 놀란 눈으로 이 서양인들을 지켜보았다. 선교사 부부는 바로 태어난 자신들의 아기를 평화의 아기로 내어 놓은 것이다.

쌍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의 공격 명령의 함성이 아니라 평화의 도래를 가리키는 기쁨의 소리요 환호의 아우성 이였다고 한다.

기독교를 전적으로 불신하던 자야안 부족들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다. 아기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위하여 오신 평화의 아기시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증오의 벽을 허물기 위하여 오신 평화의 아기이시다.

지금 우리에게는 어느 때보다도 평화의 아기가 요구되고 있다. 그동안 남과 북은 같은 동족이면서도 적대시하며 총칼을 겨누며 지내 왔으며 가까운 동족이면서도 가장 먼 곳에 있는 것처럼 적대시 해왔다. 한편 이해가 가기도 한다.

어떻게 형제와 부모를 학살한 북한과 대화 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저들은 북한은 반드시 섬멸해야 할 영원한 원수일 뿐이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서 한발 앞서가야 하지 않을까?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독생자까지 내어 주신 사랑을 힘입어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시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성서는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북한이 일으킨 수많은 소행을 생각하면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다시는 이 땅에 그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고 평화로은 세 상을 건설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 전쟁 때 미군 병사 존 토마스가 참호에서 밤을 세우는데 갑자기 한국인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총을 들이대자 그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을 부르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것은 평화를 노래하는 천사의 노래요 음성이었다고 간증하였다고 한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로다.

코로나 정국을 보내면서 고충을 호소가 심상찮다. 이 어려운 시기에 가진 자가 약자를 품어주며 여, 와 야가 함께 정, 쟁의 대상이 아닌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펼치게 되어지기를 바라며.

가장 지존하신 분이 가장 낮은 구유에 나신 평화의 정신을 실현하는 금년 크리스마스의 계절 이기를 소원해 본다. 그러할 때 지겹게 짓 누르고 있는 코로나의 재체기도 능히 극복 되리라고 확신하며 평화의 왕이시여 오시옵소서. 대림절에 기도의 손을 모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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